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장유의 계곡집(谿谷集)

2. 계곡(谿谷)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문학
1) 생애
저자 장유(張維)의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黙所)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며, 봉호(封號)는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이다. 계곡은 선조 20년(1587) 12월 25일 부친의 임소(任所)인 평안도 선천부(宣川府)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이조 판서ㆍ형조 판서 등을 지낸 장운익(張雲翼 1561~1599)이고,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박숭원(朴崇元 1532~1592)의 딸이다.
계곡은 7세 때부터 부친 슬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는데, 특히 암기를 잘하여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의 정문(正文)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암송하였다고 한다. 13세 때인 1599년 부친상을 당했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를 치렀다. 15세 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 나아가 《한서(漢書)》ㆍ《사기(史記)》를 배우고, 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아가 예(禮)를 배웠다. 16세 때에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문하에 나아가 한유(韓愈)의 글을 배웠는데, 오래지 않아 고문(古文)의 구조를 깨달았다. 그리고 《초사(楚辭)》ㆍ《문선(文選)》등을 읽었으며, 사부(詞賦)를 배웠다.
계곡은 19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고, 20세 때에는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이해에 《음부경해(陰符經解)》를 지었는데, 이 책은 《음부경》의 어구(語句)마다 주해를 붙인 것이다. 문집에 실린 음부경해서(陰符經解序)를 보건대, 도가적 시각으로 주해한 전대의 해석을 탐탁지 않게 여겨, 유학적 관점으로 새로 해석한 것인 듯하다. 《계곡만필》에 의하면, 계곡은 이 시기에 송대의 성리서를 두루 읽고 있었으니, 한창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빠져들던 시기에 저술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계곡은 23세 때인 1609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다. 이해 12월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갔다. 이 시기 그는 관각과시(館閣課試)에서도 고등으로 뽑혀 문장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는데, 진부하고 쓸데없는 말을 쓰지 않고, 당 나라 때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일으킨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법도를 따랐다. 이후 시강원 설서, 승정원 주서 등을 거쳐 25세 때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6세 때인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처남 황상(黃裳) 일가가 연루됨으로써 그도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 이 시기는 북인(北人)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몇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서인(西人)들이 조정에서 밀려나 있던 때이다. 이후 그는 12년간 경기도 안산(安山)에 은거하여 독서와 저술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풍부한 독서를 통해 정신적 깊이를 더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문장력을 튼튼하게 연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예문관 대교, 이조 좌랑 등을 거쳐 이조 정랑으로 승진되었으며,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公州)로 파천할 적에 왕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신풍군(新豐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또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扈從)하였고, 환도(還都)한 뒤에 이조 판서로 발탁되었다. 42세 때인 1628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ㆍ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였다. 1629년에는 대제학으로 나만갑(羅萬甲)의 유배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잇단 권유로 이듬해 다시 형조 판서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1631년에는 딸이 봉림대군(鳳林大君)과 가례(嘉禮)를 치렀다.
49세 때인 1635년에는 병으로 예조 판서를 사직하고 요양하면서,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계곡초고》26권을 만들었다. 이듬해 다시 공조 판서로 나아갔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고,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 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최명길 등이 환란을 수습하기 위해 계곡을 기복(起復)시켜야 한다고 아뢰어, 4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계곡은 모친상을 마치게 해 달라고 18차례나 애절하게 상소하여 끝내 인조의 윤허를 받았다. 이해 11월 인조가 장유ㆍ이경전(李慶全)ㆍ조희일(趙希逸)ㆍ이경석(李景奭)에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짓게 하였는데, 청 나라 범문정(范文程) 등이 이경석의 글을 택하였다.
계곡은 1637년 모친상을 당한 뒤로 신병이 더욱 심해져, 이듬해 3월 17일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해 6월 안산(安山) 월곡리(月谷里)에 장사 지냈고, 1655년(효종 6) 5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렸다.

