2017년 11월 30일 목요일

연면사, 소리의 유사성에 따른 다른 표기의 사어들이 늘어난다.
소리의 유사성, 설문에서 성훈의 방식. 소리로 글자의 의미를 푸는 것
출토문헌의 훈고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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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책

☞金文으로 허신의 설문해자에 대항했던 손이양의 古籀拾遗
☞리차드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최신한, 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변증법적 사유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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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9일 수요일

2017년 11월 26일 일요일

文学遗产 1981年第1期

▎陆永品,《庄子》散文研究管见
비관주의로서의 장자특질 규명,
행락(行乐)의 연원을 장자의 비관으로 본다면, 장자 자체를 낙관주의적 작품으로 보는 것은 오독일 것이다.

▎袁行霈,论屈原诗歌的艺术美 
▎姜亮夫,为屈原庚寅日生进一解
周金文에서 정해와 경인을 길일로 보는 예들
寅과 남성, 화살을 받드는 형상, 문자의 변형과 첩운, 성운에 따른 같은 어족의 문자들을 상고. 경인일은 분명 우연한 날짜가 아닌, 고대 문화 더욱이 초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길일, 남성성과 관련.(인자를 풀면서 강량부선생이 첩운과 성운에 따른 동일어족의 문자들을 선별하는 과정, 이에 대해 잘 소개한 책들이 있을까?)

▄郑伟华,《离骚》“女媭"为女星宿名的文化诠释,中山大学学报,2015
女媭가 28수중 여수의 하나인 수녀성이라는 주장, 女媭庙는 굴원의 누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닌, 별자리인 수녀성과 관련. 굴원의 누이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라는 설은 동진의 袁崧의 오해로부터 기인.

▄李学勤,先秦人名的几个问题, 《历史研究》 1991年05期
-金文的“ 尹” 也可充爵称用。
-商代人名的特色, 是有甲、乙、丙等天干, 即所谓日名。我在过去写的《论殷代亲族制度》一文中, 已引甲骨文例子, 证明日名是死后选定的, 在这一点上, 类似于溢法。商代已有溢法的萌芽, 如成汤的成, 武丁的武, 康丁的康等等。虽然日名没有道德的意味, 可是日名与其他人名成分的结合方式, 尤其是在周代存留的日名例子里, 是很像滋法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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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요일

십일조의 본질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멜기세덱 기사
민수기 18장의 소금언약, 십일조 규정
시편 110편의 멜기세덱의 반차
말라기의 십일조
히브리서의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

이상의 본문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십일조의 본래 목적은 레위인들의 기업을 잇기 위한 방편이 아닌,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하여 죽음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 이미 멜기세덱에게 십의 일을 드렸다는 것은 제사나 율법에 의한 십일 조에 앞선 본래적 십일조의 의미를 상기케하며, 동시에 레위족속, 확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이유가 이미 아브라함에 끼친 하나님의 은혜 역사 속에서 선취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한달 일 해 받은 월급의 십분지일을 드린다는 발상은 십일조의 본래목적과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감사를 그저 편의에 맞게 계산하는 느낌을 줄 뿐이다.  우리의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함에 대한 감사,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와 제사를 내포하여야 하며, 단순히 십일조 봉투에 담아드리는 10의 1만의 물질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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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唐書, 劉禹錫과 柳宗元

劉禹錫,字夢得,自言系出中山。世為儒。擢進士第,登博學宏辭科,工文章。淮南杜佑表管書記,入為監察御史。素善韋執誼。時王叔文得幸太子,禹錫以名重一時,與之交,叔文每稱有宰相器。太子即位,朝廷大議秘策多出叔文,引禹錫及柳宗元與議禁中,所言必從。擢屯田員外郎,判度支、鹽鐵案,頗馮藉其勢,多中傷士。若武元衡不為柳宗元所喜,自御史中丞下除太子右庶子;御史竇群劾禹錫挾邪亂政,群即日罷;韓皋素貴,不肯親叔文等,斥為湖南觀察使。凡所進退,視愛怒重輕,人不敢指其名,號「二王、劉、柳」。
  憲宗立,叔文等敗,禹錫貶連州刺史,未至,斥朗州司馬。州接夜郎諸夷,風俗陋甚,家喜巫鬼,每祠,歌《竹枝》,鼓吹裴回,其聲傖佇。禹錫謂屈原居沅、湘間作《九歌》,使楚人以迎送神,乃倚其聲,作《竹枝辭》十餘篇。於是武陵夷俚悉歌之。
  始,坐叔文貶者八人,憲宗欲終斥不復,乃詔雖後更赦令不得原。然宰相哀其才且困,將澡濯用之,會程异復起領運務,乃詔禹錫等悉補遠州刺史。而元衡方執政,諫官頗言不可用,遂罷。
  禹錫久落魄,鬱鬱不自聊,其吐辭多諷托幽遠,作《問大鈞》、《謫九年》等賦數篇。又敘:「張九齡為宰相,建言放臣不宜與善地,悉徙五溪不毛處。然九齡自內職出始安,有瘴癘之歎;罷政事守荊州,有拘囚之思。身出遐陬,一失意不能堪,矧華人士族必致醜地,然後快意哉!議者以為開元良臣,而卒無嗣,豈忮心失恕,陰責最大,雖它美莫贖邪!」欲感諷權近,而憾不釋。久之,召還。宰相欲任南省郎,而禹錫作《玄都觀看花君子》詩,語譏忿,當路者不喜,出為播州刺史。詔下,御史中丞裴度為言:「播極遠,猿狖所宅,禹錫母八十餘,不能往,當與其子死訣,恐傷陛下孝治,請稍內遷。」帝曰:「為人子者宜慎事,不貽親憂。若禹錫望它人,尤不可赦。」度不敢對,帝改容曰:「朕所言,責人子事,終不欲傷其親。」乃易連州,又徙夔州刺史。
  禹錫嘗歎天下學校廢,乃奏記宰相曰:
  言者謂天下少士,而不知養材之道,鬱堙不揚,非天不生材也。是不耕而歎廩庾之無餘,可乎?貞觀時,學舍千二百區,生徒三千餘,外夷遣子弟入附者五國。今室廬圮廢,生徒衰少,非學官不振,病無貲以給也。
  凡學官,春秋釋奠于先師,斯止辟雍、<半頁>宮,非及天下。今州縣鹹以春秋上丁有事孔子廟,其禮不應古,甚非孔子意。漢初群臣起屠販,故孝惠、高後間置原廟于郡國,逮元帝時,韋玄成遂議罷之。夫子孫尚不敢違禮饗其祖,況後學師先聖道而欲違之。《傳》曰:「祭不欲數。」又曰:「祭神如神在。」與其煩於薦饗,孰若行其教?今教頹靡,而以非禮之祀媚之,儒者所宜疾。竊觀歷代無有是事。
  武德初,詔國學立周公、孔子廟,四時祭。貞觀中,詔修孔子廟兗州。後許敬宗等奏天下州縣置三獻官,其他如立社。玄宗與儒臣議,罷釋奠牲牢,薦酒脯。時王孫林甫為宰相,不涉學,使御史中丞王敬從以明衣牲牢著為令,遂無有非之者。今夔四縣歲釋奠費十六萬,舉天下州縣歲凡費四千萬,適資三獻官飾衣裳,飴妻子,于學無補也。
  請下禮官博士議,罷天下州縣牲牢衣幣,春秋祭如開元時,籍其資半畀所隸州,使增學校,舉半歸太學,猶不下萬計,可以營學室,具器用,豐饌食,增掌故,以備使令,儒官各加稍食,州縣進士皆立程督,則貞觀之風,粲然可復。
  當時不用其言。
  由和州刺史入為主客郎中,復作《游玄都》詩,且言:「始謫十年,還京師,道士植桃,其盛若霞。又十四年過之,無復一存,唯兔葵、燕麥動搖春風耳。」以詆權近,聞者益薄其行。俄分司東都。宰相裴度兼集賢殿大學士,雅知禹錫,薦為禮部郎中、集賢直學士。度罷,出為蘇州刺史。以政最,賜金紫服。徙汝、同二州。遷太子賓客,復分司。
  禹錫恃才而廢,褊心不能無怨望,年益晏,偃蹇寡所合,乃以文章自適。素善詩,晚節尤精,與白居易酬復頗多。居易以詩自名者,嘗推為「詩豪」,又言:「其詩在處,應有神物護持。」
  會昌時,加檢校禮部尚書。卒,年七十二,贈戶部尚書。始疾病,自為《子劉子傳》,稱:「漢景帝子勝,封中山,子孫為中山人。七代祖亮,元魏冀州刺史,遷洛陽,為北部都昌人,墳墓在洛北山,後其地狹不可依,乃葬滎陽檀山原。德宗棄天下,太子立,時王叔文以善弈得通籍,因間言事,積久,眾未知。至起蘇州掾,超拜起居舍人、翰林學士,陰薦丞相杜佑為度支、鹽鐵使。翌日,自為副,貴震一時。叔文,北海人,自言猛之後,有遠祖風,東平呂溫、隴西李景儉、河東柳宗元以為信然。三子者皆予厚善,日夕過,言其能。叔文實工言治道,能以口辯移人,既得用,所施為人不以為當。太上久疾,宰臣及用事者不得對,宮掖事秘,建桓立順,功歸貴臣,由是及貶。」其自辯解大略如此。

