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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4일 토요일

사고전서총목제요 邵氏聞見錄

聞見前錄
宋邵伯溫撰伯溫有易學辨惑已著錄伯溫藉邵子之緖猶及見元祐諸耆舊故於當時朝政具悉端委是書成於紹興二年前十六卷,記太祖以來故事而於王安石新法始末及一時同異之論載之尤詳其論洛朔三黨相攻惜其各立門戶授小人以間又引程子之言以爲變法由於激成皆平心之論其記燈籠錦事出文彦博之妻於事理較近其記韓富之隙由撤簾不由定策亦足以訂强至家傳之訛周必大跋呂獻可墓誌, “伯溫是書頗多荒唐凡所書人及其歲月鮮不差誤.” 殆好惡已甚之詞不盡然也十七卷多記雜事其洛陽永樂諸條皆寓麥秀黍離之感十八卷至二十卷皆記邵子之言行而殤女轉生黑猿感孕意欲神奇其父轉涉妖誣又記邵子之言謂老子得之體孟子得之用文中子以佛爲西方聖人亦不以爲非似乎附會至投壺一事益猥瑣不足紀蓋亦擇焉不精者取其大旨可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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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총목제요 邵氏聞見後錄

宋邵博撰. 博字公濟, 伯溫子也. 是編蓋續其父書, 故曰『後錄』. 其中論復孟后諸條, 亦有與前『錄』重出者. 然伯溫所記, 多朝廷大政, 可裨史傳, 是書兼及經義・史論・詩話, 又參以神怪・俳諧, 較前『錄』, 頗爲瑣雜. 又伯溫書, 盛推二程, 博乃排程氏而宗蘇軾. 觀所記游酢・謝良佐之事, 知康節沒後, 程氏之徒, 欲尊其師而抑邵, 故博有激以報之. 蓋怙權者, 務爭利, 必先合力以攻異黨, 異黨旣盡, 病利之不獨擅,則同類復相攻. 講學者, 務爭名, 亦先合力以攻異黨, 異黨旣盡, 病名之不獨擅, 則同類亦相攻, 固勢之必然, 不足怪也. 至其彙輯疑孟諸說,至盈三卷, 證『碧雲騢』眞出梅堯臣手, 記王子飛事, 稱佛怯之靈, 記湯保衡事, 推道敎之驗, 論晏殊薄葬之非, 詆趙鼎宗洛學之謬, 皆有乖邵子之家法. 他若以元稹詩作黃巢之類, 引據亦頗疏略. 惟其辨宣仁之誣, 載司馬光集外章疏之類, 可資考訂. 議『通鑑』削屈原之非, 駁王安石取馮道之謬, 辨『伊川易傳』非詆垂簾, 證紹興玉璽實非和璧, 論皆有見. 談詩亦多可採. 宋人說部, 完美者稀, 節取焉可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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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3일 금요일

장유의 계곡집(谿谷集)

2. 계곡(谿谷)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문학
1) 생애
저자 장유(張維)의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黙所)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며, 봉호(封號)는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이다. 계곡은 선조 20년(1587) 12월 25일 부친의 임소(任所)인 평안도 선천부(宣川府)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이조 판서ㆍ형조 판서 등을 지낸 장운익(張雲翼 1561~1599)이고,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박숭원(朴崇元 1532~1592)의 딸이다.
계곡은 7세 때부터 부친 슬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는데, 특히 암기를 잘하여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의 정문(正文)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암송하였다고 한다. 13세 때인 1599년 부친상을 당했는데, 성인(成人)처럼 상례를 치렀다. 15세 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 나아가 《한서(漢書)》ㆍ《사기(史記)》를 배우고, 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아가 예(禮)를 배웠다. 16세 때에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문하에 나아가 한유(韓愈)의 글을 배웠는데, 오래지 않아 고문(古文)의 구조를 깨달았다. 그리고 《초사(楚辭)》ㆍ《문선(文選)》등을 읽었으며, 사부(詞賦)를 배웠다.
계곡은 19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장원하였고, 20세 때에는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이해에 《음부경해(陰符經解)》를 지었는데, 이 책은 《음부경》의 어구(語句)마다 주해를 붙인 것이다. 문집에 실린 음부경해서(陰符經解序)를 보건대, 도가적 시각으로 주해한 전대의 해석을 탐탁지 않게 여겨, 유학적 관점으로 새로 해석한 것인 듯하다. 《계곡만필》에 의하면, 계곡은 이 시기에 송대의 성리서를 두루 읽고 있었으니, 한창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빠져들던 시기에 저술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계곡은 23세 때인 1609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합격하였다. 이해 12월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갔다. 이 시기 그는 관각과시(館閣課試)에서도 고등으로 뽑혀 문장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는데, 진부하고 쓸데없는 말을 쓰지 않고, 당 나라 때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일으킨 한유(韓愈)ㆍ유종원(柳宗元)의 법도를 따랐다. 이후 시강원 설서, 승정원 주서 등을 거쳐 25세 때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26세 때인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처남 황상(黃裳) 일가가 연루됨으로써 그도 연좌되어 파직당하였다. 이 시기는 북인(北人)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몇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서인(西人)들이 조정에서 밀려나 있던 때이다. 이후 그는 12년간 경기도 안산(安山)에 은거하여 독서와 저술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가 그에게는 풍부한 독서를 통해 정신적 깊이를 더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문장력을 튼튼하게 연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예문관 대교, 이조 좌랑 등을 거쳐 이조 정랑으로 승진되었으며,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公州)로 파천할 적에 왕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신풍군(新豐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또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扈從)하였고, 환도(還都)한 뒤에 이조 판서로 발탁되었다. 42세 때인 1628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ㆍ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였다. 1629년에는 대제학으로 나만갑(羅萬甲)의 유배를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잇단 권유로 이듬해 다시 형조 판서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1631년에는 딸이 봉림대군(鳳林大君)과 가례(嘉禮)를 치렀다.
49세 때인 1635년에는 병으로 예조 판서를 사직하고 요양하면서,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계곡초고》26권을 만들었다. 이듬해 다시 공조 판서로 나아갔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고,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다. 1637년 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최명길 등이 환란을 수습하기 위해 계곡을 기복(起復)시켜야 한다고 아뢰어, 4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계곡은 모친상을 마치게 해 달라고 18차례나 애절하게 상소하여 끝내 인조의 윤허를 받았다. 이해 11월 인조가 장유ㆍ이경전(李慶全)ㆍ조희일(趙希逸)ㆍ이경석(李景奭)에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짓게 하였는데, 청 나라 범문정(范文程) 등이 이경석의 글을 택하였다.
계곡은 1637년 모친상을 당한 뒤로 신병이 더욱 심해져, 이듬해 3월 17일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해 6월 안산(安山) 월곡리(月谷里)에 장사 지냈고, 1655년(효종 6) 5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렸다.

