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9일 금요일

淮南子


淮南子摘錄

俶眞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逸我以老, 休我以死. 善我生者, 乃所以善我死也.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人謂之固矣. 雖然, 夜半有力者, 負而趨, 寐者不知, 猶有所遁. 若藏天下於天下, 則無所遁其形矣.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두다.

志與心變, 神與形化. 
마음과 형체의 상호연관성

夫水嚮冬, 則凝而爲氷; 氷迎春, 則泮而爲水. 氷水移易于前後, 若周員而趨, 孰暇知其所苦樂乎!
사물의 회전과 변환

夫聖人用心, 杖形依神, 相扶而得終始. 是故其寐不夢, 其覺不憂.

夫貴賤之於身也, 猶條風之時麗也; 毁譽之於己, 猶蚊虻之一過也.

是故事其神者, 神去之; 休其神者, 神居之.

道出一原, 通九門, 散六衢, 設於無垓坫之宇, 寂漠以虛無, 非有爲於物也, 物以有爲於己也. 

是故自其異者視之, 肝膽胡越; 自其同者視之, 萬物一圈也.

及世之衰也, 至伏羲氏, 其道昧昧芒芒, 然吟德懷和, 被施頗烈, 而知乃始昧昧晽晽, 皆欲離其童蒙之心, 而覺視於天地之間. 是故其德煩而不能一. 乃至神農黃帝, 剖判大宗, 竅領天地, 襲九窾, 重九『, 提挈陰陽, 嫥梡剛柔, 枝解葉貫, 萬物百族, 使各有經紀條貫. 於此萬民睢睢盱盱然, 莫不竦身而載聽視. 是故治而不能和. 下棲遲至于昆吾夏后之世, 嗜欲連於物, 聰明誘於外, 而性命失其得.인식 문제의 전환과 세태의 양상

是故聖人之學也, 欲以返性於初, 而游心於虛也. 達人之學也, 欲以通性於遼廓, 而覺於寂漠也. 

是故與其有天下也, 不若有說也; 與其有說也, 不若尙羊物之終始 而條達有無之際
천하를 가지는 것보다, 기뻐하는 마음이 낫고, 기뻐하는 마음보단 사물의 시종을 배회하며 유무의 경계에 이르는 것이 낫다.

雖有炎火洪水彌靡於天下, 神無虧缺於胸臆之中矣. 若然者, 視天下之間, 猶飛羽浮芥也. 孰肯分分然, 以物爲事也!
비록 홍수와 불꽃이 세상에 가득하더라고 정신은 그 가슴 속에서 흠결을 입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천하를 봄이 나는 깃털이나 떠 있는 초개 정도로 볼 것이니 어찌 분분히 사물로 일을 삼을것인가.

夫生生者不死, 而化物者不化.

體道者, 不專在于我, 亦有繫于世矣.

 故世治則愚者不得獨亂, 世亂則智者不能獨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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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의 죽계지

《죽계지(竹溪志)》 해제(解題)
안정(安柾) 嶺南文獻硏究所

Ⅰ. 편찬 개요

1. 편찬자

편찬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다. 그의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ㆍ무릉도인(武陵道人)ㆍ손옹(巽翁),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495년(연산군1) 10월 25일 합천군(陜川郡) 천곡리(泉谷里)에서 태어나 진사 강신효(姜藎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12년(중종7) 18세에 향시에서 장원하였고, 1522년(중종17)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1524년(중종19) 정자(正字)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ㆍ춘추관 기사관ㆍ홍문관 정자ㆍ경연전경(經筵典經)ㆍ박사(博士)ㆍ부수찬ㆍ수찬ㆍ공조 좌랑ㆍ병조 좌랑ㆍ강원도 도사 등을 지내고, 1530년(중종25) 36세에 사간원 헌납ㆍ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537년(중종32)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고, 1540년(중종35)에《이훈록(彜訓錄)》과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을 찬하였다. 1541년(중종36) 47세로 공조정랑ㆍ승문원 교리ㆍ예빈시 첨정을 지내고 7월에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어 이듬해인 1542년(중종37)에 순흥 죽계(竹溪) 가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안향(安珦)을 제향하였다. 1545년(인종1) 11월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1546년(명종1) 군자감정ㆍ춘추관 편수관으로서 《중종ㆍ인종실록》을 편수하였다. 이어서 홍문관 응교ㆍ홍문관 부제학ㆍ승정원 동부승지ㆍ좌부승지ㆍ좌승지가 되었다. 1549년(명종4) 55세로 도승지ㆍ호조참판ㆍ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海州) 향교 서쪽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건하여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1550년(명종5)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8) 59세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54년(명종9) 병으로 사직하고, 7월 2일 졸하였다. 1591년(선조24) 동림서원(桐林書院)에, 1633년(인조11) 11월 소수서원과 해주의 양근서원(楊根書院)에 배향되었다. 1660년(현종1) 사림이 남고(南皐)에 서원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고, 1676년(숙종2) 덕연서원(德淵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677년(숙종3)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18년(순조18) ‘문민(文敏 勤學好問曰文 應事有功曰敏)’ 시호가 내렸다. <年譜>에 의거함

2. 편찬 배경

《죽계지》 편찬 이유와 과정은 편찬자 주세붕이 직접 쓴 <竹溪志序>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36) 47세의 나이로 예빈시 첨정을 지내고 7월 4일 풍기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1542년(중종37) 8월 15일 문성공묘 기공식을 하고 1543년(중종38) 8월 11일 문성공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이어서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이때 진사(進士) 황빈(黃彬)이 출연한 쌀 45석으로 기금을 세우고 논 1결 94부 3속과 밭 72부 4속의 학전을 마련하였으며, 터를 다지다가 획득한 놋쇠를 팔아 사서삼경(四書三經)ㆍ《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대전》ㆍ《대학연의》ㆍ《통감강목》 등 500책의 서적을 수장하였다. 그리고 1544년(중종39) 9월 7일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과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배향하였고, 10월에 《죽계지》 서문을 집필하였다. 우리나라 초유의 서원 설립이 거의 군수 1인의 의지와 계획에 의하여 3년에 걸쳐 완성된 셈이다. 그 중에 진사 황빈(黃彬)의 기금 출연, 안향의 후손인 매담(梅潭) 안공신(安公信)과 안축의 후손인 안배곤(安配坤)과 지역 선비들의 직간접적인 협조가 없지는 않았다.
당시에 기근 등으로 지역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였고, 초유의 서원 설립에 대하여 일반의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주세붕이 서문에서 문답 형식으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 : 문성공은 이미 국학(國學)에 종사(從祀)되어 고을마다 사당이 있는데 왜 따로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가? 흉년이니 때가 맞지 않고 주관자의 지위가 낮으니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답 :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에 따라 하고서, 무궁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 : 주자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할 때 조정에 아뢰고 하였는데, 왜 임의대로 하는가?
답 : 백록동서원은 선대 제왕의 명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뢴 것이나, 기타 서원은 아뢴 일이 없었다.
문 : 문성공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한 것 등은 인정되지만 학문은 어떤가?
답 : 공의 학문이 비록 주자에 미치지는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서원 앞 죽계 가의 바위에 「敬」자를 새기려고 하였을 때 비난 여론이 있을 때 주자의 편지를 근거로 제시하고 새긴 경위를 밝혔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론의 비판을 받으며 초유의 서원을 창설한 주세붕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실과 이념을 담은 서적 편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아울러 비난 여론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피력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하여도 서문에서 간접적으로 밝혔다.
“드디어 《죽계지(竹溪志)》 몇 편을 편찬하면서 국사에 실린 행록(行錄)을 책머리에 엮었고, 기타 <존현록(尊賢錄)>ㆍ<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잡록(雜錄)> 등은 반드시 주자가 지은 것을 편 머리에 드러내어 주자를 경모한 공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모두가 중니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두 정자의 학문의 요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 후세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는 그 의리(義理)ㆍ내외(內外)ㆍ정조(精粗)ㆍ본말(本末)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참으로 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먼저 공의 본전을 읽으면서 공이 주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마음이고 주자가 공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어떤 도였는가를 반드시 찾아서, 공이 주자를 존경했던 도리로 공을 존경하여 천만 번 마음을 씻은 뒤에 주자의 모든 저서를 숙독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가 반드시 눈앞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竹溪志 序》

