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9일 월요일

先秦文學➀緒論

1. 중국문학의 원류
원고시기의 가요와 신화전설의 기록을 통해 중국문학 원류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 바, 신농시기에 출현했다는 《蠟辭》는 당시의 농경과 제사문화의 일면을 반영한다.

《伊耆氏蠟辭》

  土反其宅!흙아 그 쌓인 곳으로 돌아가고,
  水歸其壑!물아 그 골짜기로 돌아가라.
  昆蟲毋作!곤충들아 일어나지 말고,
  草木歸其澤!초목이여 그 습지로 돌아갈진저.

이 밖에도 《擊壤歌》、《康衢謠》、《卿雲歌》、《堯戒》、《賡歌》 、《南風歌》 등의 고대가요는 비록 후인들의 위탁이지만, 질박하고 단순한 고대의 사상을 어느정도 보존하고 있다. <오월춘추>에 실린 《彈歌》:「斷竹,續竹;飛土,逐宍(肉)。」 또한 원시인의 수렵과 무기제조의 일면을 반영하는 기록이다.

갑골문과 청동기문의 출현. 은상 후기에 이르기까지 명문과 복사의 형식과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서주시기부터 춘추시기까지 비교적 길 종정명문이 출현하며 그 안에는 문학적 요소를 지닌 텍스트도 출현하게 된다.

시가는 가장 오래된 문학형식 중 하나로 중국 최초의 시가는 음악, 춤이 결합한 형태로 드러난다.  《呂氏春秋•古樂》에는 이런 기록이 보인다. 『昔葛天氏之樂,三人操牛尾,投足以歌八闕:一曰載民,二曰玄鳥,三曰遂草木,四曰奮五穀,五曰敬天常,六曰建帝功,七曰依地德,八曰總禽獸之極』 이런 간단한 기록과 악곡명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이 악곡과 춤의 대강을 추측해볼 수 있다. 《尚書》<익직>편에도 <대소大韶> 라는 고대의 가요의 연주 상황이 실려있다. 『夔曰:「戛擊鳴球、搏拊、琴、瑟、以詠。」祖考來格,虞賓在位,群后德讓。下管鼗鼓,合止柷敔,笙鏞以閒。鳥獸蹌蹌;《簫韶》九成,鳳皇來儀。夔曰:「於!予擊石拊石,百獸率舞,庶尹允諧。」』 좌전 양공29년에 오공자 계찰이 <대소>의 연주를 보고는 「德至矣哉!大矣!如天之無不幬也,如地之無不載也。雖甚盛德,其蔑以加於此矣,觀止矣!若有他樂,吾不敢請已!」라고 평했으며, <논어><팔일>편에서도 공자는 진선진미로 <소>를 평했다. 예기 악기편에서도 「詩言其志也。歌詠其聲也,舞動其容也。」이라는 구절등은 시, 악, 무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염두에 둔 기사들이다. 시경 속의 시들도 기실 노래말들인데 그 중에 송은 제사용 가무시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춘추시기 이후에 이런 시가는 악무로부터 분리 독립되어 문학적, 운율적 방향을 발전하게 된다.


2. 선진문학의 형태
선진시기의 문학은 순문학이라기 보다는 사학과 철학의 저작들을 포함한다. 춘추시기 초나라나의 무축은 사관의 관직을 겸했으며 <태사공자서>에서는 남정과 북정이 천문과 제사를 겸했고, 당우로부터 하상에 이르자 重、黎의 후손들이 이를 잇다가 주선왕 때에 사마씨로 통합됨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서><홍범>편에서 상대에 이미 오행 사상의 체계가 형성됨을 알 수 있고, 주초에 편집된 역의 괘효사에는 음양의 관념이 구비되어 있다.

선진시가의 발전과정은 종교적 송양시에서 정치서사시로 다시 言之抒情의 시가로 발전 변화한다.

초나라의 청동기출현인 중원지역보다 늦지만, 철기의 보급은 중원보다 앞선다. 그리고 이러한 철기를 내세운 강대한 국가형성과 문화는 초사같은 문학작품을 배태하는 경제적 토대(하부구조)를 형성한다. 「依《詩》取興,引類譬喻」


3. 선진문학작가의 변화발전
하상시대와 서주초기의 문화적 담지군은 무축巫祝、무격巫覡이 중심이다. 예기 표기편에서는「殷人尊神,率民以事神,先鬼而後禮。周人尊禮尚施,事鬼神而遠之,近人而忠焉。」라하여 은주의 차이에 대해 구분하고 있다. 앞서 말한 《蠟辭》 또한 상고부터 유전되어오던 액막이와 기복문화가 반영되었다.