2) 학문 성향
계곡의 학문적 특성은 한 마디로 박학다식함과 개방성에 있다. 《계곡집》의 서문을 쓴 박미(朴瀰)ㆍ이명한(李明漢) 등이 계곡의 학문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한결같이 경전과 성리서는 물론이고 제자백가 및 도가ㆍ불가ㆍ의복(醫卜)ㆍ풍수ㆍ천문ㆍ지리 등에 두루 통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계곡은 젊어서부터 폭넓은 독서를 했고, 그래서 그의 사상은 성리학적 사유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박학다식함과 개방적 성향은 그의 사유를 정주학적(程朱學的) 틀 속에 묶어 둘 수 없게 하였다. 그는 16세기 후반 퇴계(退溪)ㆍ율곡(栗谷) 이후로 학문이 정주학 일변도로 획일화되어 교조적 성향을 띄게 된 것을 황무지에 비유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씨를 뿌려 이삭이 패고 열매가 맺힌 뒤에야 오곡(五穀)과 피[稊稗]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서 무엇이 오곡이 되고 무엇이 피가 되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주장은 중국처럼 정주학ㆍ육왕학(陸王學)ㆍ선학(禪學)ㆍ단학(丹學) 등 모든 학문과 사상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나중에 그 진위를 가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개방적 성향은 틀에 갇힌 사고를 탈피하여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 사유를 낳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종조(祖宗朝)의 법이라는 점만 내세우며 변화를 거부하는 경직된 생각을 반대하고, 시세(時勢)와 인심에 맞는 변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를 희구하였다. 그가 청 나라의 침입 때 최명길 등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한 것도 이런 실리를 추구하고 변화를 인식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신의 좁은 소견만 믿고 사물의 변화와 역사의 진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명분론자들의 고루하고 국한된 사고를 우물 안의 개구리와 여름철 벌레에 비유하여 비판하였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장유는 당시 절대시되던 주자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견해와 다르면, 그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신의 설을 내세웠다. 예컨대, 그는 《중용(中庸)》첫 장의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수(修)’를 ‘품절지(品節之)’로 ‘교(敎)’를 ‘예악형정지속(禮樂刑政之屬)’으로 보는 주자의 설에 반대하고, ‘수(修)’를 ‘수명(修明)’ㆍ‘수치(修治)’로, ‘교(敎)’를 ‘계구(戒懼)’ㆍ‘신독(愼獨)’으로 보았다. 또한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제5장은 ‘자왈도기불행의부(子曰道其不行矣夫)’ 8자가 1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계곡은 이를 제4장에 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학자들이 제기하였는데, 다산(茶山)의 《중용자잠(中庸自箴)》에도 계곡의 설과 같이 제5장을 제4장에 합해 놓고 있다. 그리고 계곡은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대해서도 주자가 국풍(國風)의 시를 음시(淫詩)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계곡은 선유의 정설(定說)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상당히 합리적이고 고증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자신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학문 태도는 당시 학자들이 이단(異端)으로 지목하던 양명학(陽明學)까지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갖게 하였다. 일부 학자들이 계곡의 학문 성향을 전적으로 양명학인 것인 양 논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 시대 양명학을 학문의 본령으로 한 학자는 정제두(鄭齊斗)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계곡 등은 개방적인 학문 자세로 양명학까지도 자신의 학문 영역 안에 끌어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계곡의 학문은 정주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양명학ㆍ도가ㆍ불가 등의 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계곡의 학문에 대해, 정치적ㆍ학문적으로 노선을 같이 했던 송시열(宋時烈)ㆍ황경원(黃景源) 등은 계곡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미봉식으로 변론하며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서인이면서도 주자학적 사유 체계에 철저했던 사람들, 예컨대 이식(李植)ㆍ정홍명(鄭弘溟)ㆍ박세채(朴世采) 등은 계곡이 이단에 빠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동시대 계곡과 문명(文名)을 나란히 했던 이식은 그의 문집 잡저(雜著)에서 “장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일생 동안 지조를 지키고 살았다. 그의 학문은 박학하면서도 요약되니, 언뜻 보면 누가 그를 대유(大儒)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논의는 전적으로 육왕(陸王)을 위주로 하여, 선유들이 해석해 놓은 정설에 구절마다 이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불교의 학문이 비록 이단이기는 하지만 몸과 마음에 유익함이 있다면 공격해 배척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는 바로 내가 말하는 ‘배우지 않은 사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비록 훌륭하지만, 그의 설은 물리칠 만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이식의 언급은 기실 당색이 같지 않다면, 사문난적으로 몰아갈 만큼 비판적인 발언이다. 계곡의 학문에 대해, 양명학자로 보는 시각이나 노장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학자로 보는 시각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계곡은, 조선 성리학인 정주학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 틀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양명학ㆍ노장 사상ㆍ불교 사상 등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학문 자세를 가진 인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3) 문학 성향
계곡을 거론하면, 누구든지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즉 그는 조선 시대 뛰어난 문학가로, 시보다도 산문에 장점이 있던 문장가였다. 따라서 우리는 계곡을 논하면서 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계곡의 문학적 특성을 그의 문학관 내지 문학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한말 김택영(金澤榮)은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 가운데 장유ㆍ이식만을 여한구가(麗韓九家)에 넣고, 조선 시대 문장이 누추함을 벗고 전아한 데로 나아간 것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계곡집》의 서문을 쓴 김상헌(金尙憲)은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로 최치원(崔致遠)ㆍ이색(李穡)ㆍ김종직(金宗直)ㆍ최립(崔岦)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를 들면서, 그 뒤를 이어 계곡이 나왔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그는 계곡의 문장을 이색의 문장과 비교해, 그 규모는 이색만큼 크지는 못하지만 정치(精緻)함은 그보다 나으며, 문채(文彩)는 이색보다 약간 뒤지지만 이치(理致)를 드러낸 점은 더 치밀하다고 평하였다.
김상헌이 평한 것처럼, 계곡의 산문은 정밀하고 치밀하게 논지를 전개하였고 문채보다는 이치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계곡은 용졸당기(用拙堂記)에서 “문채[文]는 바탕[質]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여, 문채보다는 바탕, 즉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팔곡집서(八谷集序)에서 진한(秦漢) 이전의 박실(朴實)한 문장과 위진(魏晉) 이후의 부화(浮華)한 문장에 대해 논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근본을 무시하고 겉만 화려하게 수식하는 문장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한 이전의 고문이 박실한 이유를 ‘옛날 사람들은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여[敦本尙實] 마음속에서 얻어진 것이 발해 문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언표를 통해서, 우리는 계곡의 문학관이 부화한 수식이나 기교를 일삼는 것보다는 근본을 돈독히 하고 내실을 숭상하는 ‘돈본상실(敦本尙實)’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을 돈독히 한다[敦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계곡은 명 나라 때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학의 폐단이 근본을 충실히 하지 않고 말단만을 흉내 내려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풍조는 조선에도 성행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팔곡집서에서 “옛날 문운이 성대하던 때의 문사를 다스리던 선비들은 모두 경술(經術)에 근원하여 이취(理趣)를 주로 삼았다.”고 하면서, 기이한 것만 일삼으려는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였다. 또한 논평자들의 말을 보면, 계곡의 문장은 경술에 근본하였다는 말이 한결같이 나온다. 예컨대, 이정귀(李廷龜)는 경연에서 “장모(張某)의 문장은 경학에서 얻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명한은 《계곡집》서문에서 “공의 문장은 육경에 근본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식도 서문에서 경전에만 근본하면 통속적인 데 가깝고 문사만을 일삼으면 배우와 유사하게 되는데 이 양자를 하나로 융합시킨 사람이 계곡이라 하였다.
이런 언급을 종합해 볼 때, 계곡이 주장한 ‘돈본’은 경학 또는 경술에 근본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학이 문학보다 우위에 있던 중세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있어, 근본을 돈독히 하는 문제는 곧 도(道)와 직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그 속에 도를 담아야 하고, 도를 담지 않으면 겉만 화려하게 수식한 부화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문학관은 ‘문은 도를 꿰는 그릇이다[文貫道之器]’라는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근본을 돈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문장에서 내실(內實)을 숭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계곡은 답인논문(答人論文)에서, 사(辭)를 문장의 화(華)로 이(理)를 문장의 실(實)로 보고, 성현의 문장처럼 화와 실이 겸비된 문장이 극진한 것이지만, 화만 있고 실이 없기보다는 차라리 실하면서 화하지 않은 송대 선유들의 문장과 같은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을 하였다. 즉 계곡은 화려한 수식만 일삼은 문장을 배격하고, 이치가 담긴 내실 있는 문장을 선호한 것이다. 문장에서의 화와 실에 대한 논의는 일찍이 신라 시대 원효(元曉)로부터 비롯된 문학의 원론적인 논제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을 따진다면,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조이다.
계곡은 화와 실을 겸비한 선진 고문(先秦古文)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을 다 갖출 수 없을 때, 차선책으로 내실을 더 중시하는 문학관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문장의 생명력은 내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문장에는 저절로 정해진 값이 있다.……천추에 썩지 않는 것은 그 실(實)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며, 또 “도를 밝히는 것은 나에게 있고, 알아주는 것은 남에게 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실이 있으면, 아무리 호사스런 것도 영화가 되기에 부족하고, 아무리 더러운 것도 욕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계곡은 문장의 실(實)을 이(理)로 보았는데, 이 이(理)를 그는 ‘이치(理致)’ 또는 ‘이취(理趣)’라는 말로 구체화시켜 쓰고 있다. 따라서 이 이(理)는 문장의 조리(條理)나 논리(論理)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담긴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인생이나 사물에 대한 심오한 이치를 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돈본상실의 문학관은 ‘이(理)를 위주로 하는 문론(文論)’으로 전개된다. 계곡은 “문장은 이(理)를 위주로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치가 빼어나면 문장은 저절로 아름답게 되지만, 이치가 어긋나면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일지라도 군자는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를 위주로 하는 문론’을 주장하면서,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함께 언급하였다. 첫째, 문사(文詞)는 간략하면서도 의미는 극진한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케케묵은 말을 인용하여 수식하는 것을 반대하고 개성 있는 창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생경하거나 난삽한 문장보다는 평이한 문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이를 위주로 하는 문론’은 산문뿐만이 아니라, 운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계곡은 홍성민(洪聖民)의 시를 평하면서, 성색(聲色)으로 공교로움을 삼지 않고 이치를 주로 하여 의미를 창달하는 데서 그치고자 하였다고 논하였다. 또한 계곡의 문장에 대해, 《인조실록》에서 사관은 ‘기완이이도(氣完而理到)’라 하였고, 이정귀(李廷龜)는 ‘사리겸비(詞理兼備)’라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이승위정(理勝爲正)’이라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전칙이치(典則理致)’라 하였다. 이런 평어를 종합해 볼 때, 계곡의 문학론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것이 ‘이치를 위주로 하는 문론’이라 하겠다.
다음은 그의 시론(詩論)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계곡은 어려서부터 고문만을 좋아하고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작품을 품평한 말을 보면, 시에 대해서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부(詞賦) 6, 7편은 이규보(李奎報)의 것과 비견되고, 작법에 맞는 고문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것보다 나으며, 시도 기상이 체(體)에 충만하고 시어는 의사를 창달하여 몇몇 소가(小家)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산문 문학론으로 ‘이치를 위주로 하는 문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시 문학론에 있어서도 나름의 독창적인 시론을 전개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계곡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진단하면서, 공언(空言)과 유담(游談)만을 일삼는 위선자들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학문이든 문학이든 이런 위선적인 것 즉 허(虛)와 위(僞)를 물리치고, 실(實)과 진(眞)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명분론적 틀에 갇히지 않고 이 실과 진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느 것이든 기꺼이 수용하려 하였다.