3. 편간에 대한 논란

《죽계지》편간에 대하여는 당시에 체제ㆍ내용 등에 대하여 상당한 이견과 비판이 있었다. 이는 주로 퇴계 이황의 지적에 의하여 널리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황이 그 제자 박택지(朴澤之 박운(朴雲))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년에 상산(商山) 주경유(周景遊)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죽계지》를 편찬하였는데, 끝내고 나서 곧바로 간행하였다. 내가 사우 몇 명과 함께 그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하고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경유가 자신의 뜻이 옳다고 여기고 들어주지 않았다. 대개 시비의 공평함은 사람이 누구나 공감하는 법인데 어찌 자신의 사견만 옳게 여기고 거부할 수 있는가.”
하였다. 또 《영봉지(迎鳳志)》 편찬과 관련하여 1560년(명종15)에 노경린(盧慶麟)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영봉지(迎鳳志)는 중거(仲擧)가 보내주어 이미 보았다. 다만 내가 항상 《죽계지》가 잡박한 것을 면치 못한 것에 대하여 문제점으로 여겼으니, 그 편찬 취지는 취하되 실제 행한 것은 본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가 초록한 위학(爲學)ㆍ입교(立敎) 대다수는 혼란하고 두서가 없다.”
하였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장편의 편지를 보내어 구체적으로 이견을 제시하였다. 황준량은 주세붕보다 22세 연하였고, 죽계지 편찬 수년 뒤인 1547년(명종2)에는 관찰사 안현(安玹)과 더불어 소수서원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제정하였으며 풍기에 거주하면서 지역의 중추 인물로서 퇴계 이황과 교유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의견은 대체로 퇴계의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편지 내용이 전반적으로 매우 정중하면서도 《죽계지》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지적하여 논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지난번에 《죽계지(竹溪志)》 편목을 보았는데, <행록(行錄)>은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이고 여타 편(篇)은 주자의 글로서 역시 모두 볼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선생의 근면한 마음과 어진 이를 높이는 지성이 어쩌면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만 편차(編次) 사이에 약간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어찌 선생께서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암을 통하여 회헌을 탐구하여 회헌의 학문이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입니다. 여러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회암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놓고 아울러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의 글을 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회헌의 마음을 탐구해 보려는 자는 마땅히 별도로 회암의 글을 취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전승(傳承)의 계통이 있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꼭 《죽계지》에다 회암의 글을 넣어 억지로 일관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죽계지》에서는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事蹟)을 주로 넣고, <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가곡(歌曲)ㆍ속상기(俗尙記) 같은 것과 서원(書院) 에 관련된 기사는 잡록(雜錄)으로 정리하여 그 뒤에 붙이고, 다시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곧고 조리가 분명할 것입니다. 책이 무리하게 합편(合編)되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 도(道)가 폐단 없이 전승되어, 전술(傳述)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도(道)에 거의 가깝게 되리라 여깁니다.
만약 “옛것에서 증빙하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하여, 반드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려 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이 할 것은 단지 옛사람에게서 법을 취할 뿐이며 옳고 그름의 분별은 자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주리곡(珠履曲)>ㆍ<고양곡(高陽曲)>은 한 때 희학(戲謔)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세에 영송(詠誦) 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는 선생께서 이미 평(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현(聖賢)의 격언을 번안(飜案)하여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유유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가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이 있으며, 호연(浩然)히 천리가 유행하는 묘미가 있으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옛것을 번안했다 하나 자신이 지은 사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역시 이 《죽계지》에 함께 편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계곡(竹溪曲)>을 삭제하여, 별록(別錄) 및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대저 자신에게 조금의 착오도 없으면 한때의 비난이 있더라도 마침내 후세에 그 시비가 정(定)해지겠지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함이 있으면 비난의 구실이 되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傳)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道)가 밝아질 수 없으니, 군자가 가르침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일에서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않겠습니까.
아, 죽계의 사당은 오랫동안 가려졌던 회헌 선생의 도(道)를 빛내기에 충분한 것이고, 또한 선생의 뜻이 회암의 도(道)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의 도가 이를 통하여 더욱 밝아지고 또한 후세에 끝없이 성인이 나올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지》는 모두 온당하게 편집되지만은 않은 듯하며, 이것이 제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서 보면 소견이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외부의 논란이 있더라도 기필코 선입견으로 주장하고 허심탄회하게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고명하신 선생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생께서 홀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저 같은 아랫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점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울리면서도 뇌동하지 않는 것[和而不同]은 군자의 논의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을 털어 아뢰었으니 재단(裁斷)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가를 보아 계당(溪堂)에서 뵙고 다시 질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서 卷1 行錄後, 附黃學正俊良書》
하였다.
퇴계와 황준량의 편지에서 거론한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초록한 위학(爲學)ㆍ입교(立敎) 대다수는 혼란하고 두서가 없다.
2.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이므로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하면 되겠지만, 회암의 글을 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한 것은 억지스럽다.
3. 주자의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별도로 간행하여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문정공(文貞公)의 <죽계별곡>은 빼는 것이 좋고, 별록(別錄)과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이와 같은 이의에 대하여 주세붕은 황준량에게 편지를 보내어 설명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죽계지》를 가지고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도 천명이고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또한 천명이다. [其知我者命也 其罪我者亦命也]”라고 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논평한 《죽계지(竹溪志)》는 의도한 뜻이 달리 있었기에 감히 숨김없이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 책의 성격이 원래 증자(曾子)의 《대학(大學)》, 자사(子思)의 《중용(中庸)》, 《맹자(孟子)》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실로 회옹(晦翁)이 평생토록 우리 도(道)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은 매우 대단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세에 질투하는 자들이 오히려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여, 기필코 전멸시킨 뒤에야 마음에 시원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헌(晦軒)이 백세(百世) 후에 그를 존숭하고 공경하여 부모처럼 애모하고 떠받들었습니다.
아, 이 마음이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앞으로 올 학자를 개도(開導)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생민을 위하여 최고의 준칙을 세우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만세를 위하여 태평(泰平)을 열기에 충분합니다.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주자(朱子)의 도(道)가 동방으로 계승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계(竹溪)에 묘원(廟院)을 세우고 전답과 서적을 마련하면서 세속의 비웃음과 모욕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안씨(安氏)의 행록(行錄)을 만들고 나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주자(朱子)가 쓴 전현(前賢)의 묘정(廟亭)ㆍ당실(堂室)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존현록(尊賢錄)>이라 제목을 붙이고, 학전(學田)과 장서(藏書)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또 잡록(雜錄)을 만들어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와 평생의 시가(詩歌) 및 좋은 말 가운데서 쇠퇴한 풍속을 두텁게 할 만한 것을 잡다하게 발췌하여 기록하였는데, 이는 지금에 내가 죽계(竹溪)에다 묘원(廟院)을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장서(藏書)를 한 목적이 모두 주자가 숭상하던 것에서 나왔고 주자의 말이 모두 만세에 걸쳐 학자들의 대법(大法)이 된다는 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회옹의 학문을 현양(顯揚)하고 회헌의 뜻을 발현한 것은 실로 회옹을 높이는 것이지 회옹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며, 실로 사특한 말을 멀리 하기 위함이지 비난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별록(別錄)을 만들어 위로 공자ㆍ안자(顔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로부터 두 정자(程子)와 주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했으니, 그 논설은 모두 사욕(邪慾)을 몰아내고 정리(正理)를 보존하며, 사도(斯道)를 붙들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편(篇)을 종합하여 《죽계지(竹溪志)》라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정자ㆍ주자를 회헌에게 굴복시키기 위함이겠습니까. 세상의 도의가 날로 낮아지고 있기에 내가 회헌에 대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계지》를 만들면서 오로지 회옹(晦翁)을 주로 했습니다. 이는 바르게 한 것이지 왜곡한 것이 아니며, 신장하기 위함이었지 굽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자(夫子)가 노나라 역사[춘추(春秋]에 가탁(假託)해서 천하를 포폄하였는데, 그때에는 이미 참람함이라는 것은 잊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계지》에서 회옹의 요긴한 종지(宗旨)를 현양하여 여러 벗들을 위해 기치(旗幟)를 세운 것은 회헌이 흠모한 바가 여기에 있었음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죽계지》를 가지고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도 천명이고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또한 천명입니다. 실로 부득이한 점이 있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귀하(貴下)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쓴 여러 편의 시가는 내 스스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옛 성현들의 격언을 번안한 것입니다. 또 문정공(文貞公)의 이른바 <별곡(別曲)>의 문제점을 약간 보완하여 서원의 여러 분들에게 주어 바람을 쏘이며 시를 읊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로 한 마디라도 나의 사사로운 뜻으로 억지로 맞춘 것이 있다면 비록 비난을 받아도 좋지만, 성현의 격언을 번안했으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정녕 허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곧 성현을 허물하는 것이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의 가악(歌樂)이라는 것은 흔히 음란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며, 쌍화점(雙花店)ㆍ청가(淸歌) 등속은 모두 사람을 악한 곳으로 유도합니다. 이것들이 어떠한 말들입니까? 풍속이 날로 저급한 데로 나아가게 하며, 그것은 음란하고 도리에 어긋나 차마 듣지 못할 내용입니다. 부자(夫子)가 다시 살아나신다면 이런 가악들이 추방 대상에 들지 않겠습니까. 실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周)나라 시대에는 이남(二南)과 정아(正雅)를 나라 행사에 사용하였고, 삼송(三頌)을 종묘(宗廟)에 사용하였으며, 비록 변아(變雅)라 하더라도 역시 빈객을 대접하는 자리에 쓴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정(鄭)ㆍ위(衛)의 음란한 음악을 연주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회옹이 강력히 주장하고 극진하게 논(論)한 것으로, 내가 안타깝게 여기고 다급하게 여겨 그 사특함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부자(夫子)는 큰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를 통하여 전술(傳述)과 창작(創作)을 겸했습니다. 저의 시가 같은 것은 모두 전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자신이 지은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지극히 선(善)하고 지극히 축약된 성현의 요지에서 나왔습니다. 몸을 닦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 무슨 혐오스러운 점이 있어서 느닷없이 삭제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거(仲擧)가 논한 것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여깁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남이 나를 보는 것만 못할 것이며, 익숙히 따져 보면 반드시 그 중정(中正)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달 밝은 날 한 번 와서 다시 토론하여 바른 데로 귀결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본서 卷1 行錄後, 答黃仲擧書》
하였다.
위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안씨(安氏)의 행록(行錄)을 만들고 주위의 비난이 염려되어 다시 주자(朱子)의 글을 취하여 <존현록(尊賢錄)>을 만들었고, 학전(學田)ㆍ장서(藏書)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하였다.
2. 잡록(雜錄)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고사와, 주자의 시가(詩歌) 및 좋은 말을 넣은 것은 묘원(廟院)을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장서(藏書)를 한 것이 주자가 숭상하던 것에서 나왔고 주자의 말이 학자들의 대법(大法)이 된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자를 높이는 것이지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3. 별록(別錄)을 만들어 위로 공자ㆍ안자(顔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로부터 두 정자(程子)와 주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했으니, 그 논설은 모두 사욕(邪慾)을 몰아내고 정리(正理)를 보존하며, 사도(斯道)를 부지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4. <죽계별곡>은 성현의 격언을 번안한 가사로, 문제점을 약간 보완하여 서원 산수 속에서 시가를 읊는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뜻인데, 무슨 혐오스러운 점이 있어 삭제하겠는가.
논란의 일단을 살펴보면, 퇴계와 금계는 엄격하고 세밀한 기준으로 《죽계지》 편찬 체제를 살핀 경향이 있고 신재는 대국적인 취지를 주장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죽계지》의 편찬 체제가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책 명칭에서도 주세붕은 ‘죽계(竹溪)’의 의미를 백운동서원을 넓게 포괄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지만 ‘죽계(竹溪)=순흥안씨(順興安氏)’라는 좁은 의미로 보면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황준량이 “죽계는 안씨의 세거지이므로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하면 되겠지만 회암의 글을 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한 것은 억지스럽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책명을 《白雲洞志》 정도로 하였더라면 비판의 여지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관의 소임을 동시에 수행한 2년 정도의 짧은 시간, 경제적인 어려움, 주위의 비판 여론 등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서원을 창건하고 짧은 기간에 그 이념을 담은 책을 치밀하게 편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주세붕은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도, 주자와 회헌의 학문과 교육 이념을 천명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죽계지 편찬이 주자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것이라는 뜻을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편집ㆍ간행을 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4. 편찬 및 간행 시기