2) 학문 성향
계곡의 학문적 특성은 한 마디로 박학다식함과 개방성에 있다. 《계곡집》의 서문을 쓴 박미(朴瀰)ㆍ이명한(李明漢) 등이 계곡의 학문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한결같이 경전과 성리서는 물론이고 제자백가 및 도가ㆍ불가ㆍ의복(醫卜)ㆍ풍수ㆍ천문ㆍ지리 등에 두루 통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계곡은 젊어서부터 폭넓은 독서를 했고, 그래서 그의 사상은 성리학적 사유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박학다식함과 개방적 성향은 그의 사유를 정주학적(程朱學的) 틀 속에 묶어 둘 수 없게 하였다. 그는 16세기 후반 퇴계(退溪)ㆍ율곡(栗谷) 이후로 학문이 정주학 일변도로 획일화되어 교조적 성향을 띄게 된 것을 황무지에 비유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씨를 뿌려 이삭이 패고 열매가 맺힌 뒤에야 오곡(五穀)과 피[稊稗]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서 무엇이 오곡이 되고 무엇이 피가 되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주장은 중국처럼 정주학ㆍ육왕학(陸王學)ㆍ선학(禪學)ㆍ단학(丹學) 등 모든 학문과 사상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나중에 그 진위를 가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개방적 성향은 틀에 갇힌 사고를 탈피하여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 사유를 낳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종조(祖宗朝)의 법이라는 점만 내세우며 변화를 거부하는 경직된 생각을 반대하고, 시세(時勢)와 인심에 맞는 변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를 희구하였다. 그가 청 나라의 침입 때 최명길 등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한 것도 이런 실리를 추구하고 변화를 인식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신의 좁은 소견만 믿고 사물의 변화와 역사의 진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명분론자들의 고루하고 국한된 사고를 우물 안의 개구리와 여름철 벌레에 비유하여 비판하였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장유는 당시 절대시되던 주자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그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신의 설을 내세웠다. 예컨대, 그는 《중용(中庸)》첫 장의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수(修)’를 ‘품절지(品節之)’로 ‘교(敎)’를 ‘예악형정지속(禮樂刑政之屬)’으로 보는 주자의 설에 반대하고, ‘수(修)’를 ‘수명(修明)’ㆍ‘수치(修治)’로, ‘교(敎)’를 ‘계구(戒懼)’ㆍ‘신독(愼獨)’으로 보았다. 또한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제5장은 ‘자왈도기불행의부(子曰道其不行矣夫)’ 8자가 1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계곡은 이를 제4장에 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학자들이 제기하였는데, 다산(茶山)의 《중용자잠(中庸自箴)》에도 계곡의 설과 같이 제5장을 제4장에 합해 놓고 있다. 그리고 계곡은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대해서도 주자가 국풍(國風)의 시를 음시(淫詩)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계곡은 선유의 정설(定說)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상당히 합리적이고 고증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자신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학문 태도는 당시 학자들이 이단(異端)으로 지목하던 양명학(陽明學)까지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갖게 하였다. 일부 학자들이 계곡의 학문 성향을 전적으로 양명학인 것인 양 논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 시대 양명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한 학자는 정제두(鄭齊斗)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계곡 등은 개방적인 학문 자세로 양명학까지도 자신의 학문 영역 안에 끌어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계곡의 학문은 정주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양명학ㆍ도가ㆍ불가 등의 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계곡의 학문에 대해, 정치적ㆍ학문적으로 노선을 같이 했던 송시열(宋時烈)ㆍ황경원(黃景源) 등은 계곡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미봉식으로 변론하며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서인이면서도 주자학적 사유 체계에 철저했던 사람들, 예컨대 이식(李植)ㆍ정홍명(鄭弘溟)ㆍ박세채(朴世采) 등은 계곡이 이단에 빠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동시대 계곡과 문명(文名)을 나란히 했던 이식은 그의 문집 잡저(雜著)에서 “장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일생 동안 지조를 지키고 살았다. 그의 학문은 박학하면서도 요약되니, 언뜻 보면 누가 그를 대유(大儒)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논의는 전적으로 육왕(陸王)을 위주로 하여, 선유들이 해석해 놓은 정설에 구절마다 이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불교의 학문이 비록 이단이기는 하지만 몸과 마음에 유익함이 있다면 공격해 배척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는 바로 내가 말하는 ‘배우지 않은 사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비록 훌륭하지만, 그의 설은 물리칠 만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이식의 언급은 기실 당색이 같지 않다면, 사문난적으로 몰아갈 만큼 비판적인 발언이다. 계곡의 학문에 대해, 양명학자로 보는 시각이나 노장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학자로 보는 시각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계곡은, 조선 성리학인 정주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틀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양명학ㆍ노장 사상ㆍ불교 사상 등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학문 자세를 가진 인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3) 문학 성향
계곡을 거론하면, 누구든지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즉 그는 조선 시대 뛰어난 문학가로, 시보다도 산문에 장점이 있던 문장가였다. 따라서 우리는 계곡을 논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계곡의 문학적 특성을 그의 문학관 내지 문학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한말 김택영(金澤榮)은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 가운데 장유ㆍ이식만을 여한구가(麗韓九家)에 넣고, 조선 시대 문장이 누추함을 벗고 전아한 데로 나아간 것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계곡집》의 서문을 쓴 김상헌(金尙憲)은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로 최치원(崔致遠)ㆍ이색(李穡)ㆍ김종직(金宗直)ㆍ최립(崔岦)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를 들면서, 그 뒤를 이어 계곡이 나왔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곡의 문장을 이색의 문장과 비교해, 그 규모는 이색만큼 크지는 못하지만 정치(精緻)함은 그보다 나으며, 문채(文彩)는 이색보다 약간 뒤지지만 이치(理致)를 드러낸 점은 더 치밀하다고 평하였다.
