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9일 금요일

주세붕의 죽계지

《죽계지(竹溪志)》 해제(解題)
안정(安柾) 嶺南文獻硏究所

Ⅰ. 편찬 개요

1. 편찬자

편찬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다. 그의 자는 경유(景遊),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ㆍ무릉도인(武陵道人)ㆍ손옹(巽翁),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495년(연산군1) 10월 25일 합천군(陜川郡) 천곡리(泉谷里)에서 태어나 진사 강신효(姜藎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12년(중종7) 18세에 향시에서 장원하였고, 1522년(중종17)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1524년(중종19) 정자(正字)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예문관 검열ㆍ춘추관 기사관ㆍ홍문관 정자ㆍ경연전경(經筵典經)ㆍ박사(博士)ㆍ부수찬ㆍ수찬ㆍ공조 좌랑ㆍ병조 좌랑ㆍ강원도 도사 등을 지내고, 1530년(중종25) 36세에 사간원 헌납ㆍ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537년(중종32)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고, 1540년(중종35)에《이훈록(彜訓錄)》과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을 찬하였다. 1541년(중종36) 47세로 공조정랑ㆍ승문원 교리ㆍ예빈시 첨정을 지내고 7월에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어 이듬해인 1542년(중종37)에 순흥 죽계(竹溪) 가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여 안향(安珦)을 제향하였다. 1545년(인종1) 11월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1546년(명종1) 군자감정ㆍ춘추관 편수관으로서 《중종ㆍ인종실록》을 편수하였다. 이어서 홍문관 응교ㆍ홍문관 부제학ㆍ승정원 동부승지ㆍ좌부승지ㆍ좌승지가 되었다. 1549년(명종4) 55세로 도승지ㆍ호조참판ㆍ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海州) 향교 서쪽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건하여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1550년(명종5)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8) 59세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54년(명종9) 병으로 사직하고, 7월 2일 졸하였다. 1591년(선조24) 동림서원(桐林書院)에, 1633년(인조11) 11월 소수서원과 해주의 양근서원(楊根書院)에 배향되었다. 1660년(현종1) 사림이 남고(南皐)에 서원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고, 1676년(숙종2) 덕연서원(德淵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677년(숙종3)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18년(순조18) ‘문민(文敏 勤學好問曰文 應事有功曰敏)’ 시호가 내렸다. <年譜>에 의거함

2. 편찬 배경

《죽계지》 편찬 이유와 과정은 편찬자 주세붕이 직접 쓴 <竹溪志序>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36) 47세의 나이로 예빈시 첨정을 지내고 7월 4일 풍기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1542년(중종37) 8월 15일 문성공묘 기공식을 하고 1543년(중종38) 8월 11일 문성공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이어서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이때 진사(進士) 황빈(黃彬)이 출연한 쌀 45석으로 기금을 세우고 논 1결 94부 3속과 밭 72부 4속의 학전을 마련하였으며, 터를 다지다가 획득한 놋쇠를 팔아 사서삼경(四書三經)ㆍ《이정전서(二程全書)》ㆍ《주자대전》ㆍ《대학연의》ㆍ《통감강목》 등 500책의 서적을 수장하였다. 그리고 1544년(중종39) 9월 7일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과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배향하였고, 10월에 《죽계지》 서문을 집필하였다. 우리나라 초유의 서원 설립이 거의 군수 1인의 의지와 계획에 의하여 3년에 걸쳐 완성된 셈이다. 그 중에 진사 황빈(黃彬)의 기금 출연, 안향의 후손인 매담(梅潭) 안공신(安公信)과 안축의 후손인 안배곤(安配坤)과 지역 선비들의 직간접적인 협조가 없지는 않았다.