이런 사유가 시문학으로 표출된 것이 그의 시론인 천기론(天機論)이다. 조선 전기에는 문장은 도를 실어야 한다는 재도적 문학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를 위주로 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도 도덕적 심성 수양을 통해 우러나오는 성정지정(性情之正)에 근본해야 한다는 성정론(性情論)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 이런 도덕주의적 문학관이 오히려 인간의 진솔한 정감을 저해한다는 반성이 일기 시작하여, 허균(許筠) 같은 사람은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 예교(禮敎)에 예속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정지정으로 인식되던 성정론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제기되어, 이수광(李睟光) 같은 이는 ‘도덕에 근본한 성정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진솔한 정취’를 성정(性情)으로 보았다. 이런 논의는 후대 김창협(金昌協)에 의해 성정을 ‘성정지진(性情之眞)’으로 정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문학적 풍토 속에서 계곡이 본격적으로 제기한 시론이 천기론이다. 천기(天機)라는 말은 ‘일체의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한 무위자연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흥기되는 진정(眞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계곡은 와명부(蛙鳴賦)에서 “형체를 받고 기를 품부받은 것들은 모두 천기가 저절로 울려 나와 각기 자기의 품성에 따라 자기의 정감을 펴는 것이다.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고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타자를 위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개구리의 울음 소리는 품성 그대로에서 자연스럽게 울려나오는 진정이니, 그것이 곧 천기이다. 이는 인교(人巧)를 반대하고 천교(天巧)를 중시하며, 인공(人工)을 반대하고 천성(天成)을 중시하는 문예 의식이다.
계곡은 “시는 천기가 울린 것인지라, 소리도 화려하고 색깔도 윤택하며 청(淸)ㆍ탁(濁)ㆍ아(雅)ㆍ속(俗)이 모두 자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이 ‘자연에서 나온다[出乎自然]’는 말이다. 이는 인위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한 자연 상태에서 표출되어 나오는 순수하고 진정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계곡이 내세운 천기론의 미의식이다.
또한 계곡은 시를 지을 때, 첨예한 기교를 부리지 말 것[毋尖巧], 껄끄럽고 난삽하게 하지 말 것[毋滯澁], 표절하지 말 것[毋剽竊], 모방하지 말 것[毋摸擬], 의심스런 일이나 편벽된 말을 쓰지 말 것[毋使疑事僻語] 등 오계(五戒)를 늘 염두에 두었다. 이런 오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虛)와 위(僞)를 물리치고 실(實)과 진(眞)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그의 문예 의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계곡은 이와 관련하여 “‘시언지(詩言志)’라고 하는 이유는 반드시 진정실경(眞情實境)을 말한 뒤에야 볼만하기 때문이다. 실사(實事)가 없는데도 억지로 허어(虛語)를 만든다면, 아무리 공교롭게 하더라도 일컬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즉 천기가 발로된 진정의 세계는 실사(實事)가 없는 허경(虛境)에서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곡이 내세운 천기론의 또 다른 미의식 ‘진정실경(眞情實境)’을 만나게 된다.
이런 계곡의 천기론은 후대 홍세태(洪世泰 1653~1725)ㆍ홍양호(洪良浩 1724~1802) 등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폭넓은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천기론을 체계적으로 정밀하게 논의한 것은 계곡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문집의 구성과 내용
본 국역서의 대본인 《계곡집》은 36권 18책으로 원집 34권, 만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 권두에 박미ㆍ이명한ㆍ김상헌ㆍ이식의 서문 및 저자의 자서가 실려 있고, 문집 전체의 목록은 붙어 있지 않다.
권1에는 사부(詞賦) 17수가 수록되어 있다. 위의 도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계곡초고》에는 사부가 16수인데 《계곡집》에 와서 1수가 늘어 17수가 되었다. 이 1수는 권1 맨 뒤에 실린 조령부(鳥嶺賦)로, 이 부의 뒤에 후지(後識)가 붙어 있어 그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지에 의하면, 이 부는 저자 나이 20세 때 장인 김상용(金尙容)을 뵈러 임소(任所)인 상주(尙州)로 가다가 조령(鳥嶺)을 넘으며 지은 것이다. 계곡은 1635년 《계곡초고》를 편집할 때, 이 부를 불태워 버렸다. 그 뒤 1636년 아들 선징이 베껴 둔 사본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수정해 두었다가 《계곡집》을 만들 때 첨가해 넣은 것이다. 권1에 실린 사부에서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의 현상과 재해,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읊은 글이 다수를 차지한다. 또 이 가운데에는 과작(課作)도 4수나 들어 있다. 계곡은 자신의 사부 가운데 6, 7편은 이규보의 것에 비견될 수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속천문(續天問)ㆍ추림부(秋霖賦)ㆍ설부(雪賦)ㆍ뇌부(雷賦)ㆍ와명부(蛙鳴賦)ㆍ조기자부(弔箕子賦) 등은 모두 빼어난 작품으로 여겨진다.
권2에는 표(表)ㆍ전(箋)ㆍ장(狀)이 23수, 교서(敎書)ㆍ비답(批答)이 10수, 책문(冊文)이 3수, 잠(箴)ㆍ명(銘)ㆍ찬(贊)이 16수 수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지낸 인물인 만큼 사은표(謝恩表)ㆍ방물표(方物表)ㆍ하전(賀箋)ㆍ사전(謝箋)ㆍ교서ㆍ책문 등이 많이 실려 있다. 잠ㆍ명ㆍ찬은 자신의 호 묵소(黙所)ㆍ지리자(支離子)와 연관시킨 삶의 자세이거나 책ㆍ거문고 등을 통한 삶의 지취를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다. 이 가운데 충정당명(忠正堂銘)ㆍ삼화찬(三畫贊)ㆍ지리자자찬(支離子自贊) 등 3수는 말년에 지은 속고다.
권3에 실린 잡저(雜著)는 첫머리에 ‘76수’라고 부기해 놓았는데, 이는 한 편명 아래 여러 수를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즉 우언(寓言) 2수, 방언(放言) 4수, 만기(漫記) 2수, 잡기(雜記) 11수, 책문(策問) 8수, 의연연주(擬演連珠) 20수를 모두 합해 계산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35편이고, 작품 수는 76수이다. 이 가운데 서송구봉현승편후(書宋龜峯玄繩編後)ㆍ서설씨가전후(書偰氏家傳後)ㆍ선대부목천제영발(先大夫木川題詠跋)ㆍ중각백사집발(重刻白沙集跋)ㆍ임술동경계첩발(壬戌同庚稧帖跋)ㆍ인평대군신제상량문(麟坪大君新第上樑文)ㆍ의연연주는 속고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속고로 표기된 편수를 모두 합해도 26수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잡저는 《계곡초고》보다 36수나 첨가되었는데 속고로 표기된 것이 26수밖에 되지 않으므로, 나머지 10수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잡저에 실린 글들에는 저자의 학설이나 주장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많다. 전례사의(典禮私議)ㆍ독정우복의례차(讀鄭愚伏議禮箚)ㆍ답사계선생(答沙溪先生) 등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례와 복제(服制)를 논한 것이고, 위인후위조후변(爲人後爲祖後辯)은 원종(元宗)의 추숭(追崇) 문제를 논한 것이다. 이런 글들은 왕실의 예에 관한 논변이므로 후대 예송 논쟁이 일어나기 전의 서인계 예학(禮學)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설맹장논변(設孟莊論辯)은 맹자와 장자가 서로 만나 도를 논하는 것을 허구적으로 설정한 글이며, 시능궁인변(詩能窮人辯)은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변론한 내용으로 시문학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글이며, 빙호선생전(氷壺先生傳)은 얼음 항아리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이다. 이런 작품들은 문학적으로 주목해 볼만하다. 이 외에도 잡저에는 발문과 후지 등이 다수 들어 있어 문학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
권4에는 설(說) 10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있는 화당설(化堂說)만이 속고로 표기되어 있다. 필설(筆說)은 족제비털에 개털을 섞어서 만든 붓을 두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사대부들을 빗대 비판한 글이며, 해구불하설(海鷗不下說)은 《열자(列子)》에 나오는 일화를 인용해 욕심 없이 담박하게 살고자 하는 의미를 드러낸 글이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은 정자(程子), 주자(朱子), 나정암(羅整庵)이 인심과 도심에 대해 논한 설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마음을 다스려 본성을 회복하는 것은 같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분분하게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저자의 개방적인 학문 성향을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권5에서 권7까지에는 서(序) 53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뒤에 실린 남창잡고서(南窓雜稿序) 이하 11수는 속고이다. 이 가운데 송별하면서 지어 준 송서(送序)가 14수, 유배지로 보내는 서문이 1수, 회갑 등 수연(壽宴)을 경하하며 써 준 서문이 2수, 묵소고갑자서(黙所稿甲自序) 등 자신의 책에 쓴 자서가 4수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시문집 및 언해(諺解)ㆍ주해(註解)ㆍ가승(家乘)ㆍ지도ㆍ첩(帖) 등에 써 준 서문이다. 시문집의 서문 중에는 당대 문명이 높던 신흠(申欽)ㆍ최립(崔岦)ㆍ정철(鄭澈)ㆍ황정욱(黃廷彧)ㆍ홍성민(洪聖民)ㆍ임숙영(任叔英)ㆍ이정귀(李廷龜) 등의 문집에 쓴 서문이 다수 들어 있어 문학적으로 주목해 볼 만하다.
권8에는 기(記) 19수가 실려 있는데, 뒤에 실린 전생서대청중건기(典牲署大廳重建記) 이하 4수는 속고이다. 이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의인화해서 쓴 신명사기(神明舍記)와 신기루를 소재로 하여 쓴 신루기(蜃樓記)는 문학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나머지는 모두 당(堂)이나 누각(樓閣) 등의 건물에 대한 기문이다. 권9에는 제문(祭文) 42수가 실려 있는데, 뒤에 실린 제월사이상공문(祭月沙李相公文) 이하 4수는 속고이다. 이 제문에는 기우제문(祈雨祭文)ㆍ기청제문(祈晴祭文)ㆍ사제문(賜祭文) 등 공적으로 쓴 제문과 윤근수(尹根壽)ㆍ이항복(李恒福)ㆍ정엽(鄭曄)ㆍ이정귀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제문이 함께 들어 있다.
권10에서 권14까지는 묘지(墓誌)ㆍ묘갈(墓碣)ㆍ비명(碑銘) 등 비지 문자(碑誌文字) 45수가 실려 있는데, 묘지는 12수 중 6수가 속고이고, 묘갈은 16수 중 6수가 속고이고, 비명은 17수 중 8수가 속고이다. 전체적으로 45수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20수가 속고이다. 이 가운데에는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지(陵誌)를 비롯하여, 성혼(成渾)ㆍ김천일(金千鎰)ㆍ김장생(金長生) 등 전대 유명 인사들의 비지 문자가 다수 들어 있다.
권15부터 권16까지에는 행장(行狀) 7수가 실려 있는데, 뒤의 2수는 속고이다. 이 행장도 이항복ㆍ이산보(李山甫)ㆍ이수광ㆍ이정귀 등 당대 이름난 재상의 행장이 대부분이다. 권17부터 권20까지에는 소차(疏箚) 78수가 실려 있는데, 권20에 실린 28수는 모두 속고이다. 권21에는 계사(啓辭)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런 상소문에는 계곡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진전례문답차(進典禮問答箚)에는 당시 원종(元宗) 추숭(追崇)과 관련된 예학(禮學)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
권22부터 권24까지는 주본(奏本) 5수, 자문(咨文) 26수, 격(檄) 1수, 정문(呈文) 2수, 첩(帖) 47수 등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첩 2수만 속고이다. 계곡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인 자문을 잘 지었는데, 명 나라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ㆍ황룡(黃龍) 등에게 보낸 자문ㆍ정문 등이 많다. 이는 대체로 저자가 대제학으로 있던 1627년부터 1632년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권25부터 권34까지는 모두 시를 수록했는데, 오언 고시ㆍ칠언 고시ㆍ오언 율시ㆍ오언 배율ㆍ칠언 율시ㆍ칠언 배율ㆍ오언 절구ㆍ칠언 절구ㆍ육언(六言)ㆍ잡체(雜體)로 분류하여 1481수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190여 수가 속고이다. 계곡의 시는 총 1481수로, 그 가운데 고시가 209수, 율시가 841수, 절구가 333수, 배율이 44수, 육언이 10수, 잡체가 44수이다. 수치상으로 보면, 고시보다는 율시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그런데 잡체시를 44수나 남겼다는 점이 주목해 볼 만하다. 잡체시는 이 시기 권필(權韠)ㆍ조위한(趙緯韓) 등에 의해 지어진 한시의 희작화(戱作化)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문사(文辭)에 능한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시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계곡집》과 그 저자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계곡은 한문사대가로 알려져 흔히 문장가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조선 중기의 학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이며, 정치적으로도 인조반정에 참여하는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이제 《계곡집》이 완역되었으니, 앞으로 문학적으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기왕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산문 문학론과 시 문학론에 대해서 보다 정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며, 작품 세계에 대한 정치한 분석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도 다각도에서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 성향을 거시적인 시각으로 구명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7세기 조선 사상계가 정주학 위주로 획일화된 길을 걷던 시기에 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누구보다도 심도 있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정주학적 사유 체계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양명학ㆍ도가ㆍ불가 등 다양한 사상을 두루 수용하려는 개방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계곡처럼 학문의 개방성을 보인 경우는, 조선 성리학이 꽃피어 나던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서경덕(徐敬德)ㆍ조식(曺植)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퇴계ㆍ율곡 이후로는 조선 성리학계가 정주학으로 경도되어 획일화되었는데, 계곡은 그런 경직된 학문 풍토 속에서 다양성ㆍ개방성을 외친 학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곡의 정신 세계는 우리 학술사 내지 정신사에서 그 위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한문사대가 [漢文四大家]
조선 중기 문장에 뛰어났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 등 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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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0일 화요일