柳宗元,字子厚,其先蓋河東人。從曾祖奭為中書令,得罪武后,死高宗時。父鎮,天寶末遇亂,奉母隱王屋山,常間行求養,後徙于吳。肅宗平賊,鎮上書言事,擢左衛率府兵曹參軍。佐郭子儀朔方府,三遷殿中侍御史。以事觸竇參,貶夔州司馬。還,終侍御史。
  宗元少精敏絕倫,為文章卓偉精緻,一時輩行推仰。第進士、博學宏辭科,授校書郎,調藍田尉。貞元十九年,為監察御史裏行。善王叔文、韋執誼,二人者奇其才。及得政,引內禁近,與計事,擢禮部員外郎,欲大進用。
  俄而叔文敗,貶邵州刺史,不半道,貶永州司馬。既竄斥,地又荒癘,因自放山澤間,其堙厄感鬱,一寓諸文,仿《離騷》數十篇,讀者咸悲惻。雅善蕭亻免,詒書言情曰:
  僕向者進當臲卼不安之勢,平居閉門,口舌無數,又久興遊者,岌岌而操其間。其求進而退者,皆聚為仇怨,造作粉飾,蔓延益肆。非的然昭晰、自斷於內,孰能了僕於冥冥間哉?僕當時年三十三,自御史裏行得禮部員外郎,超取顯美,欲免世之求進者怪怒媢疾,可得乎?與罪人交十年,官以是進,辱在附會。聖朝寬大,貶黜甚薄,不塞眾人之怒,謗語轉侈,囂囂嗷嗷,漸成怪人。飾智求仕者,更詈僕以悅仇人之心,日為新奇,務相悅可,自以速援引之路。僕輩坐益困辱,萬罪橫生,不知其端,悲夫!人生少六七十者,今三十七矣,長來覺日月益促,歲歲更甚,大都不過數十寒暑,無此身矣。是非榮辱,又何足道!云云不已,祗益為罪。
  居蠻夷中久,慣習炎毒,昏眊重膇,意以為常。忽遇北風晨起,薄寒中體,則肌革慘懍,毛髮蕭條,瞿然注視,怵惕以為異候,意緒殆非中國人也。楚、越間聲音特異,鴂舌啅噪,今聽之恬然不怪,已與為類矣。남방방언에 대한家生小童,皆自然嘵嘵,晝夜滿耳;聞北人言,則啼呼走匿,雖病夫亦怛然駭之。出門見適州閭市井者,其十八九杖而後興。自料居此,尚復幾何,豈可更不知止,言說長短,重為一世非笑哉?讀《易·困卦》至「有言不信,尚口乃窮」,往復益喜,曰:「嗟乎!餘雖家置一喙以自稱道,詬益甚耳。」用是更樂喑默,與木石為徒,不復致意。
  今天子興教化,定邪正,海內皆欣欣怡愉,而僕與四五子者,淪陷如此,豈非命歟?命乃天也,非云云者所制,又何恨?然居治平之世,終身為頑人之類,猶有少恥,未能盡忘。儻因賊平慶賞之際,得以見白,使受天澤餘潤,雖朽枿敗腐不能生植,猶足蒸出芝菌,以為瑞物。一釋廢錮,移數縣之地,則世必曰罪稍解矣。然後收召魂魄,買土一廛為耕氓,朝夕歌謠,使成文章,庶木鐸者採取,獻之法宮,增聖唐大雅之什,雖不得位,亦不虛為太平人矣。
  又詒京兆尹許孟容曰:
  宗元早歲與負罪者親善,始奇其能,謂可以共立仁義,裨教化。過不自料,勤勤勉勵,唯以忠正信義為志,興堯、舜、孔子道,利安元元為務,不知愚陋不可以強,其素意如此也。末路厄塞臲卼,事既壅隔,很忤貴近,狂疏繆戾,蹈不測之辜。今黨與幸獲寬貸,各得善地,無公事,坐食奉祿,德至渥也。尚何敢更俟除棄廢痼,希望外之澤哉?年少氣銳,不識幾微,不知當否,但欲一心直遂,果陷刑法,皆自所求取,又何怪也?
  宗元于眾党人中,罪狀最甚,神理降罰,又不能即死,猶對人語言,飲食自活,迷不知恥,日復一日。然亦有大故。自以得姓來二千五百年,代為塚嗣,今抱非常之罪,居夷獠之鄉,卑濕昏霧,恐一日填委溝壑,曠墜先緒,以是怛然痛恨,心骨沸熱。煢煢孤立,未有子息,荒陬中少士人女子,無與為婚,世亦不肯與罪人親昵,以是嗣續之重,不絕如縷。후사를 잇는 것과 고대인, 每春秋時饗,孑立捧奠,顧眄無後繼者,懍懍然欷歔惴惕,恐此事便已,摧心傷骨,若受鋒刃。此誠丈人所共閔惜也。先墓在城南,無異子弟為主,獨托村鄰。自譴逐來,消息存亡不一至,鄉閭主守固以益怠。晝夜哀憤,懼便毀傷松柏,芻牧不禁,以成大戾。近世禮重拜掃,今闕者四年矣。每遇寒食,則北向長號,以首頓地。想田野道路,士女遍滿,皁隸庸丐,皆得上父母丘墓;馬醫、夏畦之鬼,無不受子孫追養者。然此已息望,又何以雲哉?城西有數頃田,樹果數百株,多先人手自封植,今已荒穢,恐便斬伐,無復愛惜。家有賜書三千卷,尚在善和裏舊宅,宅今三易主,書存亡不可知。皆付受所重,常系心腑,然無可為者。立身一敗,萬事瓦裂,身殘家破,為世大僇。是以當食不知辛鹹節適,洗沐盥漱,動逾歲時,一搔皮膚,塵垢滿爪,誠憂恐悲傷,無所告訴,以至此也。
  自古賢人才士,秉志遵分,被謗議不能自明者,以百數。故有無兄盜嫂,娶孤女撾婦翁者。然賴當世豪傑分明辨列,卒光史冊。管仲遇盜,升為功臣;匡章被不孝名,孟子禮之。今已無古人之實為而有詬,欲望世人之明己,不可得也。直不疑買金以償同舍;劉寬下車,歸牛鄉人。此誠知疑似之不可辯,非口舌所能勝也。鄭詹束縛于晉,終以無死;鐘儀南音,卒獲返國;叔向囚虜,自期必免;范痤騎危,以生易死;蒯通據鼎耳,為齊上客;張蒼、韓信伏斧鑕,終取將相;鄒陽獄中,以書自治;賈生斥逐,復召宣室;兒寬擯厄,後至御史大夫;董仲舒、劉向下獄當誅,為漢儒宗。此皆瑰偉博辯奇壯之士,能自解脫。今以恇怯淟涊,下才末伎,又嬰痼病,雖欲慷慨攘臂,自同昔人,愈疏闊矣。
  賢者不得志於今,必取貴于後,古之著書者皆是也。宗元近欲務此,然力薄志劣,無異能解,欲秉筆覙縷,神志荒耗,前後遺忘,終不能成章。往時讀書,自以不至牴滯,今皆頑然無復省錄。讀古人一傳,數紙後,則再三伸卷,復觀姓氏,旋又廢失。假令萬一除刑部囚籍,復為士列,亦不堪當世用矣!
  伏惟興哀於無用之地,垂德於不報之所,以通家宗祀為念,有可動心者操之勿失。雖不敢望歸掃塋域,退托先人之廬,以盡余齒,姑遂少北,益輕瘴癘,就婚娶,求胄嗣,有可付託,即冥然長辭,如得甘寢,無復恨矣!
  然眾畏其才高,懲刈復進,故無用力者。
  宗元久汩振,其為文,思益深。嘗著書一篇,號《貞符》,曰:
  臣所貶州流人吳武陵為臣言:「董仲舒對三代受命之符,誠然?非邪?」臣曰:「非也。何獨仲舒爾,司馬相如、劉向、揚雄、班彪、彪子固皆沿襲嗤嗤,推古瑞物以配受命,其言類淫巫瞽史,誑亂後代,不足以知聖人立極之本,顯至德,揚大功,甚失厥趣。臣為尚書郎時,嘗著《貞符》,言唐家正德受命于生人之意、累積厚久宜享無極之義,本末閎闊。會貶逐中輟,不克備究。」武陵即叩頭邀臣:「此大事,不宜以辱故休缺,使聖王之典不立,無以抑詭類、拔正道、表核萬代。」臣不勝奮激,即具為書。念終泯沒蠻夷,不聞于時,獨不為也。苟一明大道,施于人世,死無所憾,用是自決。臣宗元稽首拜手以聞曰:
