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금요일

≪六韜直解≫ 解題




六韜 周나라 文王武王과 太公望이 兵事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기술된 6권의 兵書이다. 흔히 ‘六韜三略’, ‘韜略’이라 하여三略 함께 병칭되어 병서나 병법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六韜 韜는 ‘숨기다, 감추다’의 뜻으로 활집을 뜻하는 弢자와 같은 의미이니, 삼략 略과 같이 병법 책략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 전하는육도 구성은 ˂文韜˃, ˂武韜˃, ˂龍韜˃, ˂虎韜˃, ˂豹韜˃, ˂犬韜˃ 6 6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량은 16,800 자로 다른 병서와 비교해볼 많은 분량이다.
육도 저자는 周나라 太公望 呂尙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저자만으로 武經七書 가장 오래된 셈이다. 그러나육도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의 여타 古書들처럼 논란이 있어왔다. 육도 兵學의 始祖라 있는 太公의 사상을 바탕으로 戰國時代와 漢나라를 거치면서 당시 병법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보태지기도 하고 산삭되기도 하여 현재와 같은 60편으로 정리되었다. 儒家, 法家, 道家 諸家 사상을 아우른 통치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孫子 달리육도 攻守와 防禦, 用兵에서 실전적으로 도움이 기술을 자세히 거론하여 장수가 익혀야 필수과목으로 가치를 인정받아왔으므로 위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경칠서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1. 六韜 전래와 僞書 논란
육도 서명이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莊子 ˂徐無鬼˃편이다. 徐無鬼가 제왕을 설득하는 논리를 , , , 樂과 함께 ‘金版 六弢’란 책을 언급하였는데, 經典釋文에는 여기의六弢 바로 太公의六韜 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이미육도라는 이름의 병서가 통행하고 있었다고 있다. 그런데 班固의漢書 ˂藝文志˃에는 兵家流에 태공의육도 실려있지 않고, 儒家流에 ‘周史六弢 六篇’이란 목록이 실려있어 주나라 사관이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저작 연도를 주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 혹은 顯王이나 孔子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기원전 676~619년이거나, 공자 생존기로 기원전 551~479, 현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8~321년이니, 이르면 춘추시대 초기, 늦어도 전국시대 후기까지 저작 연도가 내려오게 된다. 한서 ˂예문지˃ 병가류에는 “太公의 병법 237편에 謀가 81편이고, 言이 71편이고, 兵이 85편이다.”라고 하여 ‘周史六弢’와는 별도로 태공의 병법서가 전하는 것처럼 기술하였다.
이후隋書 ˂經籍志˃ 兵家流에 처음으로 ‘太公六韜 五卷 周文王師 姜望 撰’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뒤로 역대 史書의 志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이를 보면육도 강태공의 저서로 보기에는 ˂예문지˃ 기록에서부터 저자와 저작 연대에 대한 모순이 생긴다. 기원전 1100년경에 활약한 강태공이 지었다는 병서가 서명으로 등장한 것이 전국시대 말기이며, 또한 강태공의육도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육도 僞書라는 의심은 내용적인 면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다. 육도 내용과 규모가 광범위하고 역사적 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 내용은 주나라 이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宋나라 王應麟(1223~1296) ˂漢書藝文志考證˃에서육도孫子吳子보다 내용적으로 이후의 저술이라고 보았으며, 胡應麟(1551~1602) 또한육도 태공을 사칭해 위조한 것이 확실하다며 魏晉 시대 이후 고대 병서 남은 것을 정리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淸代의 고증학자인 崔述(1740~1816)考信錄에서육도 秦漢 시대 사람이 고서를 빌려 지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姚際恒(1647~?1715) 위서라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송대 이후 明淸代 고증학자들에 이르기까지육도 후대의 위서라고 판정하였으며, 이러한 견해를 반영한 것이四庫全書總目提要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 의하면, 육도 일단 詞意가 천근하여 古書 같지 않고, ˂龍韜˃ ˂立將˃篇에 보이는 왕이 장수를 임명할 ‘避正殿(正殿을 피함)’한다는 표현은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며, ‘將軍’이란 용어도春秋左氏傳 보이는 주나라 초기에는 이런 명칭조차 없었으니, 강태공의 저작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龍韜˃ ˂陰符˃篇에서 陰符를 군사의 符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편찬자가 음부의 뜻을 잘못 것으로 더더욱 허술함을 드러낸 위서의 증거로 해석하였다. 외에 전국 말기에나 나오는 궁노수, 投機 등의 병기가 언급된 점이나 주나라 때는 전차병 위주였는데 전국시대 이후에야 나오는 步兵, 騎兵에 대한 전술이 언급된 ,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전법인 攻城戰에 대해 논한 등은 본서가 후대의 위서라는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있다.