六韜直解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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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韜直解≫ 解題

金成愛


≪六韜≫는 周나라 文王‧武王과 太公望이 兵事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기술된 6권의 兵書이다. 흔히 ‘六韜三略’, ‘韜略’이라 하여 ≪三略≫과 함께 병칭되어 병서나 병법의 대명사처럼 쓰였는데, ≪六韜≫의 韜는 ‘숨기다, 감추다’의 뜻으로 활집을 뜻하는 弢자와 같은 의미이니, ≪삼략≫의 略과 같이 병법 책략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 전하는 ≪육도≫의 구성은 ˂文韜˃, ˂武韜˃, ˂龍韜˃, ˂虎韜˃, ˂豹韜˃, ˂犬韜˃ 6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량은 약 16,800여 자로 다른 병서와 비교해볼 때 꽤 많은 분량이다.
≪육도≫의 저자는 周나라 太公望 呂尙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저자만으로 볼 때 武經七書 중 가장 오래된 셈이다. 그러나 ≪육도≫의 저자와 그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의 여타 古書들처럼 논란이 있어왔다. ≪육도≫는 兵學의 始祖라 할 수 있는 太公의 사상을 바탕으로 戰國時代와 漢나라를 거치면서 당시 병법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보태지기도 하고 산삭되기도 하여 현재와 같은 60편으로 정리되었다. 儒家, 法家, 道家 등 諸家 사상을 아우른 통치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孫子≫와 달리 ≪육도≫는 攻守와 防禦, 用兵에서 실전적으로 도움이 될 기술을 자세히 거론하여 장수가 익혀야 할 필수과목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으므로 위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경칠서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1. ≪六韜≫의 전래와 僞書 논란
≪육도≫란 서명이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 ≪莊子≫ ˂徐無鬼˃편이다. 徐無鬼가 제왕을 설득하는 논리를 펼 때 詩, 書, 禮, 樂과 함께 ‘金版 六弢’란 책을 언급하였는데, ≪經典釋文≫에는 여기의 ≪六弢≫가 바로 太公의 ≪六韜≫인 文‧武‧虎‧豹‧龍‧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이미 ≪육도≫라는 이름의 병서가 통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班固의 ≪漢書≫ ˂藝文志˃에는 兵家流에 태공의 ≪육도≫가 실려있지 않고, 儒家流에 ‘周史六弢 六篇’이란 목록이 실려있어 주나라 사관이 기술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그 저작 연도를 주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 혹은 顯王이나 孔子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곧 기원전 676~619년이거나, 공자 생존기로 볼 때 기원전 551~479년, 현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368~321년이니, 이르면 춘추시대 초기, 늦어도 전국시대 후기까지 저작 연도가 내려오게 된다. ≪한서≫ ˂예문지˃ 병가류에는 또 “太公의 병법 237편에 謀가 81편이고, 言이 71편이고, 兵이 85편이다.”라고 하여 ‘周史六弢’와는 별도로 태공의 병법서가 전하는 것처럼 기술하였다.
이후 ≪隋書≫ ˂經籍志˃ 兵家流에 처음으로 ‘太公六韜 五卷 周文王師 姜望 撰’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그 뒤로 역대 史書의 志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이를 보면 ≪육도≫를 강태공의 저서로 보기에는 ˂예문지˃의 기록에서부터 저자와 저작 연대에 대한 모순이 생긴다. 기원전 1100년경에 활약한 강태공이 지었다는 병서가 서명으로 등장한 것이 전국시대 말기이며, 이 또한 강태공의 ≪육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육도≫가 僞書라는 의심은 그 내용적인 면에서 더 강하게 제기되었다. ≪육도≫는 내용과 규모가 광범위하고 역사적 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 내용은 주나라 이후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宋나라 王應麟(1223~1296)은 ˂漢書藝文志考證˃에서 ≪육도≫가 ≪孫子≫나 ≪吳子≫보다 내용적으로 더 이후의 저술이라고 보았으며, 胡應麟(1551~1602) 또한 ≪육도≫는 태공을 사칭해 위조한 것이 확실하다며 魏晉 시대 이후 고대 병서 중 남은 것을 정리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淸代의 고증학자인 崔述(1740~1816)도 ≪考信錄≫에서 ≪육도≫는 秦漢 시대 사람이 고서를 빌려 지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姚際恒(1647~?1715)도 위서라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송대 이후 明淸代 고증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육도≫를 후대의 위서라고 판정하였으며, 이러한 견해를 반영한 것이 ≪四庫全書總目提要≫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의하면, ≪육도≫는 일단 詞意가 천근하여 古書 같지 않고, ˂龍韜˃의 ˂立將˃篇에 보이는 왕이 장수를 임명할 때 ‘避正殿(正殿을 피함)’한다는 표현은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며, ‘將軍’이란 용어도 ≪春秋左氏傳≫에 보이는 주나라 초기에는 이런 명칭조차 없었으니, 강태공의 저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龍韜˃ 중 ˂陰符˃篇에서 陰符를 군사의 符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편찬자가 음부의 뜻을 잘못 안 것으로 더더욱 그 허술함을 드러낸 위서의 증거로 해석하였다. 그 외에 전국 말기에나 나오는 궁노수, 投機 등의 병기가 언급된 점이나 주나라 때는 전차병 위주였는데 전국시대 이후에야 나오는 步兵, 騎兵에 대한 전술이 언급된 점,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전법인 攻城戰에 대해 논한 것 등은 본서가 후대의 위서라는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僞書로 취급받던 ≪육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계기는 1972년 4월 山東省 銀雀山의 竹簡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은작산 묘는 西漢 초기인 기원전 140~118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孫子兵法≫과 ≪吳子≫ 등 다른 병서와 함께 ≪육도≫ 14편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죽간의 분량은 약 4,000여 자이고 그 내용은 ˂文韜˃의 ˂文師˃篇, ˂六守˃篇, ˂守土˃篇, ˂守國˃篇, ˂武韜˃의 ˂發啓˃篇, ˂文啓˃篇, ˂三疑˃篇 등이다. 그렇다면 종전에 魏晉 시대에 위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육도≫의 성립연대는 적어도 전국시대 말기이거나 서한 초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죽간의 발견으로 현대 역사학자들은 ≪육도≫의 성립 연대가 魏나라 惠王과 襄王 사이라고 한 班固의 의견이 정확하다고 보고 있다. ≪육도≫는 결코 위작이 아니며 책의 성립 시기가 이르기 때문에 복잡한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바뀐 부분이 많아 초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하는 ≪육도≫는 송나라 무경칠서 판본만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銀雀山 漢墓에서 출간된 죽간으로 이 책의 성립 연대를 증명할 수 있으며, 또 일부 유실된 부분이 보충됨으로써 ≪육도≫의 원본에 더욱 가까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六韜直解≫ 解題이외에 1973년 河北省 定縣에 소재한 中山懷王 劉修의 묘에서도 1,400여 자의 太公 竹簡이 출토되었다. 유수는 한나라 宣帝 五鳳 3년(B.C. 55)에 졸하였으므로 이 죽간이 쓰인 연대도 그 이전일 것이다. 은작산 한묘나 중산회왕의 묘에서 ≪육도≫의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 ≪육도≫는 한나라 이전이나 한초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진 시대의 위작이란 설은 잘못된 것이다.
≪육도≫는 周 文王의 스승인 太公의 병가 사상을 주나라 史官이 기록한 것이며, 이후 전국과 진‧한을 거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학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부연하여 저술한 것이 수백 편이나 있었다. 이후 한나라 때 黃石公이 이를 바탕으로 연구해 張良에게 전승된 것이 ≪三略≫이고, 주요 내용만 간추려 편찬해 전승된 것이 ≪六韜≫ 60편이라 볼 수 있다.
≪六韜直解≫를 편찬한 劉寅은 서문에서, 한나라 成帝 때 任宏이 兵書를 논하는 말 중에는 ≪육도≫가 포함되지 않았고, 당나라 李靖의 말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면서 “아마도 ≪六韜≫와 ≪三略≫은 먼저는 본래 太公이 남긴 책이었는데, 周나라 사관과 黃石公이 미루어 부연하여 더 추가한 것인 듯하다. 謀와 言과 兵은 모두 ≪六韜≫ 가운데 있으니, 아마도 후세 사람들이 삭제하고 중요하게 사용할 내용을 취하여 다만 60편을 남겨두었는가 보다. 이제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유인은 본서가 한나라 이전의 책이라는 점에는 의심을 표하였지만, 강태공의 사상을 담은 책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부연되고 산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변개가 있었으리라고 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한 것이다.