  孰稱古初,朴蒙空侗而無爭,厥流以訛,越乃奮奪,鬥怒振動,專肆為淫威?曰:是不知道。惟人之初,總總而生,林林而群。雪霜風雨雷雹暴其外,於是乃知架巢空穴,挽草木,取皮革;饑渴牝牡之欲驅其內,於是乃噬禽獸,咀果穀。合偶而居,交焉而爭,睽焉而鬥,力大者搏,齒利者齧,爪剛者決,群眾者軋,兵良者殺,披披藉藉,草野塗血。在後強有力者出而治之,往往為曹于險陰,用號令起,而君臣什伍之法立。德紹者嗣,道怠者奪。於是有聖人焉,曰黃帝,游其兵車,交貫乎其內,一統類,齊制量,然猶大公之道不克建。於是有聖人焉,曰堯,置州牧四嶽,持而綱之,立有德有功有能者,參而維之,運臂率指,屈伸把握,莫不統率;年老,舉聖人而禪焉,大公乃克建。由是觀之,厥初罔匪極亂,而後稍可為也。而非德不樹,故仲尼敘《書》,於堯曰「克明俊德」,於舜曰「濬哲文明」,于禹曰「文命祗承於帝」,于湯曰「克寬克仁,章信兆民」,于武王曰「有道曾孫」。稽揆典誓,貞哉惟茲德,實受命之符,以奠永祀。後之祅淫囂昏好怪之徒,乃始陳大電、大虹、玄鳥、巨跡、白狼、白魚、流火之烏以為符,斯皆詭譎闊誕,其可羞也,莫知本於厥貞。
  漢用大度,克懷於有氓,登能庸賢,濯痍煦寒,以瘳以熙,茲其為符也。而其妄臣,乃下取虺蛇,上引天光,推類號休,用誇誣於無知氓,增以騶虞、神鼎,脅驅縱踴,俾東之泰山、石閭,作大號謂之「封禪」,皆《尚書》所無有。莽、述承效,卒奮驁逆。其後有賢帝曰光武,克綏天下,復承舊物,猶崇《赤伏》,以玷厥德。魏、晉而下,尨亂鉤裂,厥符不貞,邦用不靖,亦罔克久,駁乎無以議為也。
  積大亂至於隋氏,環四海以為鼎,跨九垠以為爐,爨以毒燎,煽以虐焰,其人沸湧灼爛,號呼騰蹈,莫有救止。於是大聖乃起,丕降霖雨,濬滌蕩沃,蒸為清氛,疏為泠風,人乃漻然休然,相晞以生,相持以成,相彌以寧。琢斮屠剔膏流節離之禍不作,而人乃克完平舒愉,屍其肌膚,以達於夷途。焚坼抵掎奔走轉死之害不起,而人乃克鳩類集族,歌舞悅懌,用抵於元德。徒奮袒呼,犒迎義旅,歡動六合,至於麾下。大盜豪據,阻命遏德,義威殄戮,鹹墜厥緒。無劉於虐,人乃並受休嘉,去隋氏,克歸於唐,躑躅謳歌,灝灝和寧。帝庸威栗,惟人之為。敬奠厥賦,積藏於下,是謂豐國。鄉為義廩,斂發謹飭,歲丁大侵,人以有年。簡于厥刑,不殘而懲,是謂嚴威。小屬而支,大生而孥,愷悌祗敬,用底於治。凡其所欲,不謁而獲;凡其所惡,不祈而息。四夷稽服,不作兵革,不竭貨力。丕揚於後嗣,用垂於帝式,十聖濟厥治,孝仁平寬,惟祖之則。澤久而逾深,仁增而益高,人之戴唐,永永無窮。
  是故受命不于天,於其人;休符不于祥,於其仁。惟人之仁,匪祥於天。匪祥於天,茲惟貞符哉!未有喪仁而久者也,未有恃祥而壽者也。商之王以桑穀昌,以雉鴝大,宋之君以法星壽,鄭以龍衰,魯以麟弱,白雉亡漢,黃犀死莽,惡在其為符也?不勝唐德之代,光紹明濬,深鴻尨大,保人斯無疆,宜薦於郊廟,文之雅詩,祗告於德之休。帝曰諶哉!乃黜休祥之奏,究貞符之奧,思德之所未大,求仁之所未備,以極於邦治,以敬於人事。其詩曰:
  于穆敬德,黎人皇之。惟貞厥符,浩浩將之。仁函于膚,刃莫畢屠。澤於爨,灊炎以澣。勃厥凶德,乃驅乃夷。懿其休風,是煦是吹。父子熙熙,相寧以嬉。賦徹而藏,厚我糗粻。刑輕以清,我完靡傷。貽我子孫,百代是康。十聖嗣於治,仁後之子。子思孝父,易患於己。拱之戴之,神其爾宜。載揚於雅,承天之嘏。天之誠神,宜鑒於仁。神之曷依?宜仁之歸。濮钅公于北,祝栗于南,幅員西東,祗一乃心。祝唐之紀,後天罔墜;祝皇之壽,與地鹹久。曷徒祝之,心誠篤之。神協人同,道以告之。俾彌億萬年,不震不危。我代之延,永永毘之。仁增以崇,曷不爾思?有號於天,僉曰嗚呼,咨爾皇靈,無替厥符!
  宗元不得召,內閔悼,悔念往吝,作賦自儆曰:
  懲咎愆以本始兮,孰非餘心之所求?處卑污以閔世兮,固前志之為尤。始余學而觀古兮,怪今昔之異謀。惟聰明為可考兮,追駿步而遐遊。絜誠之既信直兮,仁友藹而萃之。日施陳以系縻兮,邀堯舜禹之為。上睢盱而混茫兮,下駁詭而懷私。旁羅列以交貫兮,求大中之所宜。
  曰道有象兮,而無其形。推變乘時兮,與志相迎。不及則殆兮,過則失貞。謹守而中兮,與時偕行。萬類芸芸兮,率由以寧。剛柔弛張兮,出入綸經。登能抑枉兮,白黑濁清。蹈乎大方兮,物莫能嬰。
  奉訏謨以植內兮,欣餘志之有獲。再明信乎策書兮,謂耿然而不惑。愚者果于自用兮,惟懼夫誠之不一。不顧慮以周圖兮,專茲道以為服。讒妒構而不戒兮,猶斷斷於所執。哀吾黨之不淑兮,遭任遇之卒迫。勢危疑而多詐兮,逢天地之否隔。欲圖退而保己兮,悼乖期乎曩昔。欲操術以致忠兮,眾呀然而互嚇。進與退吾無歸兮,甘脂潤兮鼎鑊。幸皇鑒之明宥兮,累郡印而南適。惟罪大而寵厚兮,宜夫重仍乎禍謫。既明懼乎天討兮,又幽忄栗乎鬼責。惶惶乎夜寤而晝駭兮,類鹿濩秬之不息。
  淩洞庭之洋洋兮,溯湘流之沄沄。飄風擊以揚波兮,舟摧抑而回邅。日霾曀以昧幽兮,黝雲湧而上屯。暮屑窣以淫雨兮,聽嗷嗷之哀猿。眾鳥萃而啾號兮,沸洲渚以連山。漂遙逐其詎止兮,逝莫屬餘之形魂。攢巒奔以紆委兮,束洶湧之崩湍。畔尺進而尋退兮,蕩洄汩乎淪漣。際窮冬而止居兮,羈累棼以縈纏。
  哀吾生之孔艱兮,循《凱風》之悲詩。罪通天而降酷兮,不亟死而生為!逾再歲之寒暑兮,猶貿貿而自持。將沈淵而隕命兮,詎蔽罪以塞禍?惟滅身而無後兮,顧前志猶未可。進路呀以劃絕兮,退伏匿又不果。為孤囚以終世兮,長拘攣而轗軻。
  曩餘志之脩蹇兮,今何為此戾也?豈貪食而盜名兮,不混同於世也。將顯身以直遂兮,眾之所宜蔽也。不擇言以危肆兮,固群禍之際也。
  禦長轅之無橈兮,行九折之峨峨。卻驚棹以橫江兮,溯淩天之騰波。幸餘死之已緩兮,完形軀之既多。苟餘齒之有懲兮,蹈前烈而不頗。死蠻夷固吾所兮,雖顯寵其焉加?配大中以為偶兮,諒天命之謂何!
  元和十年,徙柳州刺史。時劉禹錫得播州,宗元曰:「播非人所居,而禹錫親在堂,吾不忍其窮,無辭以白其大人,如不往,便為母子永決。」即具奏欲以柳州授禹錫而自往播。會大臣亦為禹錫請,因改連州。
  柳人以男女質錢,過期不贖,子本均,則沒為奴婢。宗元設方計,悉贖歸之。尤貧者,令書庸,視直足相當,還其質。已沒者,出己錢助贖。南方為進士者,走數千里從宗元遊,經指授者,為文辭皆有法。世號「柳柳州」。十四年卒,年四十七。유종원의 위인과 덕행
  宗元少時嗜進,謂功業可就。既坐廢,遂不振。然其才實高,名蓋一時。韓愈評其文曰:「雄深雅健,似司馬子長,崔、蔡不足多也。」既沒,柳人懷之,托言降於州之堂,人有慢者輒死。廟于羅池,愈因碑以實之雲。한위가 나지의 비명을 쓴 고사