김상헌이 평한 것처럼, 계곡의 산문은 정밀하고 치밀하게 논지를 전개하였고 문채보다는 이치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계곡은 용졸당기(用拙堂記)에서 “문채[文]는 바탕[質]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여, 문채보다는 바탕, 즉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팔곡집서(八谷集序)에서 진한(秦漢) 이전의 박실(朴實)한 문장과 위진(魏晉) 이후의 부화(浮華)한 문장에 대해 논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근본을 무시하고 겉만 화려하게 수식하는 문장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한 이전의 고문이 박실한 이유를 ‘옛날 사람들은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여[敦本尙實] 마음속에서 얻어진 것이 발해 문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언표를 통해서, 우리는 계곡의 문학관이 부화한 수식이나 기교를 일삼는 것보다는 근본을 돈독히 하고 내실을 숭상하는 ‘돈본상실(敦本尙實)’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을 돈독히 한다[敦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계곡은 명 나라 때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학의 폐단이 근본을 충실히 하지 않고 말단만을 흉내 내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풍조는 조선에도 성행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팔곡집서에서 “옛날 문운이 성대하던 때의 문사를 다스리던 선비들은 모두 경술(經術)에 근원하여 이취(理趣)를 주로 삼았다.”고 하면서, 기이한 것만 일삼으려는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였다. 또한 논평자들의 말을 보면, 계곡의 문장은 경술에 근본하였다는 말이 한결같이 나온다. 예컨대, 이정귀(李廷龜)는 경연에서 “장모(張某)의 문장은 경학에서 얻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명한은 《계곡집》서문에서 “공의 문장은 육경에 근본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식도 서문에서 경전에만 근본하면 통속적인 데 가깝고 문사만을 일삼으면 배우와 유사하게 되는데 이 양자를 하나로 융합시킨 사람이 계곡이라 하였다.
이런 언급을 종합해 볼 때, 계곡이 주장한 ‘돈본’은 경학 또는 경술에 근본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학이 문학보다 우위에 있던 중세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있어, 근본을 돈독히 하는 문제는 곧 도(道)와 직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그 속에 도를 담아야 하고, 도를 담지 않으면 겉만 화려하게 수식한 부화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문학관은 ‘문은 도를 꿰는 그릇이다[文貫道之器]’라는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근본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문장에서 내실(內實)을 숭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계곡은 답인논문(答人論文)에서, 사(辭)를 문장의 화(華)로 이(理)를 문장의 실(實)로 보고, 성현의 문장처럼 화와 실이 겸비된 문장이 극진한 것이지만, 화만 있고 실이 없기보다는 차라리 실하면서 화하지 않은 송대 선유들의 문장과 같은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을 하였다. 즉 계곡은 화려한 수식만 일삼은 문장을 배격하고, 이치가 담긴 내실 있는 문장을 선호한 것이다. 문장에서의 화와 실에 대한 논의는 일찍이 신라 시대 원효(元曉)로부터 비롯된 문학의 원론적인 논제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을 따진다면,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조이다.