신재 주세붕은 《죽계지》를 편찬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안향의 후손 안위(安瑋)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읽고서 문성공(文成公) 본전(本傳)과 문정공(文貞公)ㆍ문경공(文敬公) 두 분의 전기를 찾아내고, 또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비명(碑銘)과 묘지(墓誌) 및 서로 전송할 때 준 서문을 참고하여, 순흥의 역대 연원을 매우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다만 문성공 묘지가 그 책 속에 선입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문ㆍ비명ㆍ묘지명에서 여러 안씨들에 대하여 반드시 문성공을 거론하였고, 문정공에 대하여는 또 ‘족손(族孫)’이라 하였으니, 계파는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이러한 글을 한 권으로 가려 뽑았습니다.”
하였다.
이 편지를 쓴 시기가 서원을 세운 직후로 보이는 바, 주세붕은 사당과 서원 설립을 계획하면서 이미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행 시기에 대하여는 현재 확증할 자료가 없다. 그 이유는 초간본으로 단정할 수 있는 간본이 전해진 것이 없고, 후쇄본과 중간 형태의 이본은 내용의 가감은 물론 보각 보판이 여러 차례 이루어져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단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고려대학교 소장본의 편집 상태를 가지고 간행 시기를 살펴본다.
1. 주세붕의 서문 저작 시기가 1544년(중종39) 10월인 점.
2. 1545년(인종1) 5월에 지어진 <문성공묘기>가 들어있는 점.
3. 1545년(인종1) 11월 주세붕이 성균관 사성이 되어 이임한 점.
4. 후쇄본에는 보각판의 형태로 들어있는 1549년(명종4) 12월 저작의 이황 편지와 1550년(명종5) 4월 신광한 저작 <소수서원기>가 들어있지 않은 점.
위 사항을 가지고 추정하면, 편찬 시기는 성세창의 <문성공묘기>가 지어진 1545년 5월 이후 주세붕이 이임한 11월 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시 편간 방식을 두고 비판 여론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주세붕이 이임한 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이 그 제자 박택지(朴澤之 박운(朴雲))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년에 상산(商山) 주경유(周景遊)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죽계지》를 편찬하였는데, 끝내고 나서 곧바로 간행하였다.”
라고 한 것도 주세붕이 서문을 쓴 직후 재임 중에 간행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奎1360-7A, 1-3)에는 말미에 1548년(명종3) 봄에 쓴 경재(敬齋) 이기(李芑)의 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계지 발
그 사람의 저서를 읽으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내가 <문성공전>을 읽어보니 그의 마음이 회옹(晦翁)을 사모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과연 회옹에 짝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경유(景遊)가 운운한 것은 고을의 선생 중에 도가 있는 이를 들어 주자의 학문에 의지하여 후진을 교육하여 덕을 이루게 하려고 한 것이니, 그 마음이 어찌 문성공에게 뒤지겠는가. 내가 경유가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건립하고 학전을 설치하고 서적을 수장한 것을 보고서 편록한 여러 편의 글을 읽어보니 그 시설(施設)과 포치(布置)가 모두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참으로 체득한 것이 있지 않고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의 공은 문성공에게 짝할 만하고 참으로 주자(朱子)가 전한 것을 체득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로써 나는 백운동이 중국의 백록동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는다. 우리 유가의 선비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명나라 기원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봄에 경재(敬齋) 쓰다.
竹溪志跋
讀其書而知其人。吾觀文成公傳。其心果慕晦翁爾。未知其學問果可追配晦翁不。景遊所以云云者。欲擧鄕先生之有道者。以寓朱子之學。誘掖後進。使之成德也。其心亦豈下於文成哉。吾觀立廟建院置田藏書。而讀錄諸篇。則施設布置。皆可師法。非有得者。能如是乎。可謂功配文成。而眞得朱子之傳者也。吾知白雲洞未必不爲白鹿洞。吾黨之士其勉焉。皇明紀元嘉靖戊申之春。敬齋題。
위 글에서 간행 시기 추정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다만 저작 시기인 1548년을 《죽계지》의 간행 시기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글이 간입된 규장각 소장본도 인면(印面) 상태가 좋지 못하여 쇄출 시기가 고려대학교 소장본보다 훨씬 뒤지고 판각의 형태와 글씨체도 본문과 현저한 차이가 있어 초간 이후 보각판으로 추정되는 바, 발문의 저작 시기를 가지고 간행 시기로 보는 것도 단언하기 어렵다. 특히 발문 저자인 이기(李芑)는 1545년 을사사화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의 중심인물로서 1548년을 전후하여 병조판서ㆍ좌의정ㆍ영의정을 지냈다가 후일 관작이 삭탈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력 때문에 그가 지은 발문이 《죽계지》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시점에 간입되고 삭제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죽계지》의 간행 시기는 고려대학교 소장본의 편집 상태를 기준으로 1548년의 이기(李芑)의 발문, 1549년 이황의 <上監司沈公書>와 1550년의 신광한의 <紹修書院記>가 저작되기 전인 1545년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Ⅱ. 체제와 내용