2. 姜太公과 ≪六韜≫의 思想
≪한서≫ ˂예문지˃에 太公의 병법으로 謀가 81편, 言이 71편, 兵이 85편으로 모두 237편이 전한다고 하였는데, 이외에도 역대 병서 중 태공의 저술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많다. ≪隋書≫ ˂經籍志˃에도 ≪太公六韜≫ 외에 ≪太公陰謀≫, ≪太公金匱≫, ≪太公兵法≫, ≪太公三宮兵法≫ 등 10여 종의 병서가 전한다. 이 많은 병서가 모두 태공의 저작이라기보다는 후대인들이 태공의 이름을 가탁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六韜≫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공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후인들의 添削이 부단히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병가에서는 무엇 때문에 태공을 추숭해왔는지 태공은 어떤 이미지 때문에 병가의 시조가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唐나라 때에 文廟에 孔子를 모시고 武廟에 太公을 모시기도 하였는데, 이는 후인들이 인식하는 태공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다. 태공의 사적에 대해서는 ≪史記≫와 몇몇 野史에 수록된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많지 않으므로 ≪사기≫와 후대의 기록, ≪육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태공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일단 명칭부터 살펴보자면 太公은 성이 姜이고 이름은 牙이니 姜牙이다. 문왕이 그를 만난 뒤 자신의 태공 즉 古公亶父가 항상 바라던 인재라 하여 太公望이라 불러서 이를 줄여 太公, 또는 姜太公이라 불렸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는 軍師로 모셔 師尙父라고 불렀으며, 태공의 조상이 과거에 呂 땅에 봉해졌다는 이유로 呂尙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東海人으로 선조가 四嶽을 맡아 禹임금의 치수를 도왔다고 하므로 상당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태공이 문왕을 만나게 된 일화를 ≪사기≫에서는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먼저 널리 알려진 대로 渭水 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사냥을 나온 문왕을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마음이 맞아 바로 초빙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하나는 태공이 일찍이 殷나라 紂王을 섬겼는데 그의 무도함을 보고 떠난 뒤 제후들을 유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 문왕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또 문왕이 羑里에 구금되어 있을 때 散宜生, 閎hóng夭 등과 모의하여 미녀와 재물을 주왕에게 바치고 구출해왔다는 일화가 있다.
어떤 경유로든 태공은 문왕과 무왕의 군사가 되었으며, 은나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權謀와 奇計를 내었다. 때문에 후세에 兵事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나 주나라의 계책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태공이 모든 모의를 주도했다고 하여 문왕이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것도 태공의 계획 덕분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모의를 통해 적국을 이간하고 적국의 백성을 회유하는 것은 바로 ≪六韜≫의 ˂文韜˃에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무왕이 즉위한 뒤에 800여 제후들과 盟津에 모여 세력을 확인하였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2년 후에 다시 殷나라 정벌에 나선다. 이때에 거북의 점이 불길하고 폭우가 내려 거사를 망설이자 태공이 강권하여 정벌에 나섰고 결국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곡식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箕子를 풀어주어 인심을 무마하는 등 주나라의 천하로서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도 역시 태공의 도움이 컸다. 태공은 齊나라에 봉해져 자기 나라에 간 뒤에 그 지역의 풍속을 따르고 禮를 간략히 하며 商工業을 흥기시키고 魚鹽의 이익으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결국 제후국 중에 강대국이 되었다. 이런 정사는 바로 ≪六韜≫ ˂文師˃편에 나오는 백성과 이익을 함께하면 천하가 귀의해 복종한다는 사상을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제나라에서 일찍부터 管子, 孫武, 司馬穰苴 등 法家와 兵家의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도 태공의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이 시기에 무력을 통해 이를 수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태공이었으므로, 그는 후세에 武功을 통해 역사를 바꾼 성공 사례로 兵家의 始祖로 여겨졌다. 이러한 성공의 경험은 춘추전국 시대라는 치열하고도 혼란한 국가의 생존경쟁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고, 수많은 전략가들은 저마다 새로운 태공이 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때문에 태공의 사상이 주나라 사관에 의해 기록되고, 이후 병학을 연구하는 자들도 저마다 태공의 이름을 가탁하여 자신의 저작을 첨가하거나 새로이 태공이란 이름으로 저술을 남겼던 것이다. 따라서 ≪육도≫에 보이는 사상은 태공 이후 春秋戰國, 秦漢 시기에 무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 ≪六韜≫의 내용과 구성
≪육도≫는 기본적으로 병서이기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취하는 법에 대해 논한 것이지만, ≪육도≫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후대의 병서와 달리 훨씬 깊이가 있다. 일단 ≪육도≫는 ≪孫子≫의 義疏라고 불릴 만큼 손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를 다양한 방면에서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기술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예컨대 ≪손자≫에는 “兵이라는 것은 속이는 방도이다.[兵者 詭道也]”
라는 대명제를 기술하였을 뿐, 상식과 원칙을 강조하여 실천적인 방책을 구체적으로 논한 부분이 많지 않다. 반면 ≪六韜≫ ˂武韜 文伐˃篇에서는 전투가 아닌 謀略으로 적을 속여 승리를 취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논하면서 美人計, 離間計, 賂物과 買收 등 각종 속임수를 나열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손자≫에는 전쟁은 나라의 대사라고 보아 되도록 피해야 할 일로 보고 있는데, ≪육도≫에는 천하의 어지러움과 다툼을 화합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평소 전쟁준비의 바탕이 되는 농업, 상업, 공업 등 경제활동을 중요시하고 정권의 도덕적 명분과 백성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또 ≪육도≫에서는 전통적인 유가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상이 곳곳에 보인다. 특히 ˂文韜 明傳˃篇의 “義가 욕심을 이기면 창성하고 욕심이 義를 이기면 망하며, 恭敬이 怠慢함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함이 공경을 이기면 멸망한다.”
란 구절은 태공이 武王에게 올렸다는 ˂丹書˃의 유명한 문장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육도≫에는 전국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하는 요소들이 많으며, 전국시대에 주로 쓰이던 철제병기와 쇠뇌, 步兵과 騎兵을 중시하였다. 또 ˂五音˃과 ˂兵徵˃에서 음양오행설로 적의 정세를 판단하고 공격을 결정하는 등 다소 현실적이지 못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면 때문에 위서의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얻은 역사적 교훈과 제가의 사상이 융합되었을 뿐 아니라, 奇計와 詭謀까지 녹아들어간 것이 오히려 ≪육도≫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이하에서 각 권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육도≫의 구성은 앞에서 말한 대로 6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도직해≫에는 각 편의 첫머리에 내용을 요약 정리해두어 내용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편명은 대개 편의 주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편중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제1권 ˂文韜˃에는 ˂文師˃, ˂盈虛˃, ˂國務˃, ˂大禮˃, ˂明傳˃, ˂六守˃, ˂守土˃, ˂守國˃, ˂上賢˃, ˂擧賢˃, ˂賞罰˃, ˂兵道˃ 등 12편이 실려있다. 文王이 처음에 태공 呂尙을 만나 스승으로 삼게 된 경위와 이후 문답을 통해 천하를 취하고 다스리는 방략, 민심을 수습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 상벌을 분명히 시행하고, 통일된 지휘권과 군 체계를 정립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11편까지는 文王과의 문답이고 ˂兵道˃만 武王과의 문답이어서 내용상 이 부분은 같은 무왕과의 문답인 ˂武韜˃의 ˂三疑˃篇에 있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시기였으므로 어떻게 천하를 취할 것인가는 문왕과 무왕의 가장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제2권 ˂武韜˃는 ˂發啓˃, ˂文啓˃, ˂文伐˃, ˂順啓˃, ˂三疑˃ 5편으로, 앞의 4편은 문왕과의 문답이다. ˂무도˃는 전략적 시각에서 修德과 安民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민심을 얻고 기회를 잡아 적을 붕괴시켜서 최소의 대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바로 전쟁의 목표인 것이다. 이를 위해 ˂文伐˃篇과 ˂三疑˃篇에서는 모략을 써서 전쟁하지 않고도 승리하는 12가지 방법과 3가지 계책을 기술하였는데, 뇌물을 아끼지 말고 풀어서 적국의 군신간을 이간하고 미인과 음악으로 지배층의 욕망을 자극하며 적국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회유하는 것 등이다.
제3권 ˂龍韜˃는 ˂王翼˃, ˂論將˃, ˂選將˃, ˂立將˃, ˂將威˃, ˂勵軍˃, ˂陰符˃, ˂陰書˃, ˂軍勢˃, ˂奇兵˃, ˂五音˃, ˂兵徵˃, ˂農器˃ 등 13편이다. 이하는 모두 무왕과의 문답이다. 앞부분은 군제의 편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이어서 장수의 선발, 평가, 임명, 권위 부여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군의 운용방식이 실려있다. 이 중 ˂陰符˃篇은 군주와 장수가 서로 은밀하게 통신할 때 쓰는 8종류의 符節을 음부라고 하고 암호문서를 陰書라고 하여 암호문을 만드는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고대의 음부는 대개 道家나 신선술과 관련된 符籍 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이 편은 후대의 찬자가 잘못 찬입한 부분이라는 설도 있다. ˂奇兵˃편은 지세와 상황에 따라 어떤 전술과 어떤 무기를 써야 할지 구체적으로 기술한 편으로 이 부분은 당시의 작전경험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4권 ˂虎韜˃는 ˂軍用˃, ˂三陳˃, ˂疾戰˃, ˂必出˃, ˂軍略˃, ˂臨境˃, ˂動靜˃, ˂金鼓˃, ˂絶道˃, ˂略地˃, ˂火戰˃, ˂壘虛˃ 등 12편이 실려있다. ˂호도˃는 출병할 때 필요한 군의 병기와 장비, 진법과 작전 요령 등에 관해 언급한 부분인데, 특히 첫 번째 ˂軍用˃篇은 당시 군사기술의 수준을 반영한 편이라 볼 수 있다. 疾戰과 必出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기 위한 전략이고, 이하는 성을 공격하거나 보루를 구축할 때,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는 경우, 적지에서 교전하는 상황, 보급로의 단절시 대처 요령, 화공을 계획할 때 등 다양한 전술이 실려있다.
제5권 ˂豹韜˃는 ˂林戰˃을 비롯하여 ˂突戰˃, ˂敵强˃, ˂敵武˃, ˂烏雲山兵˃, ˂烏雲澤兵˃, ˂少衆˃, ˂分險˃ 등 8편이 실려있다. ˂표도˃에는 산림수택에서의 작전 원칙과 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방법 등이 자세히 실려있다. ˂烏雲山兵˃은 산 위에 진을 쳐야 할 때, ˂烏雲澤兵˃은 늪에서 적과 대치할 때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烏雲陣을 이용해 승리하는 비법을 논한 것이다. ˂少衆˃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의 방법이고, ˂分險˃은 험지에서 대적할 경우의 작전을 기술한 것이다.
제6권 ˂犬韜˃는 ˂分合˃, ˂武鋒˃, ˂練士˃, ˂敎戰˃, ˂均兵˃, ˂武車士˃, ˂武騎士˃, ˂戰車˃, ˂戰騎˃, ˂戰步˃ 등 10편이 실려있다. ˂견도˃는 군의 조직과 훈련방법, 특히 전차병, 기병, 보병의 특징에 따른 편성과 운용방법을 자세히 열거한 편이다. ˂分合˃과 ˂武鋒˃은 흩어져있던 진영을 합하고 적의 14가지 변화를 살펴 공격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정예병의 선발을 논한 ˂練士˃에서는 무력이 뛰어난 용사뿐 아니라 복수심이나 부귀공명을 이루기 위해, 신분을 상승하기 위해, 죄를 代贖하기 위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까지 모두 유별로 구분하여 선발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敎戰˃, ˂均兵˃에서는 명령을 이해하고 무기를 다루는 법, 전진하고 후퇴하는 제식훈련 등의 훈련방법과 지형에 따라 戰車 1대가 80명의 步兵을 상대하고 騎兵 1기가 8명의 步兵을 상대할 수 있다고 전력을 비교하며 구체적인 부대조직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육도≫에는 용병의 철학뿐 아니라 직면한 상황에 따라 당장에 응용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역대 장수들의 필수 교과서로 중시되었다. ≪육도≫를 僞書라고 평가했던 구준 [丘濬, qiū xùn] 도 ≪大學衍義補≫에서 “˂龍韜˃ 이하 43편은 여러 상황에 조리있게 계획하고 방어를 미리 설비하는 내용이니, 모두 병사를 다스리는 자가 강습해야 할 것이다. ≪孫子≫의 의론은 매우 수준이 높아서 헤아릴 수 없으나, 이 43편은 매우 자세하고 시행 사항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마치 ≪손자≫의 義疏와 같다.”
라고 하여 ≪육도≫의 실용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4. 우리나라의 ≪六韜直解≫와 번역서
우리나라에 ≪六韜≫와 ≪三略≫이 언제 수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을 통해 보면 고려 초부터 兵書의 대명사로 쓰였다. 고려 王融이 지은 金傅에게 내리는 교서에 ≪육도≫와 ≪삼략≫을 흉중에 품고 있다는 표현을 썼으며, 李奎報의 ≪東國李相國集≫에는 ˂龍韜˃의 계책을 익혔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때 ≪육도≫와 ≪삼략≫을 무경칠서의 하나로 존중하여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삼아서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때문에 여러 차례 무경칠서의 하나로 간행되었으며, 무학을 익히는 무인뿐 아니라 문인도 文武의 견식을 겸비한다는 입장에서 ≪孫子≫와 함께 널리 읽어왔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육도≫가 太公의 실제 저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洪奭周는 ≪淵泉集≫ ˂諸子精言跋˃에서 “≪육도≫와 ≪삼략≫은 모두 한나라 이후의 책이다. 그러나 ≪육도≫의 글은 지루하고 ≪삼략≫의 글은 간략하며, ≪육도≫는 병사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많고 ≪삼략≫은 치국에 대해 논한 것이 많으며, ≪육도≫는 권모술수를 숭상하였으나 ≪삼략≫은 오히려 정도에 가깝다.”
라고 하여 ≪육도≫보다 ≪삼략≫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둘 다 한나라 이후의 위서라고 보는 시각은 명청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시대에 ≪육도≫가 무경칠서의 하나로 유통되었을 뿐 ≪손자≫와는 달리 별다른 주석이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대에도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明代 이후에 나온 ≪紀效新書≫ 같은 병서의 연구와 간행에 힘쓰고 무인들에게도 중국 고대의 병서보다는 새로운 병서를 익힐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전쟁의 양상과 군력, 군비가 달라지면서 그에 걸맞는 전략 전술이 개발되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孫子≫는 武經의 상징으로 계속 주목받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전에 응용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졌던 ≪육도≫는 그 실전의 상황이 바뀌자 고대의 군사 자료로서만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다만 중국 고전의 하나로서 번역은 일찍부터 이루어져서 10여 종의 번역서가 있는데, 원문 위주로만 번역되었고 武經七書直解를 대본으로 하여 주석까지 모두 번역한 것은 본 번역서가 최초이다. 본 번역서에서는 직해를 완역했을 뿐 아니라 직해에서 거론한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도 모두 자세한 주해를 붙이고 각 편의 머리에 해당 편의 대의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따라서 무경의 고전으로서 ≪六韜≫ 본문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명대의 학자가 본서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점도 흥미 있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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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5일 목요일