당시에 기근 등으로 지역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였고, 초유의 서원 설립에 대하여 일반의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주세붕이 서문에서 문답 형식으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 : 문성공은 이미 국학(國學)에 종사(從祀)되어 고을마다 사당이 있는데 왜 따로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가? 흉년이니 때가 맞지 않고 주관자의 지위가 낮으니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답 :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에 따라 하고서, 무궁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 : 주자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할 때 조정에 아뢰고 하였는데, 왜 임의대로 하는가?
답 : 백록동서원은 선대 제왕의 명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뢴 것이나, 기타 서원은 아뢴 일이 없었다.
문 : 문성공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한 것 등은 인정되지만 학문은 어떤가?
답 : 공의 학문이 비록 주자에 미치지는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서원 앞 죽계 가의 바위에 「敬」자를 새기려고 하였을 때 비난 여론이 있을 때 주자의 편지를 근거로 제시하고 새긴 경위를 밝혔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론의 비판을 받으며 초유의 서원을 창설한 주세붕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실과 이념을 담은 서적 편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아울러 비난 여론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피력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하여도 서문에서 간접적으로 밝혔다.
“드디어 《죽계지(竹溪志)》 몇 편을 편찬하면서 국사에 실린 행록(行錄)을 책머리에 엮었고, 기타 <존현록(尊賢錄)>ㆍ<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잡록(雜錄)> 등은 반드시 주자가 지은 것을 편 머리에 드러내어 주자를 경모한 공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모두가 중니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두 정자의 학문의 요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 후세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는 그 의리(義理)ㆍ내외(內外)ㆍ정조(精粗)ㆍ본말(本末)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참으로 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먼저 공의 본전을 읽으면서 공이 주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마음이고 주자가 공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어떤 도였는가를 반드시 찾아서, 공이 주자를 존경했던 도리로 공을 존경하여 천만 번 마음을 씻은 뒤에 주자의 모든 저서를 숙독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가 반드시 눈앞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竹溪志 序》