1. 초간본

대상본으로 추정한 고려대학교 소장본(晩松 貴重書228)을 가지고 살펴본다. 이 본은 전체적으로 보각판이 보이지 않고, 후쇄본에 추입된 퇴계 이황의 <上監司沈公書 1549>와 신광한(申光漢)의 <白雲洞紹修書院記 1550>가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이 본이 신재 주세붕이 최초로 편차한 형태를 유지한 초간본으로 볼 수 있다.
권수 : 1544년 10월에 지은 주세붕의 서문과 1545년 5월에 지은 성세창(成世昌)의 <白雲洞文成公廟記>가 실려 있다.
권1 : 권제(卷題)는 「安氏行錄」이다. 안향(安珦)의 <文成公傳>, 안축(安軸)의 <文貞公傳>과 묘지명, 안보(安輔)의 묘지명, 안축 후손인 안경공(安景恭)ㆍ안종원(安宗源)ㆍ안순(安純)의 묘지명, 안축이 지은 <鳳捿樓重營記>ㆍ<竹溪別曲> 등 시문 4편, 안축에 대한 전송시 서문 4편 등을 편차하였다. 전체적으로 소수서원의 주벽인 안향을 중심으로 행력이 뛰어난 안씨 관련 인물의 전기와 문헌을 실어 제향(祭享)의 객관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향의 시(詩)에 대하여는 서문에서 전문 인용하면서 여기에서는 싣지 않은 것이 특이한 점으로 보인다.
뒤에 「行錄後」 표제 하에 원우(院宇) 설립과 운영에 관한 축제문(祝祭文) 5편, 편지 6편, 가사 7편, <祭式> 3편, 발 1편 등이 실려 있다.
권2 : 권제는 「尊賢錄」이다. 주희(朱熹)가 지은 송대 유학자의 사당 기문, 정자와 당실(堂室)의 기문이 편차되어 있다.
권3 : 권제는 「學田錄」이다. 주희가 지은 <建寧府崇安縣學田記>ㆍ<衡州石鼓書院記>ㆍ<玉山劉氏義學記>와 함께 말미에 백운동서원 학전의 소재지와 규모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권4 : 권제는 「藏書錄」이다. 주희가 지은 <徽州婺源縣學藏書閣記>ㆍ<建寧府建陽縣學藏書記>ㆍ<同安縣學經史閣上梁文>ㆍ<刊四經成告先聖文>ㆍ<跋白鹿洞所藏漢書>가 수록되었다. 말미에 <白雲洞書院藏書> 표제 하에 장서 서목과 수량을 기술하였다.
권5 : 권제는 「雜錄」이다.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중수하면서 지은 <白鹿洞牒> 등 시문 14편과, 각종 시(詩)ㆍ명(銘)ㆍ찬(贊) 등 47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은 주로 유학의 기본적인 명제와 관련된 것을 발췌하였고, 특히 주렴계와 정명도 등의 화상찬을 수록하여 선사에 대한 주자 존모의 일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후쇄본에서는 뒤에 「雜錄後」 표제 하에 <白雲洞致敬說>ㆍ<院規>ㆍ<白雲洞次朱文公白鹿洞賦>ㆍ<豊基俗尙記>ㆍ<豐基古跡記>ㆍ<豐基移建學校記>가 실려 있는데 이 본에는 실려있지 않다. 인출 또는 결책 상태에서 빠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권6 : 권제는 「別錄」이고 <爲學>ㆍ<立敎>ㆍ<闢邪> 세 단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로 사서(四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의 구절을 발췌하여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다. 말미에 표제 없이 도통의 변천과 별록을 편집하게 된 취지를 밝힌 주세붕의 글이 있다.
권말 : 간략한 간기(刊記)로서 「刻手 〇〇 李訥孫. 校正 貢生 安弘業. 書寫 記官 安忠年.」이 있다. 이눌손(李訥孫)과 안충년(安忠年)은 전기가 확인되지 않고 안홍업(安弘業)은 안향의 후손 1명(安弘業 1510~1561)과 안축의 후손 1명(安弘業 1592~1653) 이 《순흥안씨족보》에 나타나는데, 초간 상황과 연계하면 전자로 볼 수 있다. 이 간기는 현존 후쇄본과 중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판목의 글자가 마멸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로 추정된다.

2. 중간본

가. 목판 중간(후쇄)본
1968년 5월에 안향의 후손 소수서원 도감 안승규(安承奎)와 안축의 후손 별유사(別有司) 안동준(安東濬)의 주관으로 보각(補刻)ㆍ인출되었다. 글씨와 양식이 다른 보각판이 많이 섞여 있으며, 부분적으로 마멸된 것을 보각하지 않은 판도 보인다. 따라서 중간본이라 하기 보다는 ‘보각본(補刻本)’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체제는 초간본과 대동소이하다. 초간본과 다른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초간본에서 권1 「安氏行錄」에 편차되었던 <白雲洞文成公廟記>가 「行錄後」말미로 이동되었다.
「行錄後」말미에 <白雲洞文成公廟記>ㆍ<上監司沈公書>가 추가되었다.
권5 「雜錄」 뒤에 새로이 「雜錄後」 표제 하에 <【白雲洞致敬說)】>ㆍ<【院規)】>ㆍ<白雲洞次朱文公白鹿洞賦>ㆍ<豊基俗尙記>ㆍ<豐基古跡記>ㆍ<豐基移建學校記>를 수록하였다.
권말에 초간본의 간기(刊記)는 없고, 안승규의 <重刊識>와 안동준의 <跋>이 추가되었다.

나. 활판 중간본
1980년에 안향의 후손 안용호(安龍鎬)가 후쇄본을 가지고 교감 편차하고 구두를 가하여 안상홍(安商洪)ㆍ안석준(安碩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전체적인 체제와 내용은 목판 후쇄본과 거의 같으므로 특이한 점만 살펴본다.
권수에 편자인 안용호의 서문이 있다. 후쇄본에서 「行錄後」에 편차되었던 <白雲洞文成公廟記>를 초간본과 같이 권수로 환원하였다.
권1 「安氏行錄」에서 <文成公傳> 뒤에 <諭國子諸生文>을 추가하였다.
권말에 안상홍(安商洪)의 발문이 있다.

다. 목활자 3권 1책본A
1884년경 성균관 유생 박긍수(朴兢壽), 본손 안명렬(安明烈) 등이 관학본 《회헌실기》를 간행할 때 6권 3책본을 가지고 산정(刪定)하여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간행 사실에 대하여 권말에 수록된 안병렬(安昞烈)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지금에 회헌실기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종친 형순(亨淳)과 나의 형님이 한 책으로 줄여 실기 뒤에 첨부하고 나에게 발문을 쓰라고 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쓰게 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21) 중하에 회헌선생 20대손 병렬 삼가 쓰다. [今者。晦軒實記之刊出也。宗人亨淳甫與舍伯。刪爲一冊。附于實記後。謂余識之。不敢辭書。歲甲申仲夏。晦軒先生二十代孫昞烈謹識。]”
체제는 권차가 축소되면서 6권 3책본과는 매우 다르게 편차되었다. 전체적으로 수록내용이 대폭 축소되었는데, 특히 6권 3책본의 권2에 수록된 소수서원 설립 과정의 글과 권5에 수록된 주희(朱熹)의 시(詩) 등은 거의 제외되었다.
권1에 <四賢井碑陰記>ㆍ<文懿公傳>이 추가되었고, <文成公傳>은 실기에 실려 있다는 주기를 하고 내용은 싣지 않았다. 권말에 안병렬(安昞烈)이 1884년에 지은 발문과 간행을 주관한 인명록이 실려 있다.

라. 목활자 3권 1책본B
서발이 없어 간행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위의 A본과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위 본이 간행된 이후에 약간의 가감을 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말에 <白雲洞致敬說>을 싣고 <竹溪志跋>이라는 제목을 부여하였다.