계곡은 화와 실을 겸비한 선진 고문(先秦古文)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을 다 갖출 수 없을 때, 차선책으로 내실을 더 중시하는 문학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문장의 생명력은 내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문장에는 저절로 정해진 값이 있다.……천추에 썩지 않는 것은 그 실(實)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며, 또 “도를 밝히는 것은 나에게 있고, 알아주는 것은 남에게 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실이 있으면, 아무리 호사스런 것도 영화가 되기에 부족하고, 아무리 더러운 것도 욕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계곡은 문장의 실(實)을 이(理)로 보았는데, 이 이(理)를 그는 ‘이치(理致)’ 또는 ‘이취(理趣)’라는 말로 구체화시켜 쓰고 있다. 따라서 이 이(理)는 문장의 조리(條理)나 논리(論理)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담긴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인생이나 사물에 대한 심오한 이치를 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돈본상실의 문학관은 ‘이(理)를 위주로 하는 문론(文論)’으로 전개된다. 계곡은 “문장은 이(理)를 위주로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치가 빼어나면 문장은 저절로 아름답게 되지만, 이치가 어긋나면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일지라도 군자는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를 위주로 하는 문론’을 주장하면서,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함께 언급하였다. 첫째, 문사(文詞)는 간략하면서도 의미는 극진한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케케묵은 말을 인용하여 수식하는 것을 반대하고 개성 있는 창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생경하거나 난삽한 문장보다는 평이한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이를 위주로 하는 문론’은 산문뿐만이 아니라, 운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계곡은 홍성민(洪聖民)의 시를 평하면서, 성색(聲色)으로 공교로움을 삼지 않고 이치를 주로 하여 의미를 창달하는 데서 그치고자 하였다고 논하였다. 또한 계곡의 문장에 대해, 《인조실록》에서 사관은 ‘기완이이도(氣完而理到)’라 하였고, 이정귀(李廷龜)는 ‘사리겸비(詞理兼備)’라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이승위정(理勝爲正)’이라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전칙이치(典則理致)’라 하였다. 이런 평어를 종합해 볼 때, 계곡의 문학론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것이 ‘이치를 위주로 하는 문론’이라 하겠다.
다음은 그의 시론(詩論)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계곡은 어려서부터 고문만을 좋아하고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작품을 품평한 말을 보면, 시에 대해서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부(詞賦) 6, 7편은 이규보(李奎報)의 것과 비견되고, 작법에 맞는 고문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것보다 나으며, 시도 기상이 체(體)에 충만하고 시어는 의사를 창달하여 몇몇 소가(小家)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산문 문학론으로 ‘이치를 위주로 하는 문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시 문학론에 있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시론을 전개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계곡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진단하면서, 공언(空言)과 유담(游談)만을 일삼는 위선자들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학문이든 문학이든 이런 위선적인 것 즉 허(虛)와 위(僞)를 물리치고, 실(實)과 진(眞)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명분론적 틀에 갇히지 않고 이 실과 진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느 것이든 기꺼이 수용하려 하였다.
이런 사유가 시문학으로 표출된 것이 그의 시론인 천기론(天機論)이다. 조선 전기에는 문장은 도를 실어야 한다는 재도적 문학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를 위주로 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도 도덕적 심성 수양을 통해 우러나오는 성정지정(性情之正)에 근본해야 한다는 성정론(性情論)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 이런 도덕주의적 문학관이 오히려 인간의 진솔한 정감을 저해한다는 반성이 일기 시작하여, 허균(許筠) 같은 사람은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 예교(禮敎)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정지정으로 인식되던 성정론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제기되어, 이수광(李睟光) 같은 이는 ‘도덕에 근본한 성정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진솔한 정취’를 성정(性情)으로 보았다. 이런 논의는 후대 김창협(金昌協)에 의해 성정을 ‘성정지진(性情之眞)’으로 정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문학적 풍토 속에서 계곡이 본격적으로 제기한 시론이 천기론이다. 천기(天機)라는 말은 ‘일체의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한 무위자연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흥기되는 진정(眞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계곡은 와명부(蛙鳴賦)에서 “형체를 받고 기를 품부받은 것들은 모두 천기가 저절로 울려 나와 각기 자기의 품성에 따라 자기의 정감을 펴는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고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타자를 위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개구리의 울음 소리는 품성 그대로에서 자연스럽게 울려나오는 진정이니, 그것이 곧 천기이다. 이는 인교(人巧)를 반대하고 천교(天巧)를 중시하며, 인공(人工)을 반대하고 천성(天成)을 중시하는 문예 의식이다.