3. 편간에 대한 논란

《죽계지》편간에 대하여는 당시에 체제ㆍ내용 등에 대하여 상당한 이견과 비판이 있었다. 이는 주로 퇴계 이황의 지적에 의하여 널리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황이 그 제자 박택지(朴澤之 박운(朴雲))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년에 상산(商山) 주경유(周景遊)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죽계지》를 편찬하였는데, 끝내고 나서 곧바로 간행하였다. 내가 사우 몇 명과 함께 그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하고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경유가 자신의 뜻이 옳다고 여기고 들어주지 않았다. 대개 시비의 공평함은 사람이 누구나 공감하는 법인데 어찌 자신의 사견만 옳게 여기고 거부할 수 있는가.”
하였다. 또 《영봉지(迎鳳志)》 편찬과 관련하여 1560년(명종15)에 노경린(盧慶麟)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영봉지(迎鳳志)는 중거(仲擧)가 보내주어 이미 보았다. 다만 내가 항상 《죽계지》가 잡박한 것을 면치 못한 것에 대하여 문제점으로 여겼으니, 그 편찬 취지는 취하되 실제 행한 것은 본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가 초록한 위학(爲學)ㆍ입교(立敎) 대다수는 혼란하고 두서가 없다.”
하였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장편의 편지를 보내어 구체적으로 이견을 제시하였다. 황준량은 주세붕보다 22세 연하였고, 죽계지 편찬 수년 뒤인 1547년(명종2)에는 관찰사 안현(安玹)과 더불어 소수서원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제정하였으며 풍기에 거주하면서 지역의 중추 인물로서 퇴계 이황과 교유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의견은 대체로 퇴계의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편지 내용이 전반적으로 매우 정중하면서도 《죽계지》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지적하여 논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지난번에 《죽계지(竹溪志)》 편목을 보았는데, <행록(行錄)>은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이고 여타 편(篇)은 주자의 글로서 역시 모두 볼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 선생의 근면한 마음과 어진 이를 높이는 지성이 어쩌면 이런 정도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만 편차(編次) 사이에 약간의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어찌 선생께서 생각하지 못하신 것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회암을 통하여 회헌을 탐구하여 회헌의 학문이 연원(淵源)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입니다. 여러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회암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놓고 아울러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의 글을 보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회헌의 마음을 탐구해 보려는 자는 마땅히 별도로 회암의 글을 취해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전승(傳承)의 계통이 있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꼭 《죽계지》에다 회암의 글을 넣어 억지로 일관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죽계지》에서는 여러 안씨(安氏)들의 사적(事蹟)을 주로 넣고, <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가곡(歌曲)ㆍ속상기(俗尙記) 같은 것과 서원(書院) 에 관련된 기사는 잡록(雜錄)으로 정리하여 그 뒤에 붙이고, 다시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곧고 조리가 분명할 것입니다. 책이 무리하게 합편(合編)되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 도(道)가 폐단 없이 전승되어, 전술(傳述)하고 옛것을 좋아하는 도(道)에 거의 가깝게 되리라 여깁니다.
만약 “옛것에서 증빙하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하여, 반드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는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려 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이 할 것은 단지 옛사람에게서 법을 취할 뿐이며 옳고 그름의 분별은 자연히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문정공(文貞公)의 <주리곡(珠履曲)>ㆍ<고양곡(高陽曲)>은 한 때 희학(戲謔)에서 나온 것으로서 후세에 영송(詠誦) 할 만한 것은 아니며 이는 선생께서 이미 평(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현(聖賢)의 격언을 번안(飜案)하여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유유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시가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이 있으며, 호연(浩然)히 천리가 유행하는 묘미가 있으니, 역시 조예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옛것을 번안했다 하나 자신이 지은 사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역시 이 《죽계지》에 함께 편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계곡(竹溪曲)>을 삭제하여, 별록(別錄) 및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대저 자신에게 조금의 착오도 없으면 한때의 비난이 있더라도 마침내 후세에 그 시비가 정(定)해지겠지만,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함이 있으면 비난의 구실이 되기에 족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전(傳)함이 멀지 못하고, 전함이 멀지 못하면 도(道)가 밝아질 수 없으니, 군자가 가르침을 세우고 교훈을 전하는 일에서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않겠습니까.