상곡(桑穀)은 뽕나무와 닥나무이며, 고종은 상(商) 나라의 임금인 무정(武丁)의 묘호(廟號)이다. 옛날 상 나라의 조정에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나와 자랐으므로 이것을 큰 변괴라 하였는데 무정이 두려워하여 덕을 닦자, 이들 나무가 말라죽고 상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한다. 《史記 殷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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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민병석 목사 밤중소리 http://www.bamjoongsori.org/
최창모, 이스라엘사 http://terms.naver.com/list.nhn?cid=43010&categoryId=4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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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詩家有以山喻愁者,杜少陵云“憂端如山來,澒洞不可掇”,趙嘏云“夕陽樓上山重疊,未抵春愁一倍多”是也。有以水喻愁者,李頎云“請量東海水,看取淺深愁”,李後主云“問君都有幾多愁?恰似一江春水向東流”,秦少遊云“落紅萬點愁如海”是也。賀方回云:“試問閑愁知幾許,一川煙草,滿城風絮,梅子黃時雨。”蓋以三者比之愁多也,尤為新奇,兼興中有比,意味更長。


●许倬云, 从历史看领导


●中国历代诗经学


●이십사사차기


●당송팔대가 전문
http://www.eywedu.com/Ts8/index.htm


●이강범, 『詩經』연구 혁신의 시작 ― 歐陽修 『詩本義』


●崔东壁遗书


●国穷民穷官不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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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신학난제(Theological conundrum)

▷멜기세덱, 그리스도, 십일조,맏물, 맏아들
▷창세기-잠언-계시록의 생명나무
▷이방여인에 대한 예수의 상반된 태도(수가성 여인과 가나안 여인),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의 이중적 의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과 유대, 잃어버린 양은 영적 선민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당시의 역사적 선민인 유대민족 자체를 포함하는가. 바울에게 있어 동족의 구원은 영적 선민이라는 의미 외에도 반드시 민족적 각도에서 수용, 이해 가능한 범위에 있다. 예수께서도 이런 역사적 예수라는 틀 속에서 사고 하셨고, 그 분의 사역 속에서 구원의 대상이 확대되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왜 일견 민족종교로서의 유대교적인 모습으로 구원의 대상을 한정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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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梁涛,从简帛《五行》“经”到帛书《五行》“说”
△常森,论简帛《五行》与《诗经》学之关系
△《简帛〈五行〉篇与孟子之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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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何新:论《诗经》
http://blog.sina.com.cn/s/blog_4b712d230102w0xv.html
△何新:对《诗经》的现代诠释
http://www.360doc.com/content/16/0714/23/2936608_575578991.shtml 
△张一兵,《析阿尔都塞的症候阅读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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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9일 목요일

2017년 11월 7일 화요일

羅隱의 詩 두 首

早登新安縣樓 
關城樹色齊,往事未全迷。관성에 나무들은 아직 같은 색이요, 옛일이 전부 알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네.
塞路真人氣,封門壯士泥。
草濃延蝶舞,花密教鶯啼。
若以鳴為德,鸞皇不及雞。

 
籬落歲云暮,數枝聊自芳。
雪裁纖蕊密,金拆小苞香。눈이 가는 꽃술을 마름한 듯, 가을 기운이 작은 꽃봉오리 향기를 터뜨린 듯.
千載白衣酒,一生青女霜。
春叢莫輕薄,彼此有行藏。
△白衣酒:진(晉)나라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중양절(重陽節)에 백의(白衣)의 사자를 시켜 도연명(陶淵明)에게 술을 보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청녀(靑女) : 서리와 눈을 주관하는 전설 속의 여신(女神)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이르기를 “늦가을 9월에 이르면……청녀가 나와서 서리와 눈을 내린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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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4일 토요일

▧崔顥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황학루(黃鶴樓)에 올라서 시를 지으려다가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를 보고 탄복하여 다시 시를 짓지 못하고, 봉황대로 가서 부(賦)를 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두고 후세의 어떤 선승(禪僧)이 “한 주먹으로 황학루를 때려 부수고, 한 발길로 앵무주를 뒤엎으려 했네. 눈앞의 경관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 최호의 시가 최고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一拳搥碎黄鹤楼 一脚踢翻鹦鹉洲 眼前有景道不得 崔颢题诗在上头]”라고 읊었다고 한다.
△《王家少婦》(一作古意)
十五嫁王昌,盈盈入畫堂。
自矜年最少,復倚壻爲郎。
舞愛前谿綠,歌憐子夜長。
閑來鬬百草,度日不成妝。 