이처럼 僞書로 취급받던육도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계기는 1972 4 山東省 銀雀山의 竹簡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은작산 묘는 西漢 초기인 기원전 140~118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孫子兵法吳子 다른 병서와 함께육도 14편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죽간의 분량은 4,000 자이고 내용은 ˂文韜˃ ˂文師˃, ˂六守˃, ˂守土˃, ˂守國˃, ˂武韜˃ ˂發啓˃, ˂文啓˃, ˂三疑˃ 등이다. 그렇다면 종전에 魏晉 시대에 위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육도 성립연대는 적어도 전국시대 말기이거나 서한 초기까지 올라갈 있다. 죽간의 발견으로 현대 역사학자들은육도 성립 연대가 魏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라고 班固의 의견이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육도 결코 위작이 아니며 책의 성립 시기가 이르기 때문에 복잡한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바뀐 부분이 많아 초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하는육도 송나라 무경칠서 판본만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銀雀山 漢墓에서 출간된 죽간으로 책의 성립 연대를 증명할 있으며, 일부 유실된 부분이 보충됨으로써육도 원본에 더욱 가까운 내용을 살펴볼 있다.
六韜直解 解題
이외에 1973 河北省 定縣에 소재한 中山懷王 劉修의 묘에서도 1,400 자의 太公 竹簡이 출토되었다. 유수는 한나라 宣帝 五鳳 3(B.C. 55) 졸하였으므로 죽간이 쓰인 연대도 이전일 것이다. 은작산 한묘나 중산회왕의 묘에서육도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육도 한나라 이전이나 한초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있다. 따라서 위진 시대의 위작이란 설은 잘못된 것이다.
육도 文王의 스승인 太公의 병가 사상을 주나라 史官이 기록한 것이며, 이후 전국과 한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부연하여 저술한 것이 수백 편이나 있었다. 이후 한나라 黃石公이 이를 바탕으로 연구해 張良에게 전승된 것이三略이고, 주요 내용만 간추려 편찬해 전승된 것이六韜 60편이라 있다.
六韜直解 편찬한 劉寅은 서문에서, 한나라 成帝 任宏이 兵書를 논하는 중에는육도 포함되지 않았고, 당나라 李靖의 말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면서 “아마도六韜三略 먼저는 본래 太公이 남긴 책이었는데, 周나라 사관과 黃石公이 미루어 부연하여 추가한 것인 듯하다. 謀와 言과 兵은 모두六韜 가운데 있으니,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삭제하고 중요하게 사용할 내용을 취하여 다만 60편을 남겨두었는가 보다. 이제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유인은 본서가 한나라 이전의 책이라는 점에는 의심을 표하였지만, 강태공의 사상을 담은 책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부연되고 산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변개가 있었으리라고 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것이다.


2. 姜太公과六韜 思想
한서 ˂예문지˃ 太公의 병법으로 謀가 81, 言이 71, 兵이 85편으로 모두 237편이 전한다고 하였는데, 이외에도 역대 병서 태공의 저술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많다. 隋書 ˂經籍志˃에도太公六韜 외에太公陰謀, 太公金匱, 太公兵法, 太公三宮兵法 10 종의 병서가 전한다. 많은 병서가 모두 태공의 저작이라기보다는 후대인들이 태공의 이름을 가탁했을 가능성이 많다. 六韜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공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후인들의 添削이 부단히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병가에서는 무엇 때문에 태공을 추숭해왔는지 태공은 어떤 이미지 때문에 병가의 시조가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唐나라 때에 文廟에 孔子를 모시고 武廟에 太公을 모시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인들이 인식하는 태공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드러낸 것이다. 태공의 사적에 대해서는史記 몇몇 野史에 수록된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많지 않으므로사기 후대의 기록, 육도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태공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일단 명칭부터 살펴보자면 太公은 성이 姜이고 이름은 牙이니 姜牙이다. 문왕이 그를 만난 자신의 태공 古公亶父가 항상 바라던 인재라 하여 太公望이라 불러서 이를 줄여 太公, 또는 姜太公이라 불렸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는 軍師로 모셔 師尙父라고 불렀으며, 태공의 조상이 과거에 땅에 봉해졌다는 이유로 呂尙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東海人으로 선조가 四嶽을 맡아 禹임금의 치수를 도왔다고 하므로 상당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태공이 문왕을 만나게 일화를사기에서는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먼저 널리 알려진 대로 渭水 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사냥을 나온 문왕을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마음이 맞아 바로 초빙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하나는 태공이 일찍이 殷나라 紂王을 섬겼는데 그의 무도함을 보고 떠난 제후들을 유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 문왕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문왕이 里에 구금되어 있을 散宜生, 閎夭 등과 모의하여 미녀와 재물을 주왕에게 바치고 구출해왔다는 일화가 있다.