아, 죽계의 사당은 오랫동안 가려졌던 회헌 선생의 도(道)를 빛내기에 충분한 것이고, 또한 선생의 뜻이 회암의 도(道)에 부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의 도가 이를 통하여 더욱 밝아지고 또한 후세에 끝없이 성인이 나올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계지》는 모두 온당하게 편집되지만은 않은 듯하며, 이것이 제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서 보면 소견이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외부의 논란이 있더라도 기필코 선입견으로 주장하고 허심탄회하게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고명하신 선생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생께서 홀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저 같은 아랫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점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울리면서도 뇌동하지 않는 것[和而不同]은 군자의 논의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을 털어 아뢰었으니 재단(裁斷)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가를 보아 계당(溪堂)에서 뵙고 다시 질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서 卷1 行錄後, 附黃學正俊良書》
하였다.
퇴계와 황준량의 편지에서 거론한 문제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초록한 위학(爲學)ㆍ입교(立敎) 대다수는 혼란하고 두서가 없다.
2. 죽계(竹溪)는 안씨의 세거지이므로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하면 되겠지만, 회암의 글을 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한 것은 억지스럽다.
3. 주자의 글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의 명언(名言)을 뽑아내어 ‘주서(朱書)’라 표제하여, 서원에서 별도로 간행하여 회헌을 탐구하는 자료로 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문정공(文貞公)의 <죽계별곡>은 빼는 것이 좋고, 별록(別錄)과 <엄연가(儼然歌)> 등의 시가와 함께 일단 두었다가 다른 사람의 취사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이와 같은 이의에 대하여 주세붕은 황준량에게 편지를 보내어 설명하였는데, 결론적으로 “《죽계지》를 가지고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도 천명이고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또한 천명이다. [其知我者命也 其罪我者亦命也]”라고 하여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편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논평한 《죽계지(竹溪志)》는 의도한 뜻이 달리 있었기에 감히 숨김없이 모두 말하겠습니다. 그 책의 성격이 원래 증자(曾子)의 《대학(大學)》, 자사(子思)의 《중용(中庸)》, 《맹자(孟子)》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실로 회옹(晦翁)이 평생토록 우리 도(道)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은 매우 대단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세에 질투하는 자들이 오히려 위학(僞學)이라 지목하여, 기필코 전멸시킨 뒤에야 마음에 시원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헌(晦軒)이 백세(百世) 후에 그를 존숭하고 공경하여 부모처럼 애모하고 떠받들었습니다.
아, 이 마음이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앞으로 올 학자를 개도(開導)하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생민을 위하여 최고의 준칙을 세우기에 충분하고, 이 마음이 만세를 위하여 태평(泰平)을 열기에 충분합니다.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주자(朱子)의 도(道)가 동방으로 계승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계(竹溪)에 묘원(廟院)을 세우고 전답과 서적을 마련하면서 세속의 비웃음과 모욕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안씨(安氏)의 행록(行錄)을 만들고 나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주자(朱子)가 쓴 전현(前賢)의 묘정(廟亭)ㆍ당실(堂室)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존현록(尊賢錄)>이라 제목을 붙이고, 학전(學田)과 장서(藏書)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또 잡록(雜錄)을 만들어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와 평생의 시가(詩歌) 및 좋은 말 가운데서 쇠퇴한 풍속을 두텁게 할 만한 것을 잡다하게 발췌하여 기록하였는데, 이는 지금에 내가 죽계(竹溪)에다 묘원(廟院)을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장서(藏書)를 한 목적이 모두 주자가 숭상하던 것에서 나왔고 주자의 말이 모두 만세에 걸쳐 학자들의 대법(大法)이 된다는 점을 나타낸 것입니다. 회옹의 학문을 현양(顯揚)하고 회헌의 뜻을 발현한 것은 실로 회옹을 높이는 것이지 회옹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며, 실로 사특한 말을 멀리 하기 위함이지 비난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별록(別錄)을 만들어 위로 공자ㆍ안자(顔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로부터 두 정자(程子)와 주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했으니, 그 논설은 모두 사욕(邪慾)을 몰아내고 정리(正理)를 보존하며, 사도(斯道)를 붙들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편(篇)을 종합하여 《죽계지(竹溪志)》라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공자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정자ㆍ주자를 회헌에게 굴복시키기 위함이겠습니까. 세상의 도의가 날로 낮아지고 있기에 내가 회헌에 대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죽계지》를 만들면서 오로지 회옹(晦翁)을 주로 했습니다. 이는 바르게 한 것이지 왜곡한 것이 아니며, 신장하기 위함이었지 굽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자(夫子)가 노나라 역사[춘추(春秋]에 가탁(假託)해서 천하를 포폄하였는데, 그때에는 이미 참람함이라는 것은 잊었던 것입니다. 내가 《죽계지》에서 회옹의 요긴한 종지(宗旨)를 현양하여 여러 벗들을 위해 기치(旗幟)를 세운 것은 회헌이 흠모한 바가 여기에 있었음을 밝힌 것일 뿐입니다. 