마. 목판 5권 1책본
1909년에 진주(晉州) 연산(硯山)에서 영남의 선비 이도묵(李道黙)과 본손 안효진(安孝鎭) 등이 목판으로 연산본 《회헌실기》를 간행할 때 동시에 간행한 본이다. 이에 대하여는 1909년에 쓴 발문에서,
“영남의 여러 일가들이 문성공 실기를 간행하는 날 논의하기를 ‘문성공의 도통은 주자에 접하고 문성공은 주자를 존경ㆍ흠모하였다. 지금에 문성공의 진상을 책 속에 모시면서 주자의 진상도 같이 모신다면 인정과 의리가 극진한 것이 아니겠는가.’하였고, 이에 대하여 이의가 없어 편차하였다. [而今玆嶠南僉宗氏。文成公實記刊行之日。議曰。文成公之道統接乎朱子。文成公之敬慕存乎朱子。今當文成公眞像奉安于卷中而朱夫子眞像同爲奉安于卷中。則情之宜義之盡。不亦可乎。咸無異辭。方擬編次云矣。]”
하였다. 대체적인 편차는 목활자본과 유사하나 내용은 더 축소되었다. 이본은 《회헌실기》와 같이 간행하면서 주희와 안향의 진상을 넣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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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劉評事永樂閒居見寄

李商隱

白社幽閒君暫居,青雲器業我全疏。청운의 뜻 이룰 그릇 되기에 나는 서투르오.
封諫草歸鸞掖,尚賁꾸미다衡門待鶴書。형문을 꾸며 학서를 기다리네.
蓮聳碧峯關路近,荷翻翠扇水堂虛。
自探典籍忘名利,欹枕時驚落蠹魚。베개 기대 때로 떨어진 좀벌레에 놀라네.

참고서적, 이상은시가집해 473쪽

◾看: 行看,不久
◾諫草 : 간관의 초고
◾난액(鸞掖) : 문하성(門下省)의 이칭.
◾鶴書: 임금이 은사(隱士)를 부르는 조서(詔書). 학두서(鶴頭書). 옛 예서(隸書) 글자체에 학두서체가 있는데, 임금이 은사를 부르는 글은 이 서체를 썼음.及其鳴騶入谷 鶴書赴隴 形馳魄散 志變神動(급기명추입곡 학서부롱 형치백산 지변신동 ; 드디어 그를 맞으러 오는 북제北齊 사자使者의 말이 북산 골짜기를 울음소리 내며 들어오고 학서가 언덕 초당에 이르자, 주옹周顒은 기쁨에 겨워 몸을 달려 쏘대고 혼백이 흩어지듯 날뛰었으며, 지조는 변하고 정신은 흔들렸다.)<공덕장孔德璋 북산이문北山移文>[네이버 지식백과] 학서 [鶴書] (한시어사전, 2007. 7. 9., 국학자료원)
◾蠹魚 : 본문의 ‘두어(蠧魚)’는 서적 속의 좀인데, 서적을 뜻하기도 한다.


奉和滎陽公(鄭餘慶)離筵作

元稹

南郡生徒辭絳帳,東山妓樂擁油旌。 
《鈞天》排比《簫韶》待,猶顧人間有別情。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항상 붉은 휘장을 드리우고 앞을 가린 채 학생들을 가르친 고사
◾鈞天:궁중 음악을 말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간자(趙簡子)가 꿈에 천제(天帝)의 거처에서 노닐면서 균천광악(鈞天廣樂)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43 趙世家》
◾簫韶:《서경》 익직(益稷)에 “순 임금이 창작한 음악인 소소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듣고 찾아와서 춤을 추었다.〔簫韶九成 鳳凰來儀〕” 하였다. 소소(簫韶)는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음악이름이다.


秋夜吟

尚顏

梧桐雨畔夜愁吟,抖擻衣裾蘚色侵。 
枉道(莫說)一生無繫著,湘南山水別人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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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판결

聂以道,江西人,为□□县尹。有一卖菜人,早往市中卖菜,半途忽拾钞一束。时天尚未明,遂藏身僻处,待曙检视之,计一十五定,内有五贯者,乃取一张买肉二贯、米三贯,置之担中,不复买菜而归。其母见无菜,乃叩之。对曰:「早于半途拾得此物,遂买米、肉而回。」母怒曰:「是欺我也。纵有遗失者,不过一二张而已,岂有遗一束之理?得非盗乎?尔果拾得,可送还之。」训诲再三,其子不从,母曰:「若不然,我诉之官。」子曰:「拾得之物,送还何人?」母曰:「尔于何处拾得,当往原处俟之,伺有失主来寻,还之可也。」又曰:「吾家一世,未尝有钱买许多米、肉,一时骤获,必有祸事。」其子遂携往其处,果有寻物者至。其买菜者本村夫,竟不诘其钞数,止云失钱在此,付还与之。傍观者皆令分赏。失主靳之,乃曰:「我失去三十定,今尚欠其半,如何可赏?」既称钞数相悬,争闹不已,遂闻之官。聂尹覆问拾得者,其词颇实,因暗唤其母,复审之亦同。乃令二人各具结罪文状:「失者实失去三十定,卖菜者实拾得十五定。」聂尹乃曰:「如此则所拾之者,非是所失之钞,此十五定乃天赐贤母养老。」给付母子令去。谕失者曰:「尔所失三十定,当在别处,可自寻之。」因叱出,闻者莫不称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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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善의 捫虱新話