난설헌시집(蘭雪軒詩集)

한국고전번역원 해제

김기빈(金圻彬)

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동생 許筠이 지은 跋文에 의하면, 매우 많았지만 遺命에 따라 소각하여 전하는 것이 매우 적은데 이것은 모두 許筠이 평소 암송한 것을 기록하여 편집해 놓은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전하는 「蘭雪軒詩集」에는 이른바 甲寅字 계열의 活字本, 刊記가 없는 목판본과 있는 목판본, 新活字本이 있다. 이 가운데 갑인자 계열의 활자본을 초간본으로 보는 데 대해 異論이 많은데, 목판본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활자본을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과 〈染指鳳仙花歌〉, 〈廣寒殿白玉樓上樑文〉 등 목판본에 더 들어간 저작에 대해 許筠의 僞作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활자본을 초간본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許筠은 저자의 시집을 간행하고자 하여 일찍이 1591년(선조 24)에 柳成龍에게 序文까지 받았다. (惺所覆瓿稿 권20 上西厓相, 西厓集 권4 跋蘭雪軒集) 그러나 임란을 겪는 와중에 이 서문도 잃어버리고 간행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05년에 仲兄 許篈의 「荷谷集」을 遂安 郡守로 있으면서 목판으로 간행하는 등 世稿의 편찬과 간행에 주력하였는데, 이즈음 누이 난설헌의 詩稿도 편차하여 두었던 것 같다.
이후 1606년 1월에 許筠이 중국 사신 朱之蕃과 梁有年의 원접사 종사관이 되었는데, 朱之蕃에게는 3월 27일에 嘉山에서 머물 때 저자의 詩卷을 보여 주고 서문을 부탁하여 4월 20일 回程에 小引을 받았고, 梁有年에게는 4월 25일 回程에 世稿의 序를 부탁하였으나 미처 받지 못하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다시 한 질을 보내어 부탁해서 그해 12월에 지어 보내 준 題辭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두 사신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급히 활자본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通文館藏本의 갑인자 계열 활자본은 바로 이 활자본에 小引과 題辭만을 새로 찍어 합쳐서 1606년 12월 이후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간본》
그 뒤 1608년(선조 41) 4월에 許筠은 公州 牧使로 있으면서 다시 칠언고시, 오언과 칠언 율시 및 부록으로 〈廣寒殿白玉樓上樑文〉 등을 더 넣어 再編하고 자신의 跋文을 덧붙여 목판본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중간본》 현재 규장각(想白古811. 53-H41n), 국립중앙도서관(위창古3648-文98-2)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로는 1692년(숙종 18)에 東萊府에서 중간본을 저본으로 다시 시집을 간행하였다. 《삼간본》 이 삼간본에는 권말에 ‘崇禎後壬申東萊府重刊’이란 刊記가 판각되어 있는데, 이는 활자본을 초간으로 보지 않은 때문이다. 현재 규장각(想白古811. 53-H41n2),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32, 일산古3644-75), 장서각(4-5833)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2년에는 서울의 辛亥唫社에서 목판본의 훼손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新活字로 시집을 간행하였다. 《사간본》 이 사간본에는 짤막한 〈蘭雪軒傳略〉과 1912년에 중국의 吳自蕙가 쓴 跋이 붙어 있으며, 저자의 시를 次韻한 宣祖 때의 여류 시인의 시집인 「景蘭集」이 合附되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위창古3648-文98-3)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저자의 시문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에서는 朱之蕃 등에 의해 널리 퍼져 朱彝尊의 「明詩綜」, 錢謙益의 「列朝詩集」 등에 抄選되었고, 일본에서도 임란 때 가져가 1711년 文台屋次郞에 의해 開版되기까지 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608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영인 과정에서 小引, 題辭, 跋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위창古3648-文98-2)으로 대체하였다.
小引(朱之蕃 撰), 題辭(梁有年 撰), 跋(許筠 撰), 宣祖實錄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 시집은 불분권 1책으로 총 39판이다.
권수에는 중국 사신 朱之蕃이 적은 小引과 梁有年이 지은 題辭가 실려 있다.
詩는 詩體別로 오언고시 5題, 칠언고시 5題, 오언율시 5題, 칠언율시 9題, 오언절구 9題, 칠언절구 16題 총 49題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 3편이 실려 있다. 오언고시의 〈寄荷谷〉, 칠언고시 전편, 오언율시와 칠언율시 전편, 부록의 〈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목판본으로 중간할 때 더 들어간 작품이다. 저자의 작품 특성에 관해서는 뛰어난 여류 시인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樂府體의 시, 閨怨을 읊은 시, 肉親의 情을 읊은 시, 仙境의 理想鄕을 읊은 시 들이 많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저자의 시에 대한 평가는, 저자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 대해서는 다들 인정하면서도 저자의 시를 암송하여 편찬한 동생 許筠이 중국 시를 표절하거나 僞作하여 聲勢를 높이려 하였다는 등의 비난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金時讓은 「涪溪記聞」에서 〈送宮人入道〉의 두 구절이 중국 시의 표절임을 말하였고, 申欽은 「象村稿」권52에서 〈次孫內翰北里韻〉과 〈遊仙詞〉에 古人의 시가 태반이라고 하였고, 李睟光은 「芝峯類說」권14 文章部7 閨秀詩에서 〈染指鳳仙花歌〉, 〈遊仙詞〉, 〈送宮人入道〉 등이 명 나라 시인 작품의 표절이라 하고 一家인 참의 洪慶臣과 정랑 許𥛚이 ‘난설헌의 시는 2, 3편 외에는 모두 僞作이고, 〈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許筠이 李再榮과 함께 찬술한 것이다.’ 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金萬重도 「西浦漫筆」下에서, 사람들이 드물게 보는 원 나라나 명 나라 시인의 아름다운 시구를 집어넣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과 동시대에 살았던 南龍翼은 「壺谷詩話」에서, 格調를 볼 때 荷谷이 許筠보다 높고 저자가 하곡보다 높으니 허균이 저자에 미치지 못할 바라고 하여 허균의 위작설을 반박하였다.
맨 뒤에 許筠이 1608년에 重刊하면서 지은 跋文이 있다.