《죽계지》를 가지고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도 천명이고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또한 천명입니다. 실로 부득이한 점이 있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귀하(貴下)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쓴 여러 편의 시가는 내 스스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옛 성현들의 격언을 번안한 것입니다. 또 문정공(文貞公)의 이른바 <별곡(別曲)>의 문제점을 약간 보완하여 서원의 여러 분들에게 주어 바람을 쏘이며 시를 읊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로 한 마디라도 나의 사사로운 뜻으로 억지로 맞춘 것이 있다면 비록 비난을 받아도 좋지만, 성현의 격언을 번안했으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정녕 허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곧 성현을 허물하는 것이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의 가악(歌樂)이라는 것은 흔히 음란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며, 쌍화점(雙花店)ㆍ청가(淸歌) 등속은 모두 사람을 악한 곳으로 유도합니다. 이것들이 어떠한 말들입니까? 풍속이 날로 저급한 데로 나아가게 하며, 그것은 음란하고 도리에 어긋나 차마 듣지 못할 내용입니다. 부자(夫子)가 다시 살아나신다면 이런 가악들이 추방 대상에 들지 않겠습니까. 실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주(周)나라 시대에는 이남(二南)과 정아(正雅)를 나라 행사에 사용하였고, 삼송(三頌)을 종묘(宗廟)에 사용하였으며, 비록 변아(變雅)라 하더라도 역시 빈객을 대접하는 자리에 쓴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정(鄭)ㆍ위(衛)의 음란한 음악을 연주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회옹이 강력히 주장하고 극진하게 논(論)한 것으로, 내가 안타깝게 여기고 다급하게 여겨 그 사특함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부자(夫子)는 큰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를 통하여 전술(傳述)과 창작(創作)을 겸했습니다. 저의 시가 같은 것은 모두 전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 자신이 지은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지극히 선(善)하고 지극히 축약된 성현의 요지에서 나왔습니다. 몸을 닦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 무슨 혐오스러운 점이 있어서 느닷없이 삭제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거(仲擧)가 논한 것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여깁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 남이 나를 보는 것만 못할 것이며, 익숙히 따져 보면 반드시 그 중정(中正)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달 밝은 날 한 번 와서 다시 토론하여 바른 데로 귀결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본서 卷1 行錄後, 答黃仲擧書》
하였다.
위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안씨(安氏)의 행록(行錄)을 만들고 주위의 비난이 염려되어 다시 주자(朱子)의 글을 취하여 <존현록(尊賢錄)>을 만들었고, 학전(學田)ㆍ장서(藏書)에 관한 기록을 취하여 각각 <학전록>ㆍ<장서록>이라 하였다.
2. 잡록(雜錄)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고사와, 주자의 시가(詩歌) 및 좋은 말을 넣은 것은 묘원(廟院)을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장서(藏書)를 한 것이 주자가 숭상하던 것에서 나왔고 주자의 말이 학자들의 대법(大法)이 된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주자를 높이는 것이지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3. 별록(別錄)을 만들어 위로 공자ㆍ안자(顔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로부터 두 정자(程子)와 주자 등 성현의 말을 기록했으니, 그 논설은 모두 사욕(邪慾)을 몰아내고 정리(正理)를 보존하며, 사도(斯道)를 부지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4. <죽계별곡>은 성현의 격언을 번안한 가사로, 문제점을 약간 보완하여 서원 산수 속에서 시가를 읊는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뜻인데, 무슨 혐오스러운 점이 있어 삭제하겠는가.
논란의 일단을 살펴보면, 퇴계와 금계는 엄격하고 세밀한 기준으로 《죽계지》 편찬 체제를 살핀 경향이 있고 신재는 대국적인 취지를 주장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죽계지》의 편찬 체제가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책 명칭에서도 주세붕은 ‘죽계(竹溪)’의 의미를 백운동서원을 넓게 포괄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지만 ‘죽계(竹溪)=순흥안씨(順興安氏)’라는 좁은 의미로 보면 충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황준량이 “죽계는 안씨의 세거지이므로 안씨들의 저술을 모아 《죽계지》라고 하면 되겠지만 회암의 글을 넣어 아울러 《죽계지》라고 한 것은 억지스럽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책명을 《白雲洞志》 정도로 하였더라면 비판의 여지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관의 소임을 동시에 수행한 2년 정도의 짧은 시간, 경제적인 어려움, 주위의 비판 여론 등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서원을 창건하고 짧은 기간에 그 이념을 담은 책을 치밀하게 편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주세붕은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도, 주자와 회헌의 학문과 교육 이념을 천명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죽계지 편찬이 주자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것이라는 뜻을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편집ㆍ간행을 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4. 편찬 및 간행 시기