  一、文章以气韵为主
  文章以气韵为主,气韵不足,虽有词藻,要非佳作也。乍读渊明诗,颇似枯淡,久久有味。东坡晚年酷好之,谓李杜不及也。此无他,韵胜而已。韩退之诗,世谓押韵之文尔,然自有一种风韵。如《庭楸》诗:“朝日出其东,我尝坐西偏。夕日在其西,我常坐东边。当昼日在上,我坐中央焉。”不知者便谓语无功夫,盖是未窥见古人妙处尔。且如老杜云:“黄四娘家花满蹊,千朵万朵压枝低。”此又可嫌其太易乎?论者谓子美“无数蜻蜓齐上下,一双鸂鶒对浮沉。”便有“关关雎鸠,在河之洲”气象。予亦谓渊明“蔼蔼远人村,依依墟里烟。犬吠深巷中,鸡鸣桑树颠”,当与《豳风?七月》相表里,此殆难与俗人言也。予每见人爱诵“影摇千尺龙蛇动,声撼半天风雨寒”之句以为工,此如见富家子弟,非无福相,但未免俗耳。若比之“霜皮溜雨四十围,黛色参天二千尺”,便觉气韵不侔也。达此理者,始可论文。(上集卷一,下同)
  二、诗之雅颂即今之琴操
  诗三百篇,孔子皆被之弦歌,古人赋诗见志,盖不独诵其章句,必有声韵之文,但今不传尔。琴中有《鹊巢操》、《驺虞操》、《伐檀》、《白驹》等操,皆今诗文,则知当时作诗皆以歌也。又,琴古人有谓之“雅琴”、“颂琴”者,盖古之为琴,皆以歌乎诗,古之雅、颂即今之琴操尔。雅、颂之声固自不同,郑康成乃曰《豳风》兼雅、颂。夫歌风焉得与雅、颂兼乎?舜《南风歌》、楚《白雪辞》,本合歌舞;汉帝《大风歌》、项羽《垓下歌》,亦入琴曲。今琴家遂有《大风起》、《力拔山》之操,盖以始语名之尔。然则古人作歌,固可弹之于琴,今世不复知此。予读《文中子》,见其与杨素、苏琼、李德林语,归而援琴鼓荡之什,乃知其声至隋末犹存。
  三、画工善体诗人之意
  唐人诗有“嫩绿枝头红一点,动人春色不须多”之句,闻旧时尝以此试画工。众工竟于花卉上妆点春色,皆不中选。惟一人于危亭缥缈隐映处,画一美妇人凭栏而立,众工遂服。此可谓善体诗人之意矣。唐明皇尝赏千叶莲花。因指妃子谓左右曰:“何如此解语花也?”而当时语云:“上宫春色,四时在目。”盖此意也。然彼世俗画工者,乃亦解此耶?
  四、韩以文为诗杜以诗为文
  韩以文为诗,杜以诗为文,世传以为戏。然文中要自有诗,诗中要自有文,亦相生法也。文中有诗,则句语精确;诗中有文,则词调流畅。谢玄晖曰:“好诗圆美流转如弹丸。”此所谓诗中有文也。唐子西曰:“古人虽不用偶俪,而散句之中暗有声调,步骤驰骋,亦有节奏。”此所谓文中有诗也。前代作者皆知此法,吾请无出韩杜。观子美到夔州以后诗,简易纯熟,无斧凿痕,信是如弹丸矣。退之《画记》,铺排收放,字字不虚,但不肯入韵耳。或者谓其殆似甲乙帐,非也。以此知杜诗、韩文,阙一不可。世之议者遂谓子美无韵语殆不堪读,而以退之之诗但为押韵之文者,是果足以为韩杜病乎?文中有诗,诗中有文,知者领予此语。(《草堂》)
  五、文章由人所见
  文章似无定论,殆是由人所见为高下尔。只如杨大年、欧阳永叔皆不喜杜诗,二公岂为不知文者,而好恶如此。晏元献公尝喜诵梅圣俞“寒鱼犹著底,白鹭已飞前”之句,圣俞以为“此非我之极致者”,岂公偶得意于其间乎?欧公亦云:“吾平生作文,惟尹师鲁一见展卷疾读,五行俱下,便晓人深意处。”然则于余人当有所不晓者多矣。所谓文章如精金美玉,市有定价,不可以口舌增损者,殆虚语耶?虽然《阳春》、《白雪》而和者数人,《折杨》、《黄华》则嗑然而笑,自古然矣。吾观昔人于小诗皆句锻月炼,至谓“吟安一个字,捻折数茎须”者,其用意如此。乃知老杜曰:“更觉良工心独苦”,不独论画也。
  六、东坡文字好谩骂
  鲁直尝言:“东坡文字妙一世,其短处在好骂尔。”予观山谷浑厚,坡似不及。坡盖多与物忤,其游戏翰墨,有不可处,辄见之诗。然尝有句云:“多生绮语摩不尽,尚有宛转诗人情。猿吟鹤唳本无意,不知下有行人行。”盖其自叙如此。又尝自言:“性不慎语言,与人无亲疏,辄输写肝胆,有所不尽,如茹物不下,必尽吐乃已。而世或记疏以为怨咎坡。”此语盖实录也。坡自晚年更涉世患,痛自摩治,尽去圭角,方更纯熟。故其诗曰:“我生本强鄙,少以气自挤。扁舟到江海,赤手揽象犀。还来辄自悟,留气下暖脐。”观此诗便可想见其为人矣。大抵高人胜士类是,不能徇俗俯仰,其谩骂玩侮亦其常事。但后生慎勿袭其辙,或当如鲁直所言尔。然予观坡题李白画像云:“西望太白横峨岷,眼高四海空无人。平生不识高将军,手涴吾足乃敢嗔。”又尝有诗曰:“七尺顾躯走世尘,十围便腹贮天真。此中空洞浑无物,何止容君数百人。”且自言:“我所谓君者,自王茂洪之流尔。岂谓此等辈哉!”乃知坡虽好骂,尚有事在。
  七、欧阳公喜梅圣俞苏子美诗
  韩退之与孟东野为诗友,近欧阳公复得梅圣俞,谓可比肩韩孟。故公诗云:“犹喜共量天下士,亦胜东野亦胜韩”也,盖尝目圣俞为诗老云。公亦最重苏子美,称为“苏梅”。子美喜为健句,而梅诗乃务为清切闲淡之语。公有《水谷夜行》诗,各述其体。然子美尝曰:“吾不幸写字,人以比周越;作诗,人以比尧臣。”此又可笑。
  八、前辈文人相奖借
  欧阳公不得不收东坡,所谓“老夫当避路,放他出一头地”者,其实掩抑渠不得也。东坡亦不得不收秦少游、黄鲁直辈,少游歌词当在东坡上,少游不遇东坡,当能自立,必不在人下也。然提奖成就,坡力为多。
  九、文 体
  以文体为诗,自退之始;以文体为四六,自欧公始。
  一○、评诗句可作画本
  东坡咏梅有“竹外一枝斜更好”之句,此便是坡作《夹竹梅花图》,但未下笔耳。每咏其句,便如行孤山篱落间,风光物彩来照映,人接应不暇也。近读山谷文字云:“适人以桃杏杂花拥一枝梅见惠,谷为作诗。不知惠者何人,然能如此安排,亦是不凡。正如市倡东涂西抹中,忽见谢家夫人,萧散自有林下风气,益复可喜。”窃谓此语便可与坡诗对,画作两幅图子也。戏录于此,将与好事者以为画本。
  一一、论诗人下句优劣
  诗人有俱指一物,而下句不同者,以类观之,方见优劣。王右丞云:“遍插茱萸少一人。”朱放云:“学他年少插茱萸。”子美云:“醉把茱萸子细看。”此三句皆言茱萸.当以杜为优。又如子美云:“鱼吹细浪摇歌扇。”李洞云:“鱼弄晴波影上帘。”韩偓云:“池面鱼吹柳絮行。”此三句皆言鱼戏,而韩当为优。又如白公云:“梨花一枝春带雨。”李贺云:“桃花乱落如红雨。”王勃云:“珠帘暮卷西山雨。”此三句皆言雨,而王当为优。学诗者以此求之,思过半矣。
  一二、文字各有所主未可优劣论
  撒盐空中,此米雪也;柳絮因风,此鹅毛雪也。然当时但以道蕴之语为工。予谓《诗》云:“如彼雨雪,先集维霰。”“霰”即今所谓米雪耳。乃知谢氏二句,当各有所谓,固未可优劣论也。东坡遂有“柳絮才高不道盐”之句,此是且图对偶亲切耳。
  一三、借西子形容西湖
  东坡酷爱西湖,尝作诗云:“若把西湖比西子,淡妆浓抹总相宜。”识者谓此两句已道尽西湖好处。公又有诗云:“云山已作歌眉敛,山下碧流清似眼。”予谓此诗又是为西子写生也。要识西子,但看西湖;要识西湖,但看此诗。
  一四、诗评乃花谱
  予尝与林邦翰论诗及四雨字句,邦翰云:“‘梨花一枝春带雨’句虽佳,不免有脂粉气,不似‘朱帘暮卷西山雨’,多少豪杰。”予因谓乐天句似茉莉花,王勃句似含笑花,李长吉“桃花乱落如红雨”似檐葡花。而王荆公以为总不似“院落深沉杏花雨”,乃似阇提花。邦翰抚掌曰:“吾子此论不独诗评,乃花谱也。”(上集卷二,下同)
  一五、帝王文章富贵气象