蘭雪齋詩集小引

朱之蕃
閨房之秀。擷英吐華。亦天地山川之所鍾靈。不容施。亦不容遏也。漢曹大家成敦史以紹家聲。唐徐賢妃諫征伐以動英主。皆丈夫所難能而一女子辦之。良足千古矣。卽彤管遺編所載。不可縷數。乃慧性靈襟不可泯滅。則均焉。卽嘲風咏月。何可盡廢。以今觀於許氏蘭雪齋集。又飄飄乎塵埃之外。秀而不靡。沖而有骨。遊仙諸作。更屬當家想其本質。乃雙成飛瓊之流亞。偶謫海邦。去蓬壺瑤島。不過隔衣帶水。玉樓一成。鸞書旋召。斷行殘墨。皆成珠玉。落在人間。永光玄賞。又豈叔眞易安輩悲吟苦思。以寫其不平之衷。而總爲兒女子之嘻笑顰蹙者哉。許門多才。昆弟皆以文學重於東國。以手足之誼。輯其稿之僅存者以傳。予得寓目。輒題數語而歸之。觀斯集。當知予言之匪謬也。
萬曆丙午孟夏廿日。朱之蕃書於碧蹄館中。

蘭雪軒集題辭

梁有年
余使朝鮮。禮賓寺許副正。出其世稿索余言。而稿目中有蘭雪集。則其故姊氏所著云。會趨程。未及錄示。余旣歸 朝。端甫寄余一帙。展誦廻環。其渢渢乎古先。飄飄乎物外。誠匪人間世所恒有者。余於是益信東國山川之靈。孕毓有餘。許氏家門之瑞。長發不匱。弗獨偉丈夫輩出之爲烈者。唐永徽初。新羅王眞德。織錦作太平詩以獻。載入唐音。至今膾炙相傳。謂爲其先王眞平之女。然則女中聲韻。在東方從來旣遠。而蘭雪集。尤其趾美獨盛者哉。采以附諸 皇明大雅。流傳萬葉。厥有史氏在矣。
萬曆丙午嘉平旣望。 賜進士出身。文林郞刑科都給事中。前翰林院庶吉士 欽差朝鮮副使
賜一品服南海梁有年書稿。


蘭雪軒詩集跋

許筠
夫人姓許氏自號蘭雪軒。於筠爲第三姊。嫁著作郞金君誠立。早卒無嗣。平生著述甚富。遺命茶毗之。所傳至尠。俱出於筠臆記。恐其久而愈忘失。爰災於木。以廣傳云。時萬曆紀元之三十六載孟夏上浣。弟許筠端甫。書于披香堂。


遣興 

梧桐生嶧陽。幾年傲寒陰。幸遇稀代工。劚取爲鳴琴。琴成彈一曲。擧世無知音。所以廣陵散。終古聲堙沈。

鳳凰出丹穴。九苞燦文章。覽德翔千仞。噦噦鳴朝陽。稻梁非所求。竹實乃其飡。奈何梧桐枝。反棲鴟與鳶。

我有一端綺。拂拭光凌亂。對織雙鳳凰。文章何燦爛。幾年篋中藏。今朝持贈郞。不惜作君袴。莫作他人裳。

精金凝寶氣。鏤作半月光。嫁時舅姑贈。繫在紅羅裳。今日贈君行。願君爲雜佩。不惜棄道上。莫結新人帶。

近者崔白輩。攻詩軌盛唐。寥寥大雅音。得此復鏗鏘。下僚困光祿。邊郡愁積薪。年位共零落。始信詩窮人。

仙人騎綵鳳。夜下朝元宮。絳幡拂海雲。霓衣鳴春風。邀我瑤池岑。飮我流霞鐘。借我綠玉杖。登我芙蓉峯。

有客自遠方。遺我雙鯉魚。剖之何所見。中有尺素書。上言長相思。下問今何如。讀書知君意。零淚沾衣裾。

芳樹藹初綠。蘼蕪葉已齊。春物自姸華。我獨多悲悽。壁上五岳圖。牀頭參同契。煉丹倘有成。歸謁蒼梧帝。



廣寒殿白玉樓上樑文


述夫。寶蓋懸空。雲輧超色相之界。銀樓耀日。霞楹出迷塵之壺。雖復仙螺運機。幻作璧瓦之殿。翠蜃吹霧。噓成玉樹之宮。靑城丈人。玉帳之術斯殫。碧海王子。金櫝之方畢施。自天作之。非人力也。主人名編瑤籍。職綴瓊班。乘龍太淸。朝發蓬萊暮宿方丈。駕鶴三島。左挹浮丘右拍洪厓。千年玄圃之棲遲。一夢人間之塵土。黃庭誤讀。謫下無央之宮。赤繩結緣。悔入有窮之室。壺中靈藥。纔下指於玄砂。脚底銀蟾。遽逃形於桂字。咲脫紅埃赤日。重披紫府丹霞。鸞笙鳳管之神遊。喜續舊會。錦幕銀屛之孀宿。悔過今宵。胡爲日宮之思綸。俾掌月殿之牋奏。官曹淸切。足踐八霞之司。地望崇高。名壓五雲之閣。
寒生玉斧。樹下之吳質無眠。樂奏霓裳。欄邊之素娥呈舞。玲瓏霞佩。振霞錦於仙衣。熠燿星冠。點星珠於人勝。仍思列仙之來會。尙乏上界之樓居。靑鸞引玉妃之車。羽葆前路。白虎駕朝元之使。金綅後塵。劉安轉經。拔雙龍於案上。姬滿逐日。駐八風於山阿。宵迎上元。綠髮散三角之髻。晝接帝女。金梭織九紋之綃。瑤池衆眞會南峯。玉京群帝集北斗。唐宗踏公遠之杖。得羽衣於三章。水帝對火仙之棋。賭寰宇於一局。不有紅樓之高構。何安絳節之來朝。於是。移章十洲。馳檄九海。囚匠星於屋底。木宿掄材。壓鐵山於楹間。金精動色。坤靈揮鑿。騁巧思於般倕。大冶鎔鑪。運奇智於錘範
靑赮垂尾。雙虹飮星宿之河。赤霓昂頭。六鼇戴蓬萊之島。璇題燭日。出彤閣於煙中。綺綴流星。架翠廊於雲表。魚緝鱗於玉瓦。雁列齒於瑤階。
微連捧旂。下月節於重霧。鳧伯樹纛。設蘭幄於三辰。金繩結綺戶之流蘇。珠網護雕欄之阿閣。仙人在棟。氣吹彩鳳之香臺。玉女臨窓。水溢雙鸞之鏡匣。翡翠簾雲母屛靑玉案。瑞靄宵凝。芙蓉帳孔雀扇白銀床。祥蜺晝鎖。爰設鳳儀之宴。俾展燕賀之誠。旁招百靈。廣延千聖。邀王母於北海。斑麟踏花。接老子於西關。靑牛臥草。
瑤軒張錦紋之幕。寶簷低霞色之帷。獻蜜蜂王。紛飛炊玉之室。含果雁帝。出入薦瓊之廚。雙成鈿管晏香銀箏。合鈞天之雅曲。婉華淸歌飛瓊巧舞。雜駭空之靈音。龍頭瀉鳳髓之醪。鶴背捧麟脯之饌。琳筵玉席。光搖九枝之燈。碧藕氷桃。盤盛八海之影。獨恨瓊楣之乏句。繄致上仙之興嗟。淸平進詞。太白醉鯨背之已久。玉臺摛𦸂。長吉咲蛇神之太多。新宮勒銘。山玄卿之雕琢。上界鐫壁。蔡眞人之寂寥。自慙三生之墮塵。誤登九皇之辟剡。江郞才盡。夢退五色之花。梁客詩催。鉢徹三聲之響。徐援彤管。咲展紅牋。河懸泉湧。不必覆于安之衾。句麗文遒。未應頮세수할 회謫仙之面。立進錦囊之神語。留作瑤宮之盛觀。置諸雙樑。資於六偉。
拋梁東。曉騎仙鳳入珠宮。平明日出扶桑底。萬縷丹霞射海紅。拋梁南。玉龍無事飮珠潭。銀床睡起花陰午。咲喚瑤姬脫碧衫。拋梁西。碧花零露彩鸞啼。春羅玉字邀王母。鶴馭催歸日已低。拋梁北。溟海茫洋浸斗極。鵬翼擊天風力掀。九霄雲垂雨氣黑。拋樑上。曙色微明雲錦帳。仙夢初回白玉床。臥聞北斗廻杓響。拋樑下。八垓雲黑知昏夜。侍兒報道水晶寒。曉霜已結鴛鴦瓦。伏願上樑之後。琪花不老。瑤草長春。曦舒凋光。御鸞輿而猶戲。陸海變色。駕飆輪而尙存。銀窓壓霞。下視九萬里依微世界。璧戶臨海。咲看三千年淸淺桑田。手回三霄日星。身遊九天風露。