夜愁生枕席,春意罷簾櫳。(《長門怨》) 
拂匣先臨鏡,調笙更炙簧。(《岐王席觀妓》) 
△《黃鶴樓 / 登黃鶴樓》
昔人已乘黃鶴去,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鄉關何處是?煙波江上使人愁。 
△《邯鄲宮人怨》
邯鄲陌上三月春,暮行逢見一婦人。
自言鄉里本燕趙,少小隨家西入秦。
母兄憐愛無儔侶,五歲名爲阿嬌女。
七歲丰茸好顏色,八歲黠惠能言語。
十三兄弟教詩書,十五青樓學歌舞。
我家青樓臨道傍,紗窗綺幔暗聞香。
日暮笙歌君駐馬,春日妝梳妾斷腸。
不用城南使君壻,本求三十侍中郎。
何知漢帝好容色,玉輦攜登歸建章。
建章宮殿不知數,萬戶千門深且長。
百堵塗椒接青瑣,九華閣道連洞房。
水晶簾箔雲母扇,琉璃窗牖玳瑁牀。
歲歲年年奉歡宴,嬌貴榮華誰不羨。
恩情莫比陳皇后,寵愛全勝趙飛燕。
瑤房侍寢世莫知,金屋更衣人不見。
誰言一朝復一日,君王棄世市朝變。
宮車出葬茂陵田,賤妾獨留長信殿。
一朝太子升至尊,宮中人事如掌翻。
同時侍女見讒毀,後來新人莫敢言。
兄弟印綬皆被奪,昔年賞賜不復存。
一旦放歸舊鄉里,乘車垂淚還入門。
父母愍我曾富貴,嫁與西舍金王孫。
念此翻覆復何道,百年盛衰誰能保。
憶昨尚如春日花,悲今已作秋時草。
少年去去莫停鞭,人生萬事由上天。
非我今日獨如此,古今歇薄皆共然。

△《行路難·君不見建章宮中金明枝》
君不見
建章宮中金明枝,萬萬長條拂地垂。
二月三月花如霰,九重幽深君不見。
豔彩朝含四寶宮,香風旦入朝雲殿。
漢家宮女春未闌,愛此芳香朝暮看。
看來看去心不忘,攀折將安鏡台上。
雙雙素手剪不成,兩兩紅妝笑相向。
建章昨夜起春風,一花飛落長信宮。
長信麗人見花泣,憶此珍樹何嗟及。
我昔初在昭陽時,朝攀暮折登玉墀。
隻言歲歲長相對,不悟今朝遙相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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勾踐投醪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의 치욕을 갚고자 하여 술이 있으면 강물에 부어서 함께 마셨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呂氏春秋 順民》 또 이 내용은 ‘구천투료 육항상약(句踐投醪 陸抗嘗藥)’이라는 성어(成語)로 《몽구(蒙求)》 권하(卷下)에 실려 있다.

무경칠서를 直解한 劉寅은 ≪삼략≫이 太公의 병법을 바탕으로 하고 일부분은 黃石公이 후대에 부연 설명한 것이라 믿었다. 때문에 전국시대 越王 句踐의 投醪 고사가 나와 태공의 저작이라 설명하기 힘들게 되자, 이는 黃石公이 부연한 것이거나 句踐 이전에 혹 비슷한 고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도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용 중 상당수가 戰國 이후 秦漢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전제로 기술된 것이기에 태공의 병법이라고 믿었던 유인도 直解 곳곳에서 진한 시대의 고사를 인용해 본문을 설명하는 모순을 범하게 되었다.
http://db.cyberseodang.or.kr/front/search/contentsLink.do?mId=&srchIdx=1&srchCondition=3&srchKeyword=%E6%8A%95%E9%86%AA&srchCbId=&srchBnCode=&srchCode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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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2장 3절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의 심상과
시경 대아 행위편의 "敦彼行葦단피행위를牛羊勿踐履우양물천리면方苞方體방포방체하야維葉泥泥유엽녜녜"
그리고 반고가 이를 인용한 북정부의 "慕公劉之遺德,及行葦之不傷。彼何生之優渥,我獨罹此百殃?" 사이의 유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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班固의 北征賦/ 班昭의 東征賦


北征賦 
余遭世之顛覆兮,罹填塞之阨災。舊室滅以丘墟兮,曾不得乎少留。遂奮袂以北征兮,超絕跡而遠遊。
  朝發軔於長都兮,夕宿瓠谷之玄宮。歷雲門而反顧,望通天之崇崇。乘陵崗以登降,息郇邠之邑鄉。慕公劉之遺德,及行葦之不傷。彼何生之優渥,我獨罹此百殃?故時會之變化兮,非天命之靡常。
  登赤須之長阪,入義渠之舊城。忿戎王之淫狡,穢宣后之失貞。嘉秦昭之討賊,赫斯怒以北征。紛吾去此舊都兮,騑遲遲以歷茲。
  遂舒節以遠逝兮,指安定以為期。涉長路之綿綿兮,遠紆回以樛流。過泥陽而太息兮,悲祖廟之不脩。釋余馬於彭陽兮,且弭節而自思。日晻晻其將暮兮,睹牛羊之下來。寤曠怨之傷情兮,哀詩人之歎時。
  越安定以容與兮,遵長城之漫漫。劇蒙公之疲民兮,為彊秦乎築怨。舍高亥之切憂兮,事蠻狄之遼患。不耀德以綏遠,顧厚固而繕藩。首身分而不寤兮,猶數功而辭諐。何夫子之妄說兮,孰云地脈而生殘。
  登鄣隧而遙望兮,聊須臾以婆娑。閔獯鬻之猾夏兮,弔尉卭於朝那。從聖文之克讓兮,不勞師而幣加。惠父兄於南越兮,黜帝號於尉他。降几杖於藩國兮,折吳濞之逆邪。惟太宗之蕩蕩兮,豈曩秦之所圖。
  隮高平而周覽,望山谷之嵯峨。野蕭條以莽蕩,迥千里而無家。風猋發以漂遙兮,谷水灌以揚波。飛雲霧之杳杳,涉積雪之皚皚。鴈邕邕以群翔兮,鵾雞鳴以嚌嚌。
  遊子悲其故鄉,心愴悢以傷懷。撫長劍而慨息,泣漣落而霑衣。攬余涕以於邑兮,哀生民之多故。夫何陰曀之不陽兮,嗟久失其平度。諒時運之所為兮,永伊鬱其誰愬?
  亂曰:夫子固窮遊藝文兮,樂以忘憂惟聖賢兮?達人從事有儀則兮,行止屈申與時息兮?君子履信無不居兮,雖之蠻貊何憂懼兮?