어떤 경유로든 태공은 문왕과 무왕의 군사가 되었으며, 은나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權謀와 奇計를 내었다. 때문에 후세에 兵事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나 주나라의 계책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태공이 모든 모의를 주도했다고 하여 문왕이 천하의 3분의 2 차지하게 것도 태공의 계획 덕분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모의를 통해 적국을 이간하고 적국의 백성을 회유하는 것은 바로六韜 ˂文韜˃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 800 제후들과 盟津에 모여 세력을 확인하였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2 후에 다시 殷나라 정벌에 나선다. 이때에 거북의 점이 불길하고 폭우가 내려 거사를 망설이자 태공이 강권하여 정벌에 나섰고 결국 성공을 거둔다. 이후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箕子를 풀어주어 인심을 무마하는 주나라의 천하로서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도 역시 태공의 도움이 컸다. 태공은 齊나라에 봉해져 자기 나라에 뒤에 지역의 풍속을 따르고 禮를 간략히 하며 商工業을 흥기시키고 魚鹽의 이익으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결국 제후국 중에 강대국이 되었다. 이런 정사는 바로六韜 ˂文師˃편에 나오는 백성과 이익을 함께하면 천하가 귀의해 복종한다는 사상을 실천한 것이라 있다. 이후 제나라에서 일찍부터 管子, 孫武, 司馬穰苴 法家와 兵家의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도 태공의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시기에 무력을 통해 이를 수행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사람이 태공이었으므로, 그는 후세에 武功을 통해 역사를 바꾼 성공 사례로 兵家의 始祖로 여겨졌다. 이러한 성공의 경험은 춘추전국 시대라는 치열하고도 혼란한 국가의 생존경쟁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고, 수많은 전략가들은 저마다 새로운 태공이 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때문에 태공의 사상이 주나라 사관에 의해 기록되고, 이후 병학을 연구하는 자들도 저마다 태공의 이름을 가탁하여 자신의 저작을 첨가하거나 새로이 태공이란 이름으로 저술을 남겼던 것이다. 따라서육도 보이는 사상은 태공 이후 春秋戰國, 秦漢 시기에 무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 있다.


3. 六韜 내용과 구성
육도 기본적으로 병서이기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취하는 법에 대해 논한 것이지만, 육도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후대의 병서와 달리 훨씬 깊이가 있다. 일단육도孫子 義疏라고 불릴 만큼 손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를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기술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예컨대손자에는 “兵이라는 것은 속이는 방도이다.[兵者 詭道也]
라는 대명제를 기술하였을 , 상식과 원칙을 강조하여 실천적인 방책을 구체적으로 논한 부분이 많지 않다. 반면六韜 ˂武韜 文伐˃篇에서는 전투가 아닌 謀略으로 적을 속여 승리를 취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논하면서 美人計, 離間計, 賂物과 買收 각종 속임수를 나열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손자에는 전쟁은 나라의 대사라고 보아 되도록 피해야 일로 보고 있는데, 육도에는 천하의 어지러움과 다툼을 화합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평소 전쟁준비의 바탕이 되는 농업, 상업, 공업 경제활동을 중요시하고 정권의 도덕적 명분과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육도에서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상이 곳곳에 보인다. 특히 ˂文韜 明傳˃篇의 “義가 욕심을 이기면 창성하고 욕심이 義를 이기면 망하며, 恭敬이 怠慢함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을 이기면 멸망한다.