신재 주세붕은 《죽계지》를 편찬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안향의 후손 안위(安瑋)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읽고서 문성공(文成公) 본전(本傳)과 문정공(文貞公)ㆍ문경공(文敬公) 두 분의 전기를 찾아내고, 또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비명(碑銘)과 묘지(墓誌) 및 서로 전송할 때 준 서문을 참고하여, 순흥의 역대 연원을 매우 자세하게 알았습니다. 다만 문성공 묘지가 그 책 속에 선입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문ㆍ비명ㆍ묘지명에서 여러 안씨들에 대하여 반드시 문성공을 거론하였고, 문정공에 대하여는 또 ‘족손(族孫)’이라 하였으니, 계파는 다르지만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이러한 글을 한 권으로 가려 뽑았습니다.”
하였다.
이 편지를 쓴 시기가 서원을 세운 직후로 보이는 바, 주세붕은 사당과 서원 설립을 계획하면서 이미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행 시기에 대하여는 현재 확증할 자료가 없다. 그 이유는 초간본으로 단정할 수 있는 간본이 전해진 것이 없고, 후쇄본과 중간 형태의 이본은 내용의 가감은 물론 보각 보판이 여러 차례 이루어져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단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고려대학교 소장본의 편집 상태를 가지고 간행 시기를 살펴본다.
1. 주세붕의 서문 저작 시기가 1544년(중종39) 10월인 점.
2. 1545년(인종1) 5월에 지어진 <문성공묘기>가 들어있는 점.
3. 1545년(인종1) 11월 주세붕이 성균관 사성이 되어 이임한 점.
4. 후쇄본에는 보각판의 형태로 들어있는 1549년(명종4) 12월 저작의 이황 편지와 1550년(명종5) 4월 신광한 저작 <소수서원기>가 들어있지 않은 점.
위 사항을 가지고 추정하면, 편찬 시기는 성세창의 <문성공묘기>가 지어진 1545년 5월 이후 주세붕이 이임한 11월 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시 편간 방식을 두고 비판 여론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주세붕이 이임한 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이 그 제자 박택지(朴澤之 박운(朴雲))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년에 상산(商山) 주경유(周景遊)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죽계지》를 편찬하였는데, 끝내고 나서 곧바로 간행하였다.”
라고 한 것도 주세붕이 서문을 쓴 직후 재임 중에 간행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奎1360-7A, 1-3)에는 말미에 1548년(명종3) 봄에 쓴 경재(敬齋) 이기(李芑)의 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계지 발
그 사람의 저서를 읽으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내가 <문성공전>을 읽어보니 그의 마음이 회옹(晦翁)을 사모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과연 회옹에 짝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경유(景遊)가 운운한 것은 고을의 선생 중에 도가 있는 이를 들어 주자의 학문에 의지하여 후진을 교육하여 덕을 이루게 하려고 한 것이니, 그 마음이 어찌 문성공에게 뒤지겠는가. 내가 경유가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건립하고 학전을 설치하고 서적을 수장한 것을 보고서 편록한 여러 편의 글을 읽어보니 그 시설(施設)과 포치(布置)가 모두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참으로 체득한 것이 있지 않고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의 공은 문성공에게 짝할 만하고 참으로 주자(朱子)가 전한 것을 체득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로써 나는 백운동이 중국의 백록동과 같이 되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는다. 우리 유가의 선비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명나라 기원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 봄에 경재(敬齋) 쓰다.
竹溪志跋
讀其書而知其人。吾觀文成公傳。其心果慕晦翁爾。未知其學問果可追配晦翁不。景遊所以云云者。欲擧鄕先生之有道者。以寓朱子之學。誘掖後進。使之成德也。其心亦豈下於文成哉。吾觀立廟建院置田藏書。而讀錄諸篇。則施設布置。皆可師法。非有得者。能如是乎。可謂功配文成。而眞得朱子之傳者也。吾知白雲洞未必不爲白鹿洞。吾黨之士其勉焉。皇明紀元嘉靖戊申之春。敬齋題。
위 글에서 간행 시기 추정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다만 저작 시기인 1548년을 《죽계지》의 간행 시기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글이 간입된 규장각 소장본도 인면(印面) 상태가 좋지 못하여 쇄출 시기가 고려대학교 소장본보다 훨씬 뒤지고 판각의 형태와 글씨체도 본문과 현저한 차이가 있어 초간 이후 보각판으로 추정되는 바, 발문의 저작 시기를 가지고 간행 시기로 보는 것도 단언하기 어렵다. 특히 발문 저자인 이기(李芑)는 1545년 을사사화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의 중심인물로서 1548년을 전후하여 병조판서ㆍ좌의정ㆍ영의정을 지냈다가 후일 관작이 삭탈되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력 때문에 그가 지은 발문이 《죽계지》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시점에 간입되고 삭제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죽계지》의 간행 시기는 고려대학교 소장본의 편집 상태를 기준으로 1548년의 이기(李芑)의 발문, 1549년 이황의 <上監司沈公書>와 1550년의 신광한의 <紹修書院記>가 저작되기 전인 1545년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Ⅱ. 체제와 내용