史의 지위도 종교적 성격으로부터 점차 분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서의 반경편, 고종융일, 서백, 미자 편달은 사가가 인사, 천문, 전장제도를 기록하는 직무를 담당한 결과들이다. 춘추시기에는 각 제후국에 각자의 사관과 사서를 배치, 역사 서술의 통일에서 분화의 여정을 반영한다.

서주시기에 학술은 관부에서 주관했다. (學在官府) 주례 지관편에서 소개하는 육예는 모두 귀족 자제를 중심으로 연마 기술되었다. 평민들의 가요와 천자가 친청하는 노래 사이에 귀족들 나름대로 헌시, 채시하는 과정이 삽입되어 있드며 매개작용을 한다. 국어 주어편에 為民者宣之使言。 故天子聽政,使公卿至於列士獻詩,瞽獻典,史獻書,師箴,瞍賦, 矇誦,百工諫,庶人傳語,近臣盡規,親戚補察,瞽史教誨,耆艾修之, 而後王斟酌焉,是以事行而不悖。

봉건제의 약화와 종법제도의 쇠락은 귀족제의 근간이 흔들리며 士의 출현을 촉진한다. 이는 관학이 사학으로 점차 대체되며 문화지식이 귀족에서 사로 다시 평민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된다. 제후국들은 기존의 귀족제를 유지하면서도 부국강병을 위해 사 집단을 동시에 수용한다. 이들은 저서와 입설을 통해 새로운 정치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통치 패러다음을 구축하기 위해 발분한다. 이는 전국시기의 제자백가들의 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4. 선진문화와 문학발전
왕국유는 <은주제도론>에서 하상의 문화가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以地理言之,則虞夏商皆居東土,周獨起於西方,故夏商二代文化略同。〈洪範〉九疇,帝之所以錫禹者,而箕子傳之矣。夏之季世,若胤甲、若孔甲、若履癸,始以日為名,而殷人承之矣。(《观堂林集》卷十)

하상 문화의 기저에는 원시종교라는 공통요소가 깔려있다. 이들은 모두 무축문화로 대표되는 원시종교와 밀접한 상관 관계를 이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음은 도산씨의 <후인가>에서 동음은 하날 공갑의 <파부가>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하상 시대에 이미 완정한 현태의 시가가 출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사>중에서 하나라 계에 대해 언급한 <구가> 도한 하나라때부터 유전된 가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데, <산해경><대황서경>편에서도 <구가>와 계의 관계, 제천 의식등의 요소를 설명하는 단락이 보인다.

<상서>에 수록된 <우공>과 <감세>편 등도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라 때의 유문이다. 그러나 <우공>에서 말하는 구주의 개념은 하나라 때는 없던 것으로 후인(주나라)의 위탁이나 보충으로 여겨진다. 상나라 때의 글로는 <반경>이 믿을만한 은나라 사람들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반경이 천도를 실행할 때 말한 훈사가 주 내용으로 그 문자가 고졸하고 심오하다.

서주시기의 예악 제도와 정신은 원시 무축문화로부터 분화 발전한 결과다. 예악제도의 목적은 종법제의 유지와 사회질서 구축인데 그 핵심은 덕, 인 과 같은 정치윤리적 관념, 가치개념들로 형성된다. 주대의 문화를 기초하고 형성 발전시키는 지식인들은 神道設教의 방법을 통해 원시적 문화를 초월 극복한 이성적 문화를 건설한다. 왕국유의 말을 빌리면,

殷周之间的大变革,从表面上看, 不过是一姓一家的兴亡和都城的转移;但从深处来说,则是旧制度的废弃和新制度的兴起,旧文化的废弃和新文化的兴起。(《观堂林集》卷十)

주대의 문화가 역사와 사회, 인생의 문제, 현실문제 등을 주요문제로 다루는 반면, 신령이 인간 행동의 준거이자 동력이라는 전세대의 사고방식은 차츰 약화되거나 대체되었다. 주대의 역사의식은 구체적 인사로부터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도출해내려 시도했고, 이에 따라 사관이 가지는 종교적 색채는 사라지고 지식적 실무적 색채가 부각된다. <주서>에 보이는 誥、誓등도 현실적 정치 맥락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 <춘추>가 명분을 강조한다는 점(道名分), 유가의 敬德崇禮、尊王攘夷、固本保民등의 사상은 모두 현실적 정치 이상을 제시한다. 
迄於後世, 智識日增, 知鬼神之事渺託無憑, 不如人事之爲重. 於是史盛. 而巫衰, 是僅以巫爲治病求福之用. 洎於周末, 巫之道亦幾乎息矣.(江瑔 의 《讀子卮言》<論諸子之淵源>)