東征賦 
惟永初之有七兮,餘隨子乎東征。時孟春之吉日兮,撰良辰而將行。乃擧趾而升輿兮,夕予宿乎偃師。遂去故而就新兮,志愴悢而懷悲!
  明發曙而不寐兮,心遲遲而有違。酌鞰酒以弛念兮,喟抑情而自非。諒不登樔而椓蠡兮,得不陳力而相追。且從眾而就列兮,聽天命之所歸。遵通衢之大道兮,求捷徑欲從誰?乃遂往而徂逝兮,聊游目而遨魂!
  曆七邑而觀覽兮,遭鞏縣之多艱。望河洛之交流兮,看成皋之鏇門。既免脱於峻崄兮,曆滎陽而過卷。食原武之息足,宿陽武之桑間。涉封丘而踐路兮,慕京師而竊歎!小人性之懷土兮,自書傳而有焉。
  遂進道而少前兮,得平丘之北邊。入匡郭而追遠兮,念夫子之厄勤。彼衰亂之無道兮,乃困畏乎聖人。悵容與而久駐兮,忘日夕而將昏。到長垣之境界,察農野之居民。睹蒲城之丘墟兮,生荆棘之榛榛。惕覺寤而顧問兮,想子路之威神。衛人嘉其勇義兮,訖於今而稱雲。蘧氏在城之東南兮,民亦尚其丘墳。唯令德爲不朽兮,身既沒而名存。
  惟經典之所美兮,貴道德與仁賢。吳劄稱多君子兮,其言信而有徵。後衰微而遭患兮,遂陵遲而不興。知性命之在天,由力行而近仁。勉仰高而蹈景兮,盡忠恕而與人。好正直而不回兮,精誠通於明神。庶靈祇之鑒照兮,佑貞良而輔信。
  亂曰:君子之思,必成文兮。盍各言志,慕古人兮。先君行止,則有作兮。雖其不敏,敢不法兮。貴賤貧富,不可求兮。正身履道,以俟時兮。修短之運,愚智同兮。靖恭委命,唯吉凶兮。敬慎無怠,思嗛約兮。清靜少欲,師公綽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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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쑥하다와 해쓱하다 둘 다 표준어
△赵国璋의 《文史工具书概论》/ 祝鸿喜 编의 《文史工具书词典》
△혼인적령기가 지나도 결혼하지 못한 남녀나 짝을 잃고 독수공방하는 남녀를 曠夫怨女라고 하는데,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白首狂父)가 물을 건넌 것이 혹 전쟁에 가는 것을 비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강에 빠져 죽음은 실제로 군역을 면하기 위한 저항의 표시이거나 죽음을 강이라는 이미지에 합치한 원유일 수 있다. 
최표의 고금주를 보면 지금 우리가 보는 한역된 공무도하가는 곽리자고가 목격한 현장의 설명 정도이지 광부의 아내가 공후를 뜯으며 부른 원곡의 가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곽리자고가 아내에게 전한 노래 자체도 가사라기보다는 그 곡의 정황이나 음률이었을 것이다. 이는 고금주의 음악편에 이 고사가 수록된 것을 보고도 짐작할 수 있다. 
어찌됐든 공무도하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것들이 여럿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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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3일 금요일

≪六韜直解≫ 解題




六韜 周나라 文王武王과 太公望이 兵事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기술된 6권의 兵書이다. 흔히 ‘六韜三略’, ‘韜略’이라 하여三略 함께 병칭되어 병서나 병법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六韜 韜는 ‘숨기다, 감추다’의 뜻으로 활집을 뜻하는 弢자와 같은 의미이니, 삼략 略과 같이 병법 책략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 전하는육도 구성은 ˂文韜˃, ˂武韜˃, ˂龍韜˃, ˂虎韜˃, ˂豹韜˃, ˂犬韜˃ 6 6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량은 16,800 자로 다른 병서와 비교해볼 많은 분량이다.
육도 저자는 周나라 太公望 呂尙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저자만으로 武經七書 가장 오래된 셈이다. 그러나육도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의 여타 古書들처럼 논란이 있어왔다. 육도 兵學의 始祖라 있는 太公의 사상을 바탕으로 戰國時代와 漢나라를 거치면서 당시 병법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보태지기도 하고 산삭되기도 하여 현재와 같은 60편으로 정리되었다. 儒家, 法家, 道家 諸家 사상을 아우른 통치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孫子 달리육도 攻守와 防禦, 用兵에서 실전적으로 도움이 기술을 자세히 거론하여 장수가 익혀야 필수과목으로 가치를 인정받아왔으므로 위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경칠서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1. 六韜 전래와 僞書 논란
육도 서명이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莊子 ˂徐無鬼˃편이다. 徐無鬼가 제왕을 설득하는 논리를 , , , 樂과 함께 ‘金版 六弢’란 책을 언급하였는데, 經典釋文에는 여기의六弢 바로 太公의六韜 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이미육도라는 이름의 병서가 통행하고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班固의漢書 ˂藝文志˃에는 兵家流에 태공의육도 실려있지 않고, 儒家流에 ‘周史六弢 六篇’이란 목록이 실려있어 주나라 사관이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저작 연도를 주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 혹은 顯王이나 孔子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기원전 676~619년이거나, 공자 생존기로 기원전 551~479, 현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8~321년이니, 이르면 춘추시대 초기, 늦어도 전국시대 후기까지 저작 연도가 내려오게 된다. 한서 ˂예문지˃ 병가류에는 “太公의 병법 237편에 謀가 81편이고, 言이 71편이고, 兵이 85편이다.”라고 하여 ‘周史六弢’와는 별도로 태공의 병법서가 전하는 것처럼 기술하였다.
이후隋書 ˂經籍志˃ 兵家流에 처음으로 ‘太公六韜 五卷 周文王師 姜望 撰’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뒤로 역대 史書의 志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이를 보면육도 강태공의 저서로 보기에는 ˂예문지˃ 기록에서부터 저자와 저작 연대에 대한 모순이 생긴다. 기원전 1100년경에 활약한 강태공이 지었다는 병서가 서명으로 등장한 것이 전국시대 말기이며, 또한 강태공의육도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육도 僞書라는 의심은 내용적인 면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다. 육도 내용과 규모가 광범위하고 역사적 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 내용은 주나라 이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宋나라 王應麟(1223~1296) ˂漢書藝文志考證˃에서육도孫子吳子보다 내용적으로 이후의 저술이라고 보았으며, 胡應麟(1551~1602) 또한육도 태공을 사칭해 위조한 것이 확실하다며 魏晉 시대 이후 고대 병서 남은 것을 정리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淸代의 고증학자인 崔述(1740~1816)考信錄에서육도 秦漢 시대 사람이 고서를 빌려 지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姚際恒(1647~?1715) 위서라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송대 이후 明淸代 고증학자들에 이르기까지육도 후대의 위서라고 판정하였으며, 이러한 견해를 반영한 것이四庫全書總目提要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 의하면, 육도 일단 詞意가 천근하여 古書 같지 않고, ˂龍韜˃ ˂立將˃篇에 보이는 왕이 장수를 임명할 ‘避正殿(正殿을 피함)’한다는 표현은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며, ‘將軍’이란 용어도春秋左氏傳 보이는 주나라 초기에는 이런 명칭조차 없었으니, 강태공의 저작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龍韜˃ ˂陰符˃篇에서 陰符를 군사의 符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편찬자가 음부의 뜻을 잘못 것으로 더더욱 허술함을 드러낸 위서의 증거로 해석하였다. 외에 전국 말기에나 나오는 궁노수, 投機 등의 병기가 언급된 점이나 주나라 때는 전차병 위주였는데 전국시대 이후에야 나오는 步兵, 騎兵에 대한 전술이 언급된 ,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전법인 攻城戰에 대해 논한 등은 본서가 후대의 위서라는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있다.
이처럼 僞書로 취급받던육도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계기는 1972 4 山東省 銀雀山의 竹簡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은작산 묘는 西漢 초기인 기원전 140~118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孫子兵法吳子 다른 병서와 함께육도 14편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죽간의 분량은 4,000 자이고 내용은 ˂文韜˃ ˂文師˃, ˂六守˃, ˂守土˃, ˂守國˃, ˂武韜˃ ˂發啓˃, ˂文啓˃, ˂三疑˃ 등이다. 그렇다면 종전에 魏晉 시대에 위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육도 성립연대는 적어도 전국시대 말기이거나 서한 초기까지 올라갈 있다. 죽간의 발견으로 현대 역사학자들은육도 성립 연대가 魏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라고 班固의 의견이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육도 결코 위작이 아니며 책의 성립 시기가 이르기 때문에 복잡한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바뀐 부분이 많아 초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하는육도 송나라 무경칠서 판본만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銀雀山 漢墓에서 출간된 죽간으로 책의 성립 연대를 증명할 있으며, 일부 유실된 부분이 보충됨으로써육도 원본에 더욱 가까운 내용을 살펴볼 있다.
六韜直解 解題
이외에 1973 河北省 定縣에 소재한 中山懷王 劉修의 묘에서도 1,400 자의 太公 竹簡이 출토되었다. 유수는 한나라 宣帝 五鳳 3(B.C. 55) 졸하였으므로 죽간이 쓰인 연대도 이전일 것이다. 은작산 한묘나 중산회왕의 묘에서육도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육도 한나라 이전이나 한초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있다. 따라서 위진 시대의 위작이란 설은 잘못된 것이다.
육도 文王의 스승인 太公의 병가 사상을 주나라 史官이 기록한 것이며, 이후 전국과 한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부연하여 저술한 것이 수백 편이나 있었다. 이후 한나라 黃石公이 이를 바탕으로 연구해 張良에게 전승된 것이三略이고, 주요 내용만 간추려 편찬해 전승된 것이六韜 60편이라 있다.
六韜直解 편찬한 劉寅은 서문에서, 한나라 成帝 任宏이 兵書를 논하는 중에는육도 포함되지 않았고, 당나라 李靖의 말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면서 “아마도六韜三略 먼저는 본래 太公이 남긴 책이었는데, 周나라 사관과 黃石公이 미루어 부연하여 추가한 것인 듯하다. 謀와 言과 兵은 모두六韜 가운데 있으니,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삭제하고 중요하게 사용할 내용을 취하여 다만 60편을 남겨두었는가 보다. 이제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유인은 본서가 한나라 이전의 책이라는 점에는 의심을 표하였지만, 강태공의 사상을 담은 책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부연되고 산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변개가 있었으리라고 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것이다.