계곡은 “시는 천기가 울린 것인지라, 소리도 화려하고 색깔도 윤택하며 청(淸)ㆍ탁(濁)ㆍ아(雅)ㆍ속(俗)이 모두 자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이 ‘자연에서 나온다[出乎自然]’는 말이다. 이는 인위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한 자연 상태에서 표출되어 나오는 순수하고 진정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계곡이 내세운 천기론의 미의식이다.
또한 계곡은 시를 지을 때, 첨예한 기교를 부리지 말 것[毋尖巧], 껄끄럽고 난삽하게 하지 말 것[毋滯澁], 표절하지 말 것[毋剽竊], 모방하지 말 것[毋摸擬], 의심스런 일이나 편벽된 말을 쓰지 말 것[毋使疑事僻語] 등 오계(五戒)를 늘 염두에 두었다. 이런 오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虛)와 위(僞)를 물리치고 실(實)과 진(眞)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그의 문예 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계곡은 이와 관련하여 “‘시언지(詩言志)’라고 하는 이유는 반드시 진정실경(眞情實境)을 말한 뒤에야 볼만하기 때문이다. 실사(實事)가 없는데도 억지로 허어(虛語)를 만든다면, 아무리 공교롭게 하더라도 일컬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즉 천기가 발로된 진정의 세계는 실사(實事)가 없는 허경(虛境)에서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곡이 내세운 천기론의 또 다른 미의식 ‘진정실경(眞情實境)’을 만나게 된다.
이런 계곡의 천기론은 후대 홍세태(洪世泰 1653~1725)ㆍ홍양호(洪良浩 1724~1802) 등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폭넓은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천기론을 체계적으로 정밀하게 논의한 것은 계곡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문집의 구성과 내용
본 국역서의 대본인 《계곡집》은 36권 18책으로 원집 34권, 만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 권두에 박미ㆍ이명한ㆍ김상헌ㆍ이식의 서문 및 저자의 자서가 실려 있고, 문집 전체의 목록은 붙어 있지 않다.
권1에는 사부(詞賦) 17수가 수록되어 있다. 위의 도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계곡초고》에는 사부가 16수인데 《계곡집》에 와서 1수가 늘어 17수가 되었다. 이 1수는 권1 맨 뒤에 실린 조령부(鳥嶺賦)로, 이 부의 뒤에 후지(後識)가 붙어 있어 그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지에 의하면, 이 부는 저자 나이 20세 때 장인 김상용(金尙容)을 뵈러 임소(任所)인 상주(尙州)로 가다가 조령(鳥嶺)을 넘으며 지은 것이다. 계곡은 1635년 《계곡초고》를 편집할 때, 이 부를 불태워 버렸다. 그 뒤 1636년 아들 선징이 베껴 둔 사본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수정해 두었다가 《계곡집》을 만들 때 첨가해 넣은 것이다. 권1에 실린 사부에서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의 현상과 재해,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읊은 글이 다수를 차지한다. 또 이 가운데에는 과작(課作)도 4수나 들어 있다. 계곡은 자신의 사부 가운데 6, 7편은 이규보의 것에 비견될 수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속천문(續天問)ㆍ추림부(秋霖賦)ㆍ설부(雪賦)ㆍ뇌부(雷賦)ㆍ와명부(蛙鳴賦)ㆍ조기자부(弔箕子賦) 등은 모두 빼어난 작품으로 여겨진다.
권2에는 표(表)ㆍ전(箋)ㆍ장(狀)이 23수, 교서(敎書)ㆍ비답(批答)이 10수, 책문(冊文)이 3수, 잠(箴)ㆍ명(銘)ㆍ찬(贊)이 16수 수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지낸 인물인 만큼 사은표(謝恩表)ㆍ방물표(方物表)ㆍ하전(賀箋)ㆍ사전(謝箋)ㆍ교서ㆍ책문 등이 많이 실려 있다. 잠ㆍ명ㆍ찬은 자신의 호 묵소(黙所)ㆍ지리자(支離子)와 연관시킨 삶의 자세이거나 책ㆍ거문고 등을 통한 삶의 지취를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충정당명(忠正堂銘)ㆍ삼화찬(三畫贊)ㆍ지리자자찬(支離子自贊) 등 3수는 말년에 지은 속고다.