  帝王文章自有一般富贵气象。国初江南遣徐铉来朝,铉欲以辨胜,至诵后主月诗云云。太祖皇帝但笑曰:“此寒士语尔,吾不为也。吾微时,夜至华阴道中逢月出,有句云:‘未离海底千山暗,才到中天万国明。’”铉闻不觉骇然惊服。太祖虽无意为文,然出语雄杰如此。予观李氏据江南全盛时,宫中诗曰:“帘日已高三丈透,金炉次第添香兽,红锦地衣随步皱。佳人舞点金钗溜,酒恶时将花蕊嗅,别殿时闻箫鼓奏。”议者谓与“时挑野菜和根煮,旋斫生柴带叶烧”者异矣。然此尽是寻常说富贵语,非万乘天子体。予盖闻太祖一日与朝臣议论不合,叹曰:“安得桑维翰者与之谋事乎?”左右曰:“纵维翰在,陛下亦不能用之。”盖维翰爱钱,太祖曰:“穷措大眼孔小,赐与十万贯,则塞破屋子矣。”以此言之,不知彼所谓“金炉”、“香兽”、“红锦”、“地衣”当费得几万贯?此语得无是措大家眼孔乎?
  一六、林子山诗
  林子山诗亦多佳句,其自叙:“过门人指朝郎宅,入室浑如野老家。”人皆许其有隐者之致。然轻薄子犹诵其《出山》诗云:“尺书中夜至,清晓即扬鞭。”人谓子山“三诏不起”,于是闻者莫不绝倒。
  一七、诗人多寓意于酒妇人
  荆公编李杜韩欧四家诗,而以欧公居太白之上,曰:“李白诗语迅快,无疏脱处,然其识污下,十句九句言妇人、酒尔。”予谓诗者,妙思逸想所寓而已。太白之神气,当游戏万物之表,其于诗特寓意焉耳,岂以妇人、酒能败其志乎?不然,则渊明篇篇有酒,谢安石每游山必携妓,亦可谓其识不高耶?欧公文字寄兴高远,多喜为风月闲适之语,盖是效太白为之,故东坡作欧公集序亦云:“诗赋似李白。”此未可以优劣论也。黄鲁直初作艳歌小词,道人法秀谓其以笔墨诲淫,于我法中当堕泥犁之狱。鲁直自是不复作。以鲁直之言能诲淫,则可;以为其识污下,则不可。(上集卷三,下同)
  一八、韩文杜诗无一字无来处
  文人自是好相采取,韩文杜诗号不蹈袭者,然无一字无来处,乃知世间所有好句,古人皆已道之,能者时复暗合孙吴尔。大抵文字中自立语最难,用古人语又难于不露筋骨,此除是具倒用大司农印手段始得。
  一九、文贵精工
  世传欧阳公平昔为文,每草就,纸上净讫,即黏挂斋壁,卧兴看之,屡思屡改,至有终篇不留一字者。盖其精如此。大抵文以精故工,以工故传远,三折肱始为良医,百步穿杨始名善射,其可传者皆不苟者也。唐人多以小诗著名,然率皆旬锻月炼以故,其人虽不甚显,而诗皆可传,岂非以其精故耶?然人说杨大年每遇作文,则与门人宾客投壶弈棋,语笑喧哗而不妨属思,以小方纸细书,挥翰如飞,文不加点,每盈一幅则命门人传录,顷刻之际成数千言,以此似为难及。然欧公、大年要皆是大手,欧公岂不能与人斗捷哉?殆不欲苟作云尔。
  二○、东坡不独是行脚僧乃苦行僧
  东坡尝言:见今正是行脚僧,但吃些酒肉耳。予谓坡不独是行脚僧,乃苦行僧也。坡盖自谪黄州后,便见学道工夫。晚年笔墨挟海上风涛之气,益穷益工,此则苦行僧又不及也。(上集卷四,下同)
  二一、文章忌俗与太清
  予尝与僧惠空论今之诗僧,如病可、瘦权辈要皆能诗,然尝病其太清。予因诵东坡《陆道士墓志》,坡尝语陆云:“予神清而骨寒,其清足以仙,其寒亦足以死。”此语虽似相法,其实与文字同一关捩。盖文字固不可犯俗,而亦不可太清,如人太清则近寒,要非富贵气象,此固文字所忌也。观二僧诗,正所谓“其清足以仙,其寒亦足以死”者也。空云:“吾往在豫章,盖从李商老游。一日亦论至可师处,商老曰:‘可诗句句是庐山景物,试拈却庐山,不知当道何等语?’亦以为有太清之病。”予笑谓空曰:“商老此语,无乃暗合孙吴耶?”
  二二、心无定见故无定论
  天下无定境,亦无定见。喜怒哀乐,爱恶取舍,山河大地,皆从此心生。……杜子美曰:“感时花溅泪,恨别鸟惊心。”至于《闷》诗则曰:“卷帘惟白水,隐几亦青山。”山水花鸟,此平时可喜之物,而子美于恨闷中惟恐见之。盖此心未净,则平时可喜者,适足与诗人才子作愁具尔,是则果有定见乎?论者多怪孟东野方叹出门之碍,而复夸马蹄之疾,以为唐诗人多不闻道。此无他,心见不同尔。
  二三、梅圣俞河豚诗欧公食车螯诗
  梅圣俞河豚诗云:“但言美无度,谁知死如麻。”欧公食车螯诗亦云:“但知美无厌,谁谓来甚遐。”然已觉牵强,不似梅诗为切题。
  二四、咏 梅
  客有诵陈去非墨梅诗于予者,且曰:“信古人未曾到此。”予摘其一曰;“‘粲粲江南万玉妃,别来几度见春归。相逢京洛浑依旧,只是缁尘染素衣。’世以简斋诗为新体,岂此类乎?”客曰:“然。”予曰:“此东坡句法也。坡梅花绝句云:‘月地云阶漫一樽,玉儿终不负东昏。临春结绮荒荆棘,谁信幽香是返魂。’简斋亦善夺胎耳。简斋又有腊梅诗曰:‘奕奕金仙面,排行立晓晴。殷勤夜来雪,少住作殊缨。’亦此法也。”
  二五、文章知难者少
  文章不使事最难,使事多亦最难。不使事难于立意,使事多艰于遣辞。能立意者,未必能造语;能遣辞者,未必能免俗,此又其最难者。大抵为文者多,知难者少。
  二六、韩文公排斥灵师意微而显
  退之送惠师、灵师、文畅、澄观等诗,语皆排斥,独于灵师似若褒惜而意实微显。如“围棋六博醉,花月罗婵娟”之句,此岂道人所宜为者?其卒章云:“方将敛之道,且欲冠其颠。”于澄观诗亦云:“我欲收敛加冠巾。”此便是勒令还俗也。退之又尝有诗云:“我宁屈曲自世间,安能从汝巢神仙?”故作谢自然、谁氏子等诗,尤为切齿。然于华山女诗,乃独假借,末句云:“仙梯难攀俗缘重,浪凭青鸟通丁宁。”与记梦诗语便不同,不知何以得此?(下集卷一,下同)
  二七、诗有格高有韵胜
  予每论诗,以陶渊明、韩、杜诸公皆为韵胜。一日见林倅于径山,夜话及此。林倅曰:“诗有格有韵,故自不同。如渊明诗是其格高,谢灵运池塘春草之句乃其韵胜也。格高似梅花,韵胜似海棠花。”予时听之,矍然若有所悟。自此读诗顿进,便觉两眼如月,尽见古人旨趣。然恐前辈或有所未闻。
  二八、东坡诗用事多误
  东坡诗用事多有误处。《虢国夫人夜游图》诗云:“当时亦笑潘丽华,不知门外韩擒虎。”按,陈后主张贵妃名丽华,韩擒虎平陈,后主、丽华俱见收。而齐东昏侯有潘淑妃,初不名丽华也。又按梅花绝句云:“月地云阶漫一樽,玉儿终不负东昏。临春结绮荒荆棘,谁信幽香是返魂。”此亦张丽华事,而坡作东昏侯事用之。坡又有诗云:“全胜仓公饮上池。”《史记》:饮上池乃是扁鹊。又诗云:“纵令司马能鑱石,奈有中郎解摸金。”而袁绍檄曹操盖云“发丘中郎”、“摸金校尉”。又诗云:“市区收罢鱼豚税,来与弥陀共一龛。”褚遂良云:“一食清斋,弥勒同龛。”非“弥陀”也。此类非一,盖维大才可以阔略,余人正不可学。
  二九、荆公诗极精巧
  荆公晚年诗极精巧,如“术落山林成自献,潮回洲渚得横陈”,“一水护田将绿绕,两山排闼送青来”之类,可见其琢句工夫,然论者犹恨其雕刻太过。公尝读杜荀鹤雪诗云:“江湖不见飞禽影,岩谷惟闻拆竹声。”改云宜作“禽飞影”、“竹拆声”。又王仲至试馆职诗云:“日斜奏罢长杨赋,闲拂尘埃看画墙。”公又改为“奏赋长杨罢,”云:“如此语健。”此亦是一癖。
  三○、杜诗高妙
  老杜诗当是诗中六经,他人诗乃诸子之流也。杜诗有高妙语,如云:“王侯与蝼蚁,同尽随丘墟。愿闻第一义,回向心地初。”可谓深入理窟,晋宋以来诗人无此句也。“心地初”,乃《庄子》所谓“游心于淡,合气于漠”之义。(《草堂》)
  三一、题沧浪亭
  苏子美居姑苏,买水石作沧浪亭。欧阳公以诗寄题,有云:“荒湾野水气象古,高林翠阜相回环。”此两句最为著题。予尝访其遗迹,地经兵火,已数易主矣。今属韩郡王府,亭非旧创也。然荒湾野水,高林翠阜,犹可想象当时景物。予每至其上,徘徊不能去,因思古人“柳塘春水漫”与“池塘生春草”之句,似专为此亭设也,非意到目见不知其妙。予尝有《游西园》诗戏述其事,其卒章云:“不到沧浪亭上望,那知此句是天成。”盖谓此也。