2. 姜太公과六韜 思想
한서 ˂예문지˃ 太公의 병법으로 謀가 81, 言이 71, 兵이 85편으로 모두 237편이 전한다고 하였는데, 이외에도 역대 병서 태공의 저술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많다. 隋書 ˂經籍志˃에도太公六韜 외에太公陰謀, 太公金匱, 太公兵法, 太公三宮兵法 10 종의 병서가 전한다. 많은 병서가 모두 태공의 저작이라기보다는 후대인들이 태공의 이름을 가탁했을 가능성이 많다. 六韜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공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후인들의 添削이 부단히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병가에서는 무엇 때문에 태공을 추숭해왔는지 태공은 어떤 이미지 때문에 병가의 시조가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唐나라 때에 文廟에 孔子를 모시고 武廟에 太公을 모시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인들이 인식하는 태공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드러낸 것이다. 태공의 사적에 대해서는史記 몇몇 野史에 수록된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많지 않으므로사기 후대의 기록, 육도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태공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일단 명칭부터 살펴보자면 太公은 성이 姜이고 이름은 牙이니 姜牙이다. 문왕이 그를 만난 자신의 태공 古公亶父가 항상 바라던 인재라 하여 太公望이라 불러서 이를 줄여 太公, 또는 姜太公이라 불렸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는 軍師로 모셔 師尙父라고 불렀으며, 태공의 조상이 과거에 땅에 봉해졌다는 이유로 呂尙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東海人으로 선조가 四嶽을 맡아 禹임금의 치수를 도왔다고 하므로 상당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태공이 문왕을 만나게 일화를사기에서는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먼저 널리 알려진 대로 渭水 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사냥을 나온 문왕을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마음이 맞아 바로 초빙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하나는 태공이 일찍이 殷나라 紂王을 섬겼는데 그의 무도함을 보고 떠난 제후들을 유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 문왕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문왕이 里에 구금되어 있을 散宜生, 閎夭 등과 모의하여 미녀와 재물을 주왕에게 바치고 구출해왔다는 일화가 있다.
어떤 경유로든 태공은 문왕과 무왕의 군사가 되었으며, 은나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權謀와 奇計를 내었다. 때문에 후세에 兵事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나 주나라의 계책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태공이 모든 모의를 주도했다고 하여 문왕이 천하의 3분의 2 차지하게 것도 태공의 계획 덕분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모의를 통해 적국을 이간하고 적국의 백성을 회유하는 것은 바로六韜 ˂文韜˃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 800 제후들과 盟津에 모여 세력을 확인하였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2 후에 다시 殷나라 정벌에 나선다. 이때에 거북의 점이 불길하고 폭우가 내려 거사를 망설이자 태공이 강권하여 정벌에 나섰고 결국 성공을 거둔다. 이후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箕子를 풀어주어 인심을 무마하는 주나라의 천하로서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도 역시 태공의 도움이 컸다. 태공은 齊나라에 봉해져 자기 나라에 뒤에 지역의 풍속을 따르고 禮를 간략히 하며 商工業을 흥기시키고 魚鹽의 이익으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결국 제후국 중에 강대국이 되었다. 이런 정사는 바로六韜 ˂文師˃편에 나오는 백성과 이익을 함께하면 천하가 귀의해 복종한다는 사상을 실천한 것이라 있다. 이후 제나라에서 일찍부터 管子, 孫武, 司馬穰苴 法家와 兵家의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도 태공의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시기에 무력을 통해 이를 수행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사람이 태공이었으므로, 그는 후세에 武功을 통해 역사를 바꾼 성공 사례로 兵家의 始祖로 여겨졌다. 이러한 성공의 경험은 춘추전국 시대라는 치열하고도 혼란한 국가의 생존경쟁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고, 수많은 전략가들은 저마다 새로운 태공이 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때문에 태공의 사상이 주나라 사관에 의해 기록되고, 이후 병학을 연구하는 자들도 저마다 태공의 이름을 가탁하여 자신의 저작을 첨가하거나 새로이 태공이란 이름으로 저술을 남겼던 것이다. 따라서육도 보이는 사상은 태공 이후 春秋戰國, 秦漢 시기에 무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 있다.