권3에 실린 잡저(雜著)는 첫머리에 ‘76수’라고 부기해 놓았는데, 이는 한 편명 아래 여러 수를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즉 우언(寓言) 2수, 방언(放言) 4수, 만기(漫記) 2수, 잡기(雜記) 11수, 책문(策問) 8수, 의연연주(擬演連珠) 20수를 모두 합해 계산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35편이고, 작품 수는 76수이다. 이 가운데 서송구봉현승편후(書宋龜峯玄繩編後)ㆍ서설씨가전후(書偰氏家傳後)ㆍ선대부목천제영발(先大夫木川題詠跋)ㆍ중각백사집발(重刻白沙集跋)ㆍ임술동경계첩발(壬戌同庚稧帖跋)ㆍ인평대군신제상량문(麟坪大君新第上樑文)ㆍ의연연주는 속고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속고로 표기된 편수를 모두 합해도 26수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잡저는 《계곡초고》보다 36수나 첨가되었는데 속고로 표기된 것이 26수밖에 되지 않으므로, 나머지 10수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잡저에 실린 글들에는 저자의 학설이나 주장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많다. 전례사의(典禮私議)ㆍ독정우복의례차(讀鄭愚伏議禮箚)ㆍ답사계선생(答沙溪先生) 등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례와 복제(服制)를 논한 것이고, 위인후위조후변(爲人後爲祖後辯)은 원종(元宗)의 추숭(追崇) 문제를 논한 것이다. 이런 글들은 왕실의 예에 관한 논변이므로 후대 예송 논쟁이 일어나기 전의 서인계 예학(禮學)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설맹장논변(設孟莊論辯)은 맹자와 장자가 서로 만나 도를 논하는 것을 허구적으로 설정한 글이며, 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은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변론한 내용으로 시문학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글이며, 빙호선생전(氷壺先生傳)은 얼음 항아리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주목해 볼만하다. 이 외에도 잡저에는 발문과 후지 등이 다수 들어 있어 문학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권4에는 설(說) 10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있는 화당설(化堂說)만이 속고로 표기되어 있다. 필설(筆說)은 족제비털에 개털을 섞어서 만든 붓을 두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사대부들을 빗대 비판한 글이며, 해구불하설(海鷗不下說)은 《열자(列子)》에 나오는 일화를 인용해 욕심 없이 담박하게 살고자 하는 의미를 드러낸 글이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정자(程子), 주자(朱子), 나정암(羅整庵)이 인심과 도심에 대해 논한 설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마음을 다스려 본성을 회복하는 것은 같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분분하게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저자의 개방적인 학문 성향을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권5에서 권7까지에는 서(序) 53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뒤에 실린 남창잡고서(南窓雜稿序) 이하 11수는 속고이다. 이 가운데 송별하면서 지어 준 송서(送序)가 14수, 유배지로 보내는 서문이 1수, 회갑 등 수연(壽宴)을 경하하며 써 준 서문이 2수, 묵소고갑자서(黙所稿甲自序) 등 자신의 책에 쓴 자서가 4수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시문집 및 언해(諺解)ㆍ주해(註解)ㆍ가승(家乘)ㆍ지도ㆍ첩(帖) 등에 써 준 서문이다. 시문집의 서문 중에는 당대 문명이 높던 신흠(申欽)ㆍ최립(崔岦)ㆍ정철(鄭澈)ㆍ황정욱(黃廷彧)ㆍ홍성민(洪聖民)ㆍ임숙영(任叔英)ㆍ이정귀(李廷龜) 등의 문집에 쓴 서문이 다수 들어 있어 문학적으로 주목해 볼 만하다.