이후 문장은 전국시기에 이르러 완비되고 사상의 경향도 다양화된다. 청대 장학성은 상고시기 문장의 변혁과 발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周衰文弊,六藝道息,而諸子爭鳴。蓋至戰國而文章之變盡,至戰國而著述之事專,至戰國而後世之文體備。故論文於戰國,而升降盛衰之故可知也。(《文史通義》<詩教上>)



5.補遺
문자의 기원에 관하여 <역> <계사하전>에는 結繩문자를 말하고 있고, <순자>, <여씨춘추>, <한비자>등은 창힐의 조자설을 말하며, 鄭樵《通志》<六藝略>편에서는 八卦를 기원으로 보고 있다.


전국시기의 변화 양상에 관하여 왕부지의 <독통감론><서론>에선 「古今一大變革之會」라 말했으며, 顧炎武의 <일지록><周末風俗>에선 春秋시기와 戰國시기의 차이점을 나열하여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春秋終於敬王三十九年庚申之歲,西狩獲麟。又十四年,爲貞定王元年癸酉之歲,魯哀公出奔。二年,卒於有山氏。《左傳》以是終焉。又六十五年,威烈王二十三年戊寅之歲,初命晉大夫魏斯、趙籍、韓虔諸侯。又一十七年,安王十六年乙未之歲,初命齊大夫田和諸侯。又五十二年,顯王三十五年丁亥之歲,六國以次稱王,蘇秦從長。自此之後,事乃可得而紀。自左傳之終以至此,凡一百三十三年,史文闕軼,考古者之茫昧。如春秋時,猶尊禮重信,而七國則絕不言禮與信矣。春秋時,猶宗周王,而七國則絕不言王矣。【原註】史記秦本紀,孝公使公子少官率師會諸侯於逢澤以朝王。蓋顯王時。春秋時,猶嚴祭祀,重聘享,而七國則無其事矣。春秋時,猶論宗姓氏族,而七國則無一言及之矣。春秋時,猶宴會賦詩,而七國則不聞矣。春秋時,猶有赴告策書,而七國則無有矣。邦無定交,士無定主,此皆變於一百三十三年之間。史之闕文,而後人可以意推者也。不待始皇之並天下,而文武之道盡矣。【原註】李康《運命論》云,文薄之弊,漸于靈、景。辨詐之僞,成於七國。馴至西漢,此風未改,故劉向謂其承千歲之衰周,繼暴秦之餘弊,貪饕險詖,不閑義理。觀夫史之所錄,無非功名勢利之人,筆札喉舌之輩,而如董生之言正誼明道者不一二見也。蓋自春秋之後,至東京,而其風俗稍復乎古,吾是以知光武明章果有變齊至魯之功,而惜其未純乎道也。自斯以降,則宋慶曆、元祐之間爲優矣。嗟乎,論世而不考其風俗,無以明人主之功。余之所以斥周末而進東京,亦春秋之意也。


韋昭《國語解》<序>에는 좌전을 춘추내전으로 국어를 춘추외전으로 보았다. 좌전과 국어는 모두 춘추를 계승하는 각도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山海經》<大荒西經>편에는 하나라 계가 인신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곽박의 주의 의하면 嬪은 미녀를 하늘에 바치는 것이다.  「西南海之外,赤水之南,流沙之西,有人珥兩青蛇,乘兩龍,名曰夏後開。開上三嬪於天,得《九辯》與《九歌》以下。此天穆之野,高二千仞。開焉得始歌《九招》。」이에 의하면 초사의 구변과 구가는 기본적으로 하늘에 드리는 제사용 노래들이다. 

《左傳》<昭公十五年>:「昔而高祖司晉之典籍,以為大正,故曰籍氏。女,司典之後也,何故忘之?」
집에서 전수되는 학문이 춘추시기에 이미 쇠미해지는 일단을 확인 가능

선진시기 士계층의 출현과 흥기에 관하여는 여영시의 《士与中国文化》참고

巫史에 관한 고찰은 서복관의 《兩漢思想史》참고

<주례>의 춘관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巫祝과 관련있어보인다.

상대에 왕은 정치적 수장이면서 동시에 무축의 우두머리다. 陳夢家의 《商代的神話與巫術》

Share: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