3. 六韜 내용과 구성
육도 기본적으로 병서이기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취하는 법에 대해 논한 것이지만, 육도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후대의 병서와 달리 훨씬 깊이가 있다. 일단육도孫子 義疏라고 불릴 만큼 손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를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기술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예컨대손자에는 “兵이라는 것은 속이는 방도이다.[兵者 詭道也]
라는 대명제를 기술하였을 , 상식과 원칙을 강조하여 실천적인 방책을 구체적으로 논한 부분이 많지 않다. 반면六韜 ˂武韜 文伐˃篇에서는 전투가 아닌 謀略으로 적을 속여 승리를 취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논하면서 美人計, 離間計, 賂物과 買收 각종 속임수를 나열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손자에는 전쟁은 나라의 대사라고 보아 되도록 피해야 일로 보고 있는데, 육도에는 천하의 어지러움과 다툼을 화합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평소 전쟁준비의 바탕이 되는 농업, 상업, 공업 경제활동을 중요시하고 정권의 도덕적 명분과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육도에서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상이 곳곳에 보인다. 특히 ˂文韜 明傳˃篇의 “義가 욕심을 이기면 창성하고 욕심이 義를 이기면 망하며, 恭敬이 怠慢함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을 이기면 멸망한다.
 구절은 태공이 武王에게 올렸다는 ˂丹書˃ 유명한 문장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육도에는 전국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하는 요소들이 많으며, 전국시대에 주로 쓰이던 철제병기와 쇠뇌, 步兵과 騎兵을 중시하였다. ˂五音˃ ˂兵徵˃에서 음양오행설로 적의 정세를 판단하고 공격을 결정하는 다소 현실적이지 못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때문에 위서의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역사적 교훈과 제가의 사상이 융합되었을 아니라, 奇計와 詭謀까지 녹아들어간 것이 오히려육도 가치를 높여준다고 수도 있다. 이하에서 권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육도 구성은 앞에서 말한 대로 6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도직해에는 편의 첫머리에 내용을 요약 정리해두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편명은 대개 편의 주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편중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1 ˂文韜˃에는 ˂文師˃, ˂盈虛˃, ˂國務˃, ˂大禮˃, ˂明傳˃, ˂六守˃, ˂守土˃, ˂守國˃, ˂上賢˃, ˂擧賢˃, ˂賞罰˃, ˂兵道˃ 12편이 실려있다. 文王이 처음에 태공 呂尙을 만나 스승으로 삼게 경위와 이후 문답을 통해 천하를 취하고 다스리는 방략, 민심을 수습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 상벌을 분명히 시행하고, 통일된 지휘권과 체계를 정립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11편까지는 文王과의 문답이고 ˂兵道˃ 武王과의 문답이어서 내용상 부분은 같은 무왕과의 문답인 ˂武韜˃ ˂三疑˃篇에 있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시기였으므로 어떻게 천하를 취할 것인가는 문왕과 무왕의 가장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2 ˂武韜˃ ˂發啓˃, ˂文啓˃, ˂文伐˃, ˂順啓˃, ˂三疑˃ 5편으로, 앞의 4편은 문왕과의 문답이다. ˂무도˃ 전략적 시각에서 修德과 安民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민심을 얻고 기회를 잡아 적을 붕괴시켜서 최소의 대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바로 전쟁의 목표인 것이다. 이를 위해 ˂文伐˃篇과 ˂三疑˃篇에서는 모략을 써서 전쟁하지 않고도 승리하는 12가지 방법과 3가지 계책을 기술하였는데, 뇌물을 아끼지 말고 풀어서 적국의 군신간을 이간하고 미인과 음악으로 지배층의 욕망을 자극하며 적국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회유하는 등이다.
3 ˂龍韜˃ ˂王翼˃, ˂論將˃, ˂選將˃, ˂立將˃, ˂將威˃, ˂勵軍˃, ˂陰符˃, ˂陰書˃, ˂軍勢˃, ˂奇兵˃, ˂五音˃, ˂兵徵˃, ˂農器˃ 13편이다. 이하는 모두 무왕과의 문답이다. 앞부분은 군제의 편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이어서 장수의 선발, 평가, 임명, 권위 부여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법 구체적인 군의 운용방식이 실려있다. ˂陰符˃篇은 군주와 장수가 서로 은밀하게 통신할 쓰는 8종류의 符節을 음부라고 하고 암호문서를 陰書라고 하여 암호문을 만드는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음부는 대개 道家나 신선술과 관련된 符籍 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편은 후대의 찬자가 잘못 찬입한 부분이라는 설도 있다. ˂奇兵˃편은 지세와 상황에 따라 어떤 전술과 어떤 무기를 써야 할지 구체적으로 기술한 편으로 부분은 당시의 작전경험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4 ˂虎韜˃ ˂軍用˃, ˂三陳˃, ˂疾戰˃, ˂必出˃, ˂軍略˃, ˂臨境˃, ˂動靜˃, ˂金鼓˃, ˂絶道˃, ˂略地˃, ˂火戰˃, ˂壘虛˃ 12편이 실려있다. ˂호도˃ 출병할 필요한 군의 병기와 장비, 진법과 작전 요령 등에 관해 언급한 부분인데, 특히 번째 ˂軍用˃篇은 당시 군사기술의 수준을 반영한 편이라 있다. 疾戰과 必出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기 위한 전략이고, 이하는 성을 공격하거나 보루를 구축할 ,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는 경우, 적지에서 교전하는 상황, 보급로의 단절시 대처 요령, 화공을 계획할 다양한 전술이 실려있다.
5 ˂豹韜˃ ˂林戰˃ 비롯하여 ˂突戰˃, ˂敵强˃, ˂敵武˃, ˂烏雲山兵˃, ˂烏雲澤兵˃, ˂少衆˃, ˂分險˃ 8편이 실려있다. ˂표도˃에는 산림수택에서의 작전 원칙과 적의 침입을 당했을 ,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방법 등이 자세히 실려있다. ˂烏雲山兵˃ 위에 진을 쳐야 , ˂烏雲澤兵˃ 늪에서 적과 대치할 자유자재로 변화할 있는 烏雲陣을 이용해 승리하는 비법을 논한 것이다. ˂少衆˃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의 방법이고, ˂分險˃ 험지에서 대적할 경우의 작전을 기술한 것이다.
6 ˂犬韜˃ ˂分合˃, ˂武鋒˃, ˂練士˃, ˂敎戰˃, ˂均兵˃, ˂武車士˃, ˂武騎士˃, ˂戰車˃, ˂戰騎˃, ˂戰步˃ 10편이 실려있다. ˂견도˃ 군의 조직과 훈련방법, 특히 전차병, 기병, 보병의 특징에 따른 편성과 운용방법을 자세히 열거한 편이다. ˂分合˃ ˂武鋒˃ 흩어져있던 진영을 합하고 적의 14가지 변화를 살펴 공격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정예병의 선발을 논한 ˂練士˃에서는 무력이 뛰어난 용사뿐 아니라 복수심이나 부귀공명을 이루기 위해, 신분을 상승하기 위해, 죄를 代贖하기 위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까지 모두 유별로 구분하여 선발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敎戰˃, ˂均兵˃에서는 명령을 이해하고 무기를 다루는 , 전진하고 후퇴하는 제식훈련 등의 훈련방법과 지형에 따라 戰車 1대가 80명의 步兵을 상대하고 騎兵 1기가 8명의 步兵을 상대할 있다고 전력을 비교하며 구체적인 부대조직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육도에는 용병의 철학뿐 아니라 직면한 상황에 따라 당장에 응용할 있는 전략과 전술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 장수들의 필수 교과서로 중시되었다. 육도 僞書라고 평가했던 丘濬도大學衍義補에서 ˂龍韜˃ 이하 43편은 여러 상황에 조리있게 계획하고 방어를 미리 설비하는 내용이니, 모두 병사를 다스리는 자가 강습해야 것이다. 孫子 의론은 매우 수준이 높아서 헤아릴 없으나, 43편은 매우 자세하고 시행 사항이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손자 義疏와 같다.
라고 하여육도 실용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4. 우리나라의六韜直解 번역서
우리나라에六韜三略 언제 수입되었는지는 없으나 문헌을 통해 보면 고려 초부터 兵書의 대명사로 쓰였다. 고려 王融이 지은 金傅에게 내리는 교서에육도삼략 흉중에 품고 있다는 표현을 썼으며,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는 ˂龍韜˃ 계책을 익혔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육도삼략 무경칠서의 하나로 존중하여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삼아서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여러 차례 무경칠서의 하나로 간행되었으며, 무학을 익히는 무인뿐 아니라 문인도 文武의 견식을 겸비한다는 입장에서孫子 함께 널리 읽어왔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육도 太公의 실제 저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洪奭周는淵泉集 ˂諸子精言跋˃에서 육도삼략 모두 한나라 이후의 책이다. 그러나육도 글은 지루하고삼략 글은 간략하며, 육도 병사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많고삼략 치국에 대해 논한 것이 많으며, 육도 권모술수를 숭상하였으나삼략 오히려 정도에 가깝다.
라고 하여육도보다삼략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한나라 이후의 위서라고 보는 시각은 명청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따른 것이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시대에육도 무경칠서의 하나로 유통되었을 손자와는 달리 별다른 주석이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대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明代 이후에 나온紀效新書 같은 병서의 연구와 간행에 힘쓰고 무인들에게도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새로운 병서를 익힐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전쟁의 양상과 군력, 군비가 달라지면서 그에 걸맞는 전략 전술이 개발되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현상이라 있다.
孫子 武經의 상징으로 계속 주목받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전에 응용할 있다는 강점을 가졌던육도 실전의 상황이 바뀌자 고대의 군사 자료로서만 가치를 갖게 것이다. 다만 중국 고전의 하나로서 번역은 일찍부터 이루어져서 10 종의 번역서가 있는데, 원문 위주로만 번역되었고 武經七書直解를 대본으로 하여 주석까지 모두 번역한 것은 번역서가 최초이다. 번역서에서는 직해를 완역했을 아니라 직해에서 거론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도 모두 자세한 주해를 붙이고 편의 머리에 해당 편의 대의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따라서 무경의 고전으로서六韜 본문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명대의 학자가 본서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점도 흥미 있게 살펴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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