 구절은 태공이 武王에게 올렸다는 ˂丹書˃ 유명한 문장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육도에는 전국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하는 요소들이 많으며, 전국시대에 주로 쓰이던 철제병기와 쇠뇌, 步兵과 騎兵을 중시하였다. ˂五音˃ ˂兵徵˃에서 음양오행설로 적의 정세를 판단하고 공격을 결정하는 다소 현실적이지 못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때문에 위서의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역사적 교훈과 제가의 사상이 융합되었을 아니라, 奇計와 詭謀까지 녹아들어간 것이 오히려육도 가치를 높여준다고 수도 있다. 이하에서 권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육도 구성은 앞에서 말한 대로 6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도직해에는 편의 첫머리에 내용을 요약 정리해두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편명은 대개 편의 주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편중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1 ˂文韜˃에는 ˂文師˃, ˂盈虛˃, ˂國務˃, ˂大禮˃, ˂明傳˃, ˂六守˃, ˂守土˃, ˂守國˃, ˂上賢˃, ˂擧賢˃, ˂賞罰˃, ˂兵道˃ 12편이 실려있다. 文王이 처음에 태공 呂尙을 만나 스승으로 삼게 경위와 이후 문답을 통해 천하를 취하고 다스리는 방략, 민심을 수습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 상벌을 분명히 시행하고, 통일된 지휘권과 체계를 정립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11편까지는 文王과의 문답이고 ˂兵道˃ 武王과의 문답이어서 내용상 부분은 같은 무왕과의 문답인 ˂武韜˃ ˂三疑˃篇에 있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시기였으므로 어떻게 천하를 취할 것인가는 문왕과 무왕의 가장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2 ˂武韜˃ ˂發啓˃, ˂文啓˃, ˂文伐˃, ˂順啓˃, ˂三疑˃ 5편으로, 앞의 4편은 문왕과의 문답이다. ˂무도˃ 전략적 시각에서 修德과 安民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민심을 얻고 기회를 잡아 적을 붕괴시켜서 최소의 대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바로 전쟁의 목표인 것이다. 이를 위해 ˂文伐˃篇과 ˂三疑˃篇에서는 모략을 써서 전쟁하지 않고도 승리하는 12가지 방법과 3가지 계책을 기술하였는데, 뇌물을 아끼지 말고 풀어서 적국의 군신간을 이간하고 미인과 음악으로 지배층의 욕망을 자극하며 적국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회유하는 등이다.
3 ˂龍韜˃ ˂王翼˃, ˂論將˃, ˂選將˃, ˂立將˃, ˂將威˃, ˂勵軍˃, ˂陰符˃, ˂陰書˃, ˂軍勢˃, ˂奇兵˃, ˂五音˃, ˂兵徵˃, ˂農器˃ 13편이다. 이하는 모두 무왕과의 문답이다. 앞부분은 군제의 편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이어서 장수의 선발, 평가, 임명, 권위 부여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법 구체적인 군의 운용방식이 실려있다. ˂陰符˃篇은 군주와 장수가 서로 은밀하게 통신할 쓰는 8종류의 符節을 음부라고 하고 암호문서를 陰書라고 하여 암호문을 만드는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음부는 대개 道家나 신선술과 관련된 符籍 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편은 후대의 찬자가 잘못 찬입한 부분이라는 설도 있다. ˂奇兵˃편은 지세와 상황에 따라 어떤 전술과 어떤 무기를 써야 할지 구체적으로 기술한 편으로 부분은 당시의 작전경험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4 ˂虎韜˃ ˂軍用˃, ˂三陳˃, ˂疾戰˃, ˂必出˃, ˂軍略˃, ˂臨境˃, ˂動靜˃, ˂金鼓˃, ˂絶道˃, ˂略地˃, ˂火戰˃, ˂壘虛˃ 12편이 실려있다. ˂호도˃ 출병할 필요한 군의 병기와 장비, 진법과 작전 요령 등에 관해 언급한 부분인데, 특히 번째 ˂軍用˃篇은 당시 군사기술의 수준을 반영한 편이라 있다. 疾戰과 必出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기 위한 전략이고, 이하는 성을 공격하거나 보루를 구축할 ,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는 경우, 적지에서 교전하는 상황, 보급로의 단절시 대처 요령, 화공을 계획할 다양한 전술이 실려있다.
5 ˂豹韜˃ ˂林戰˃ 비롯하여 ˂突戰˃, ˂敵强˃, ˂敵武˃, ˂烏雲山兵˃, ˂烏雲澤兵˃, ˂少衆˃, ˂分險˃ 8편이 실려있다. ˂표도˃에는 산림수택에서의 작전 원칙과 적의 침입을 당했을 ,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방법 등이 자세히 실려있다. ˂烏雲山兵˃ 위에 진을 쳐야 , ˂烏雲澤兵˃ 늪에서 적과 대치할 자유자재로 변화할 있는 烏雲陣을 이용해 승리하는 비법을 논한 것이다. ˂少衆˃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의 방법이고, ˂分險˃ 험지에서 대적할 경우의 작전을 기술한 것이다.