1. 초간본

대상본으로 추정한 고려대학교 소장본(晩松 貴重書228)을 가지고 살펴본다. 이 본은 전체적으로 보각판이 보이지 않고, 후쇄본에 추입된 퇴계 이황의 <上監司沈公書 1549>와 신광한(申光漢)의 <白雲洞紹修書院記 1550>가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이 본이 신재 주세붕이 최초로 편차한 형태를 유지한 초간본으로 볼 수 있다.
권수 : 1544년 10월에 지은 주세붕의 서문과 1545년 5월에 지은 성세창(成世昌)의 <白雲洞文成公廟記>가 실려 있다.
권1 : 권제(卷題)는 「安氏行錄」이다. 안향(安珦)의 <文成公傳>, 안축(安軸)의 <文貞公傳>과 묘지명, 안보(安輔)의 묘지명, 안축 후손인 안경공(安景恭)ㆍ안종원(安宗源)ㆍ안순(安純)의 묘지명, 안축이 지은 <鳳捿樓重營記>ㆍ<竹溪別曲> 등 시문 4편, 안축에 대한 전송시 서문 4편 등을 편차하였다. 전체적으로 소수서원의 주벽인 안향을 중심으로 행력이 뛰어난 안씨 관련 인물의 전기와 문헌을 실어 제향(祭享)의 객관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향의 시(詩)에 대하여는 서문에서 전문 인용하면서 여기에서는 싣지 않은 것이 특이한 점으로 보인다.
뒤에 「行錄後」 표제 하에 원우(院宇) 설립과 운영에 관한 축제문(祝祭文) 5편, 편지 6편, 가사 7편, <祭式> 3편, 발 1편 등이 실려 있다.
권2 : 권제는 「尊賢錄」이다. 주희(朱熹)가 지은 송대 유학자의 사당 기문, 정자와 당실(堂室)의 기문이 편차되어 있다.
권3 : 권제는 「學田錄」이다. 주희가 지은 <建寧府崇安縣學田記>ㆍ<衡州石鼓書院記>ㆍ<玉山劉氏義學記>와 함께 말미에 백운동서원 학전의 소재지와 규모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권4 : 권제는 「藏書錄」이다. 주희가 지은 <徽州婺源縣學藏書閣記>ㆍ<建寧府建陽縣學藏書記>ㆍ<同安縣學經史閣上梁文>ㆍ<刊四經成告先聖文>ㆍ<跋白鹿洞所藏漢書>가 수록되었다. 말미에 <白雲洞書院藏書> 표제 하에 장서 서목과 수량을 기술하였다.
권5 : 권제는 「雜錄」이다.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중수하면서 지은 <白鹿洞牒> 등 시문 14편과, 각종 시(詩)ㆍ명(銘)ㆍ찬(贊) 등 47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은 주로 유학의 기본적인 명제와 관련된 것을 발췌하였고, 특히 주렴계와 정명도 등의 화상찬을 수록하여 선사에 대한 주자 존모의 일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후쇄본에서는 뒤에 「雜錄後」 표제 하에 <白雲洞致敬說>ㆍ<院規>ㆍ<白雲洞次朱文公白鹿洞賦>ㆍ<豊基俗尙記>ㆍ<豐基古跡記>ㆍ<豐基移建學校記>가 실려 있는데 이 본에는 실려있지 않다. 인출 또는 결책 상태에서 빠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권6 : 권제는 「別錄」이고 <爲學>ㆍ<立敎>ㆍ<闢邪> 세 단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로 사서(四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의 구절을 발췌하여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다. 말미에 표제 없이 도통의 변천과 별록을 편집하게 된 취지를 밝힌 주세붕의 글이 있다.
권말 : 간략한 간기(刊記)로서 「刻手 〇〇 李訥孫. 校正 貢生 安弘業. 書寫 記官 安忠年.」이 있다. 이눌손(李訥孫)과 안충년(安忠年)은 전기가 확인되지 않고 안홍업(安弘業)은 안향의 후손 1명(安弘業 1510~1561)과 안축의 후손 1명(安弘業 1592~1653) 이 《순흥안씨족보》에 나타나는데, 초간 상황과 연계하면 전자로 볼 수 있다. 이 간기는 현존 후쇄본과 중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판목의 글자가 마멸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로 추정된다.

2. 중간본

가. 목판 중간(후쇄)본
1968년 5월에 안향의 후손 소수서원 도감 안승규(安承奎)와 안축의 후손 별유사(別有司) 안동준(安東濬)의 주관으로 보각(補刻)ㆍ인출되었다. 글씨와 양식이 다른 보각판이 많이 섞여 있으며, 부분적으로 마멸된 것을 보각하지 않은 판도 보인다. 따라서 중간본이라 하기 보다는 ‘보각본(補刻本)’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체제는 초간본과 대동소이하다. 초간본과 다른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초간본에서 권1 「安氏行錄」에 편차되었던 <白雲洞文成公廟記>가 「行錄後」말미로 이동되었다.
「行錄後」말미에 <白雲洞文成公廟記>ㆍ<上監司沈公書>가 추가되었다.
권5 「雜錄」 뒤에 새로이 「雜錄後」 표제 하에 <【白雲洞致敬說)】>ㆍ<【院規)】>ㆍ<白雲洞次朱文公白鹿洞賦>ㆍ<豊基俗尙記>ㆍ<豐基古跡記>ㆍ<豐基移建學校記>를 수록하였다.
권말에 초간본의 간기(刊記)는 없고, 안승규의 <重刊識>와 안동준의 <跋>이 추가되었다.