권8에는 기(記) 19수가 실려 있는데, 뒤에 실린 전생서대청중건기(典牲署大廳重建記) 이하 4수는 속고이다. 이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의인화해서 쓴 신명사기(神明舍記)와 신기루를 소재로 하여 쓴 신루기(蜃樓記)는 문학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나머지는 모두 당(堂)이나 누각(樓閣) 등의 건물에 대한 기문이다. 권9에는 제문(祭文) 42수가 실려 있는데, 뒤에 실린 제월사이상공문(祭月沙李相公文) 이하 4수는 속고이다. 이 제문에는 기우제문(祈雨祭文)ㆍ기청제문(祈晴祭文)ㆍ사제문(賜祭文) 등 공적으로 쓴 제문과 윤근수(尹根壽)ㆍ이항복(李恒福)ㆍ정엽(鄭曄)ㆍ이정귀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제문이 함께 들어 있다.
권10에서 권14까지는 묘지(墓誌)ㆍ묘갈(墓碣)ㆍ비명(碑銘) 등 비지 문자(碑誌文字) 45수가 실려 있는데, 묘지는 12수 중 6수가 속고이고, 묘갈은 16수 중 6수가 속고이고, 비명은 17수 중 8수가 속고이다. 전체적으로 45수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20수가 속고이다. 이 가운데에는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지(陵誌)를 비롯하여, 성혼(成渾)ㆍ김천일(金千鎰)ㆍ김장생(金長生) 등 전대 유명 인사들의 비지 문자가 다수 들어 있다.
권15부터 권16까지에는 행장(行狀) 7수가 실려 있는데, 뒤의 2수는 속고이다. 이 행장도 이항복ㆍ이산보(李山甫)ㆍ이수광ㆍ이정귀 등 당대 이름난 재상의 행장이 대부분이다. 권17부터 권20까지에는 소차(疏箚) 78수가 실려 있는데, 권20에 실린 28수는 모두 속고이다. 권21에는 계사(啓辭)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런 상소문에는 계곡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진전례문답차(進典禮問答箚)에는 당시 원종(元宗) 추숭(追崇)과 관련된 예학(禮學)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
권22부터 권24까지는 주본(奏本) 5수, 자문(咨文) 26수, 격(檄) 1수, 정문(呈文) 2수, 첩(帖) 47수 등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첩 2수만 속고이다. 계곡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인 자문을 잘 지었는데, 명 나라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ㆍ황룡(黃龍) 등에게 보낸 자문ㆍ정문 등이 많다. 이는 대체로 저자가 대제학으로 있던 1627년부터 1632년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권25부터 권34까지는 모두 시를 수록했는데, 오언 고시ㆍ칠언 고시ㆍ오언 율시ㆍ오언 배율ㆍ칠언 율시ㆍ칠언 배율ㆍ오언 절구ㆍ칠언 절구ㆍ육언(六言)ㆍ잡체(雜體)로 분류하여 1481수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190여 수가 속고이다. 계곡의 시는 총 1481수로, 그 가운데 고시가 209수, 율시가 841수, 절구가 333수, 배율이 44수, 육언이 10수, 잡체가 44수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고시보다는 율시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그런데 잡체시를 44수나 남겼다는 점이 주목해 볼 만하다. 잡체시는 이 시기 권필(權韠)ㆍ조위한(趙緯韓) 등에 의해 지어진 한시의 희작화(戱作化)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문사(文辭)에 능한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시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계곡집》과 그 저자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계곡은 한문사대가로 알려져 흔히 문장가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의 학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이며, 정치적으로도 인조반정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이제 《계곡집》이 완역되었으니, 앞으로 문학적으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산문 문학론과 시 문학론에 대해서 보다 정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며, 작품 세계에 대한 정치한 분석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도 다각도에서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 성향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구명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7세기 조선 사상계가 정주학 위주로 획일화된 길을 걷던 시기에 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누구보다도 심도 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정주학적 사유 체계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양명학ㆍ도가ㆍ불가 등 다양한 사상을 두루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계곡처럼 학문의 개방성을 보인 경우는, 조선 성리학이 꽃피어 나던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서경덕(徐敬德)ㆍ조식(曺植)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퇴계ㆍ율곡 이후로는 조선 성리학계가 정주학으로 경도되어 획일화되었는데, 계곡은 그런 경직된 학문 풍토 속에서 다양성ㆍ개방성을 외친 학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곡의 정신 세계는 우리 학술사 내지 정신사에서 그 위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한문사대가 [漢文四大家]
조선 중기 문장에 뛰어났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 등 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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