6 ˂犬韜˃ ˂分合˃, ˂武鋒˃, ˂練士˃, ˂敎戰˃, ˂均兵˃, ˂武車士˃, ˂武騎士˃, ˂戰車˃, ˂戰騎˃, ˂戰步˃ 10편이 실려있다. ˂견도˃ 군의 조직과 훈련방법, 특히 전차병, 기병, 보병의 특징에 따른 편성과 운용방법을 자세히 열거한 편이다. ˂分合˃ ˂武鋒˃ 흩어져있던 진영을 합하고 적의 14가지 변화를 살펴 공격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정예병의 선발을 논한 ˂練士˃에서는 무력이 뛰어난 용사뿐 아니라 복수심이나 부귀공명을 이루기 위해, 신분을 상승하기 위해, 죄를 代贖하기 위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까지 모두 유별로 구분하여 선발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敎戰˃, ˂均兵˃에서는 명령을 이해하고 무기를 다루는 , 전진하고 후퇴하는 제식훈련 등의 훈련방법과 지형에 따라 戰車 1대가 80명의 步兵을 상대하고 騎兵 1기가 8명의 步兵을 상대할 있다고 전력을 비교하며 구체적인 부대조직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육도에는 용병의 철학뿐 아니라 직면한 상황에 따라 당장에 응용할 있는 전략과 전술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 장수들의 필수 교과서로 중시되었다. 육도 僞書라고 평가했던 丘濬도大學衍義補에서 ˂龍韜˃ 이하 43편은 여러 상황에 조리있게 계획하고 방어를 미리 설비하는 내용이니, 모두 병사를 다스리는 자가 강습해야 것이다. 孫子 의론은 매우 수준이 높아서 헤아릴 없으나, 43편은 매우 자세하고 시행 사항이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손자 義疏와 같다.
라고 하여육도 실용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4. 우리나라의六韜直解 번역서
우리나라에六韜三略 언제 수입되었는지는 없으나 문헌을 통해 보면 고려 초부터 兵書의 대명사로 쓰였다. 고려 王融이 지은 金傅에게 내리는 교서에육도삼략 흉중에 품고 있다는 표현을 썼으며,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는 ˂龍韜˃ 계책을 익혔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육도삼략 무경칠서의 하나로 존중하여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삼아서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여러 차례 무경칠서의 하나로 간행되었으며, 무학을 익히는 무인뿐 아니라 문인도 文武의 견식을 겸비한다는 입장에서孫子 함께 널리 읽어왔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육도 太公의 실제 저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洪奭周는淵泉集 ˂諸子精言跋˃에서 육도삼략 모두 한나라 이후의 책이다. 그러나육도 글은 지루하고삼략 글은 간략하며, 육도 병사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많고삼략 치국에 대해 논한 것이 많으며, 육도 권모술수를 숭상하였으나삼략 오히려 정도에 가깝다.
라고 하여육도보다삼략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한나라 이후의 위서라고 보는 시각은 명청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따른 것이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시대에육도 무경칠서의 하나로 유통되었을 손자와는 달리 별다른 주석이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대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明代 이후에 나온紀效新書 같은 병서의 연구와 간행에 힘쓰고 무인들에게도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새로운 병서를 익힐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전쟁의 양상과 군력, 군비가 달라지면서 그에 걸맞는 전략 전술이 개발되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현상이라 있다.
孫子 武經의 상징으로 계속 주목받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전에 응용할 있다는 강점을 가졌던육도 실전의 상황이 바뀌자 고대의 군사 자료로서만 가치를 갖게 것이다. 다만 중국 고전의 하나로서 번역은 일찍부터 이루어져서 10 종의 번역서가 있는데, 원문 위주로만 번역되었고 武經七書直解를 대본으로 하여 주석까지 모두 번역한 것은 번역서가 최초이다. 번역서에서는 직해를 완역했을 아니라 직해에서 거론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도 모두 자세한 주해를 붙이고 편의 머리에 해당 편의 대의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따라서 무경의 고전으로서六韜 본문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명대의 학자가 본서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점도 흥미 있게 살펴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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