나. 활판 중간본
1980년에 안향의 후손 안용호(安龍鎬)가 후쇄본을 가지고 교감 편차하고 구두를 가하여 안상홍(安商洪)ㆍ안석준(安碩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전체적인 체제와 내용은 목판 후쇄본과 거의 같으므로 특이한 점만 살펴본다.
권수에 편자인 안용호의 서문이 있다. 후쇄본에서 「行錄後」에 편차되었던 <白雲洞文成公廟記>를 초간본과 같이 권수로 환원하였다.
권1 「安氏行錄」에서 <文成公傳> 뒤에 <諭國子諸生文>을 추가하였다.
권말에 안상홍(安商洪)의 발문이 있다.

다. 목활자 3권 1책본A
1884년경 성균관 유생 박긍수(朴兢壽), 본손 안명렬(安明烈) 등이 관학본 《회헌실기》를 간행할 때 6권 3책본을 가지고 산정(刪定)하여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간행 사실에 대하여 권말에 수록된 안병렬(安昞烈)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지금에 회헌실기를 간행하게 되었는데, 종친 형순(亨淳)과 나의 형님이 한 책으로 줄여 실기 뒤에 첨부하고 나에게 발문을 쓰라고 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쓰게 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21) 중하에 회헌선생 20대손 병렬 삼가 쓰다. [今者。晦軒實記之刊出也。宗人亨淳甫與舍伯。刪爲一冊。附于實記後。謂余識之。不敢辭書。歲甲申仲夏。晦軒先生二十代孫昞烈謹識。]”
체제는 권차가 축소되면서 6권 3책본과는 매우 다르게 편차되었다. 전체적으로 수록내용이 대폭 축소되었는데, 특히 6권 3책본의 권2에 수록된 소수서원 설립 과정의 글과 권5에 수록된 주희(朱熹)의 시(詩) 등은 거의 제외되었다.
권1에 <四賢井碑陰記>ㆍ<文懿公傳>이 추가되었고, <文成公傳>은 실기에 실려 있다는 주기를 하고 내용은 싣지 않았다. 권말에 안병렬(安昞烈)이 1884년에 지은 발문과 간행을 주관한 인명록이 실려 있다.

라. 목활자 3권 1책본B
서발이 없어 간행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위의 A본과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위 본이 간행된 이후에 약간의 가감을 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말에 <白雲洞致敬說>을 싣고 <竹溪志跋>이라는 제목을 부여하였다.

마. 목판 5권 1책본
1909년에 진주(晉州) 연산(硯山)에서 영남의 선비 이도묵(李道黙)과 본손 안효진(安孝鎭) 등이 목판으로 연산본 《회헌실기》를 간행할 때 동시에 간행한 본이다. 이에 대하여는 1909년에 쓴 발문에서,
“영남의 여러 일가들이 문성공 실기를 간행하는 날 논의하기를 ‘문성공의 도통은 주자에 접하고 문성공은 주자를 존경ㆍ흠모하였다. 지금에 문성공의 진상을 책 속에 모시면서 주자의 진상도 같이 모신다면 인정과 의리가 극진한 것이 아니겠는가.’하였고, 이에 대하여 이의가 없어 편차하였다. [而今玆嶠南僉宗氏。文成公實記刊行之日。議曰。文成公之道統接乎朱子。文成公之敬慕存乎朱子。今當文成公眞像奉安于卷中而朱夫子眞像同爲奉安于卷中。則情之宜義之盡。不亦可乎。咸無異辭。方擬編次云矣。]”
하였다. 대체적인 편차는 목활자본과 유사하나 내용은 더 축소되었다. 이본은 《회헌실기》와 같이 간행하면서 주희와 안향의 진상을 넣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Share: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