  三二、作诗如作杂剧临了打诨方是出场
  山谷尝言作诗正如作杂剧,初时布置,临了须打诨,方是出场。予谓杂剧出场,谁不打诨,只是难得切题可笑尔。山谷盖是读秦少章诗,恶其终篇无所归,故有此语。然东坡尝有谢赐御书诗曰:“小臣愿对紫薇花,试草尺书招赞普。”秦少章一见,便曰:“如何便说到这里?”少章之意,盖谓东坡不当合闹,然亦是不会看杂剧也。据坡自注云:时熙河新获鬼章,是日泾原复奏夏贼数十万人皆遁去。故其诗云:“莫言弄墨数行书,须信时平由主圣。犬羊散尽沙漠空,捷烽夜到甘泉宫。似闻指挥筑上郡,已觉谈笑无西戎。”乃知坡诗意自有在。
  三三、欧阳公诗仿韩退之赤藤杖歌
  韩文公尝作《赤藤杖歌》云:“赤藤为杖世未窥,台郎始携自滇池。共传滇神出水献,赤龙拔须血淋漓。”又云:“羲和操火鞭,暝到西极睡所遗。”此歌虽穷极物理,然恐非退之极致者,欧阳公遂每每效其体,作《凌溪大石》云:“山经地志不可究,遂令异说争纷纭。皆云女娲初锻炼,融结一气凝精纯。仰观苍苍补其缺,染此绀碧莹且温。或疑古者燧人氏,钻以出火为炮燔。苟非圣人亲手迹。不尔孔穴谁雕剜?”又云:“汉使把汉节,西北万里穷昆仑,行经于阗得宝玉,流入中国随河源。沙磨水激自穿穴,所以镌凿无瑕痕。”观其立意,故欲追仿韩作,然颇觉烦冗,不及韩公为浑成尔。公又有《石篆诗》云:“我疑此字非笔墨,又疑人力非能为。始从天地胚胎判,元气结此高崔巍。当时野鸟踏山石,万古遗迹于苍崖。山祗不欲人屡见,每吐云雾深藏埋。”《紫石砚屏歌》云:“月从海底来,行向天东南。正当天中时,下照万丈潭。潭中无风月不动,倒影射入紫石岩。月光水洁石莹净,感此阴魄来中潜。自从月入此石中,天有两曜分为三。”公又尝作《吴学士石屏歌》云:“吾嗟入愚不见天地造物之初难,乃云万物生自然。岂知镌凿刻划丑与妍,千状万态不可惮,神愁鬼泣日夜不得闲。”此三篇亦前篇之意也,其法盖出于退之。然《石屏歌》云:“又疑鬼神好胜憎吾侪,欲极奇怪穷吾才。”而《洛阳牡丹图诗》又云:“又疑人心愈巧伪,天欲斗巧穷精微。”二诗殆是一意,自不宜两用。(下集卷二,下同)
  三四、郑康成注毛诗牵合周礼沈存中论诗亦有此癖
  诗人之语,要是妙思逸兴所寓,固非绳墨度数所能束缚,盖自古如此。予观郑康成注《毛诗》乃一一要合周礼,《定之方中》云“騋牝三千”,则云:“国马之制,天子十有二闲马六种三千四百五十六匹,邦国六闲马四种千二百九十六匹,卫之先君兼邶鄘而有之,而马数过制。”《采芑》云“其车三千”,则云:“司马法兵车一乘,甲士三人,步卒七十二人,宣王承乱羡卒尽起。”《甫田》云“岁取十千”,则以为井田之法一成之数。《棫朴》云“六师及之”,则必为殷末之制,未有周礼,周礼五师为军,军万二千五百人。如此之类,皆是束缚太过。不知诗人本一时之言,不可一一牵合也。康成盖长于礼学,以礼而言诗,过矣。近世沈存中论诗亦有此癖,遂谓老杜“霜皮溜雨四十围,黛色参天二千尺”为太细长。而说者辨之曰:“只如杜诗有云:‘大城铁不如,小城万丈余。’世间岂有万丈城哉?亦言其势如此尔。”予谓周诗云:“崧高维岳,峻极于天。”岳之峻,亦岂能极天?所谓不以辞害意者也。文与可尝有诗与东坡曰:“拟将一段鹅溪绢,扫取寒梢万丈长。”坡戏谓与可曰:“竹长万丈,当用绢一百五十匹。知公倦于笔砚,愿得此绢而已。”与可无以答,则曰:“吾言妄矣。”世岂有万丈竹哉?坡从而实之,遂答其诗曰:“世间亦有千寻竹,月落庭空影许长。”与可因以所画筼筜偃谷竹遗坡曰:“此竹数尺尔,而有万丈之势。”观二公谈笑之语如此,可见诗人之意。若使存中见之,无乃又道太细长耶?
  三五、李杜韩柳优劣
  唐世诗称李杜,文章称韩柳。今杜诗语及太白无虑十数篇,而太白未尝有与杜子美诗,只有饭颗一篇,意颇轻甚。论者谓以此可知子美倾倒太白至矣。晏元献公尝言韩退之扶导圣教,剗除异端,自其所长。若其祖述坟典,宪章骚雅,上传三古,下笼百氏,横行阔视于缀述之场者,子厚一人而已矣。然学者至今但雷同称说,其实李杜韩柳岂无优劣?达者观之,自可默喻。(下集卷三,下同)
  三六、吴中橙虀鲈鲶桃水肥鳜景致
  东坡居吴中久,颇熟其风土。尝作诗云:“荷尽已无擎雨盖,菊残犹有傲霜枝。一年好景君须记,正是橙黄橘绿时。”论者谓非吴人不知其为佳也。坡又尝作《文与可洋州园池诗》曰:“金橙纵复里人知,不见鲈鱼价自低。须是松江烟雨里,小舡烧薤捣香虀。”又云:“溶溶春港漾晴晖,芦笋生时柳絮飞。不见江南三月里,桃花流水鳜鱼肥。”予谓橙、虀、鲈鲙、桃花、肥鳜,似此景致,亦岂北人所有?
  三七、花 卿
  世人谓杜子美《赠花卿诗》有“此曲只应天上有,人间那得几回闻”之句,因误认花卿为歌妓者多矣。按,花卿盖西川牙将,尝与西川节度崔光远平段子璋,遂大掠东川,故子美复有《戏赠花卿歌》,其卒章云:“人道我卿绝代无,天子何不唤取守京都?”当时花卿跋扈不法,有僭用礼乐之意,子美所赠盖微而显者也。不然,岂天上有曲而人间不得闻乎?
  三八、欧阳公不能变诗格
  欧阳公诗犹有国初唐人风气,公能变国朝文格,而不能变诗格。及荆公、苏、黄辈出,然后诗格遂极于高古。
  三九、杜诗意度闲雅不减渊明
  陶渊明诗:“采菊东篱下,悠然见南山。”采菊之际,无意于山,而景与意会,此渊明得意处也。而老杜亦曰:“夜阑接软语,落月如金盆。”予爱其意度闲雅不减渊明,而语句雄键过之。每咏此二诗便觉当时清景尽在目前,而二公写之笔端殆若天成,兹为可贵。(《草堂》)
  四○、拟渊明作诗
  山谷尝谓:白乐天、柳子厚俱效陶渊明作诗,而惟柳子厚诗为近。然以予观之,子厚语近而气不近,乐天气近而语不近,子厚气凄怆,乐天语散缓,虽各得其一,要于渊明诗未能尽似也。东坡亦尝和陶诗百余篇,自谓不甚愧渊明,然坡诗语亦微伤巧,不若陶诗体合自然也。要知渊明诗,须观江文通《杂体诗》中拟渊明作者,方是逼真。(下集卷四,下同)
  四一、作诗狂怪似豁达李老
  东坡尝言:作诗狂怪,至卢仝、马异极矣。若更求奇,便作杜默。默之歌诗,坡以为山东学究饮村酒,食瘴死牛肉,醉饱后所发者也,尚足言诗乎?予闻庆历中,京师有民自号豁达李老者,每好吟咏而词多鄙俚。故予亦尝戏谓:作诗平易至白乐天、杜荀鹤极矣,若更浅近,又是豁达李老。
  四二、文章关纽
  文章要须于题外立意,不可以寻常格律而自窘束。东坡尝有诗曰:“论画以形似,见与儿童邻。作诗必此诗,定非知诗人。”此便是文章关纽也。予亦尝有和人诗云:“鲛绡巧织在深泉,不与人间机杼联。要知妙在笔墨外,第一莫为醒者传。”窃自以为得坡公遗意,但不知句法古人多少?
  四三、王右丞画渡水罗汉
  王右丞作雪里芭蕉,盖是戏弄翰墨,不顾寒暑。今世传右丞所画渡水罗汉,亦是意也。而山谷云:“阿罗皆具神通,何至拖泥带水如此?使右丞作罗汉画如此,何处有王右丞耶?”山谷意以为右丞当画罗汉,不当作罗汉渡水也。然予观韩子苍《题孙子邵王摩诘渡水罗汉》诗云:“问渠褰裳欲何往?仓惶徙以沧江上。至人入水固不濡,何以有此恐怖状?我知摩诘意未真,欲以笔端调世人。此水此渡俱非实,摩诘亦未尝下笔。”以此观之,古人作画自有指趣,不知山谷何为作此语?岂犹未能玩意笔墨之外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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