“대저 보옥으로 만든 일산(日傘)이 창공에 걸려 있으매 구름 같은 수레는 색상(色相)의 세계를 초월하였고, 은으로 만든 누각이 햇빛에 번쩍거리매 노을 같은 들보는 티끌 같은 속세(俗世)를 벗어났도다.
신선이 부는 소라로 기틀을 운용하여 구슬 기와의 전각을 만들었으며, 푸른빛의 입술로 안개를 불어 내어 옥기둥의 궁궐을 지었도다. 청성장인(靑城丈人)은 옥휘장을 만드는 기술을 다하였고, 벽해왕자(碧海王子)는 금궤짝을 만드는 방술을 다하였도다. 이것은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도다.
누각 주인의 이름이 신선들의 명부에 실려 있고, 관직이 신선들의 반열에 들어 있도다. 용을 타고 태청궁(太淸宮)으로 향하매 아침에 봉래산(蓬萊山)을 떠나 저녁에 방장산(方丈山)에 묵으며, 학을 타고 삼도(三島)로 향할새 왼편으로는 부구산(浮邱山)을 잡아당기고, 오른편으로는 홍애(洪厓)를 치도다.
천년 세월도 현포(玄圃)에서는 짧은 머묾이요, 하룻밤 꿈도 인간 세상에서는 한낱 티끌이도다. 《황정경(黃庭經)》을 잘못 읽은 탓에 무앙(無央)의 궁궐로 귀양을 내려왔고, 적승(赤繩) 노파가 인연을 맺어 주매 잘못 유궁씨(有窮氏)의 배필이 되었도다. 단지 속에 영묘한 약이 있으매 이제 막 현사(玄砂)에 손이 내려가는데, 발밑의 은 두꺼비는 갑자기 계우(桂宇) 속으로 도망치도다.
웃으면서 붉은 먼지와 붉은 해에서 벗어나고, 다시금 자부(紫府)의 붉은 노을을 헤치도다. 신선은 난새의 피리와 봉새의 젓대를 불면서 노니매 옛날의 만남을 이어 가는 것을 기뻐하고, 청상과부는 비단 휘장이 드리우고 은병풍이 펼쳐진 방에 묵으매 이 밤이 지나가는 것을 한스러워 하도다.
어찌해야 일궁(日宮)의 은륜(恩綸)을 짓고, 월전(月殿)의 전주(牋奏)를 관장하게 하리오. 관청이 깨끗하매 발은 팔하(八霞)의 관사(官司)를 밟았으며, 지망(地望)이 높으매 이름은 오운(五雲)의 전각(殿閣)을 눌렀도다.
찬 기운이 옥도끼에서 생겨나매 계수나무 아래의 오질(吳質)은 잠을 못 이루고, 풍악이 예상곡(霓裳曲)을 연주하매 난간 가의 소아(素娥)가 춤을 추도다. 영롱한 하패(霞佩)를 차니 노을 비단이 선의(仙衣)에 찬란하고, 번쩍이는 성관(星冠)을 쓰니 별 구슬이 인승(人勝)에서 반짝이도다. 이어 여러 신선들이 몰려올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하늘나라의 누각이 모자라는도다.
청란(靑鸞)이 선녀가 탄 수레를 끌고 오매 깃털 장식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백호(白虎)가 조회하러 오는 사자를 태우고 오매 금색 수술이 뒤에서 티끌을 일으키도다.
유안(劉安)은 경문(經文)을 읽으면서 책상 위에서 쌍룡검(雙龍劍)을 뽑았으며, 희만(姬滿)은 해를 쫓아가 산골짜기에서 팔풍(八風)을 머물렀도다.
밤중에 상원부인(上元夫人)을 맞이하매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세모지게 틀었으며, 낮에 제녀(帝女)를 만나 보매 금북으로 아홉 무늬의 비단을 짜고 있도다.
요지(瑤池)의 여러 신선들은 남쪽 봉우리에 모였고, 옥경(玉京)의 여러 제왕들은 북두성(北斗星)에 모였도다.
당종(唐宗)은 공원(公遠)의 지팡이를 밟았다가 신선 옷을 삼장(三章)에서 얻었고, 수제(水帝)는 화선(火仙)과 바둑을 두는데 온 우주를 한판 바둑에 걸고 두었도다.
붉은 누각이 높이 솟아 있지 아니하면 어찌 강절(絳節)이 편안하게 조회를 오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십주(十洲)에 글발을 돌리고 구해(九海)에 격문을 띄웠도다.
지붕 아래에다가 장성(匠星)을 가두어 놓으매 목수(木宿)가 재목을 가려서 취하고, 서까래 사이에다가 철산(鐵山)을 눌러 놓으매 금정(金精)이 빛을 동하는도다. 곤령(坤靈)이 휘둘러 파내니 반수(般倕)보다도 더 교묘한 생각이 치달리고, 대야(大冶)가 용광로에서 녹이매 도가니와 형틀에서 기묘한 지혜를 운용하였도다.
푸른 노을이 꼬리를 드리우니 쌍무지개가 성수(星宿)의 강물을 마시고, 붉은 무지개가 머리를 쳐드니 여섯 자라가 봉래(蓬萊)의 섬을 머리에 이었도다. 구슬로 밝은 햇빛을 비추자 붉은 누각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고, 비단으로 흐르는 별을 잇자 푸른 회랑이 구름 밖에 가로지르는도다. 물고기는 구슬 기와에서 은빛 비늘을 가지런히 하였고, 기러기는 구슬 계단에서 부리를 가지런하게 하였도다.
미련(微連)이 깃발을 들매 짙은 안개 속에서 월절(月節)이 내려오고, 부백(鳧伯)이 깃발을 세우매 삼진(三辰)에서 난초 장막을 베풀었도다. 황금의 새끼줄로 비단으로 만든 집 수술을 묶었고, 구슬의 그물로는 아로새긴 난간을 단 누각을 얽어매었도다.
선인(仙人)이 마룻대에 있으매 기운은 아름다운 봉새가 새겨진 향대(香臺)에 불고, 옥녀(玉女)가 창문에 있으매 물은 두 마리 난새가 새겨진 경대(鏡臺)에 넘실대도다.
비취(翡翠)의 주렴, 운모(雲母)의 병풍, 청옥(靑玉)의 책상에는 상서로운 안개가 밤에 엉기었고, 부용(芙蓉)의 장막, 공작(孔雀)의 부채, 백은(白銀)의 소반에는 상서로운 무지개가 낮에 서리었도다.
이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축하하는 정성을 펴게 하고자, 주위에 있는 온갖 신령을 부르고 멀리 있는 여러 성인들을 초청하였도다. 서왕모(西王母)를 북해(北海)에서 맞으니 아름다운 기린(麒麟)이 꽃을 밟고, 노자(老子)를 서관(西關)에서 만나 보니 푸른 소가 초원에 누웠도다. 
옥으로 만든 용마루에는 비단 무늬의 장막을 둘러쳤고, 보석으로 만든 처마에는 노을 빛깔의 휘장이 드리워졌도다. 꿀을 바치는 벌들의 왕은 구슬 밥을 짓는 주방에 어지러이 날고, 과일을 물고 있는 기러기의 우두머리는 옥을 바치는 부엌에 드나드는도다.
쌍으로 된 보배 피리와 향기가 어린 은아쟁은 균천(鈞天)의 고아한 악곡(樂曲)을 합주하고, 아름다운 소리의 맑은 노래와 구슬이 날리는 교묘한 춤은 허공을 놀래키는 신령스러운 음악 소리에 뒤섞이도다.
용의 머리에서는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이 쏟아지고, 학의 등에는 기린의 포로 만든 술안주를 싣고 있도다. 구슬자리와 옥방석이 놓여 있으매 구지(九枝)의 등불이 빛을 반짝이고, 푸른 연뿌리와 얼음 복숭아가 담겨 있으매 팔해(八海)의 그림자가 소반에 가득 담겼도다.
그런 중에도 옥으로 된 현판에 누각 이름이 빠진 것이 한스러워서 신선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도다.
청평조(淸平調)를 지어 바쳤던 이태백(李太白)은 고래 등에서 취한 지가 이미 오래이고, 백옥루(白玉樓)에서 글을 짓던 이장길(李長吉)은 사신(蛇神)이 너무 많은 것을 웃었도다. 새 궁궐에 명(銘)을 새긴 것은 산 현경(山玄卿)의 문장 솜씨인데, 천상 세계에 옥비석을 새길 만한 채 진인(蔡眞人)이 없도다.
스스로 삼생(三生)의 속세(俗世)에 사는 것이 부끄럽다가, 잘못 구황(九皇)의 벽섬(辟剡)에 올랐도다. 강랑(江郞)이 재주가 궁해지니 오색(五色)의 꽃이 꿈속에 시들었고, 양객(梁客)이 시를 재촉하니 삼성(三聲)의 소리가 바리때에 울려 퍼지는도다. 
천천히 붉은빛의 붓대를 잡고, 웃으면서 붉은색깔의 종이를 펼치는도다. 폭포 같은 시문과 샘솟는 듯한 문장은 자안(子安)의 이불을 덮어쓸 필요가 없으며, 아름다운 구절과 힘찬 문장은 적선(謫仙)의 얼굴을 씻지 않아도 되겠도다. 금낭(錦囊)의 신령스러운 말을 그 자리에서 지어 올리어, 요궁(瑤宮)의 성대한 모습을 형용해 남기었도다.
이에 이 글을 두 대들보에다 두어서 육위(六偉)가 동하는 것을 돕는도다.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동쪽 보니 / 抛樑東
새벽녘에 봉황 타고 신선 주궁 들어가네 / 曉騎仙鳳入珠宮
아침 해가 부상의 아래에서 떠오르니 / 平明日出扶桑底
만 갈래의 붉은빛이 바다 붉게 물들이네 / 萬縷丹霞射海紅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남쪽 보니 / 抛樑南
옥룡이 한가로이 구슬 못물 마시누나 / 玉龍無事飮珠潭
은침상서 잠을 깨자 꽃 그늘진 한낮인데 / 床睡起花陰午
웃으면서 요비 불러 푸른 적삼 벗게 하네 / 笑喚瑤妃脫碧衫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서쪽 보니 / 抛樑西
푸른 꽃은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는구나 / 碧花零露彩鸞啼
비단에다 글 써 보내 서왕모를 초청하고 / 春羅玉字邀王母
학을 타고 돌아올 제 날이 이미 저물었네 / 鶴馭催歸日已低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북쪽 보니 / 抛樑北
바닷물이 아득하여 북두칠성에 잠겼구나 / 溟海茫洋斗極
대붕새가 하늘 박차 바람을 일으키니 / 鵬翼擊天風力掀
구천 하늘 먹구름이 뒤덮여서 컴컴하네 / 九霄雲垂氣黑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윗쪽 보니 / 抛樑上
새벽빛 희미하여 비단구름 드리웠네 / 曙色微明雲錦帳
신선 꿈을 백옥 침상 위에서 깨어서는 / 仙夢初回白玉床
북두칠성 자루 도는 소리 누워 듣는구나 / 臥聞北斗回杓響

어기여차 떡 던져라, 들보 머리 아래 보니 / 抛樑下
팔해에는 구름 덮여 어두운 밤이구나 / 八垓雲黑知昏夜
계집종이 수정 주렴 차다고 와 말하는데 / 侍兒報道水晶寒
새벽 서리 원앙의 기와에 맺혔구나 / 曉霜已結鴛鴦瓦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는 구슬꽃은 늙지 않고 구슬풀은 사시장철 꽃다워지게 하소서. 해와 달은 빛이 시들어도 난여(鸞輿)를 몰아 오히려 놀고, 육지와 바다는 색이 변하여도 바람 수레를 몰아 오히려 남아 있게 하소서. 은창문이 노을을 눌러 아래로 아득히 먼 구만 리 세계를 굽어보고, 구슬문이 바다에 임하여 웃으면서 삼천 년마다 뽕나무 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하소서. 손으로는 삼소(三霄)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닐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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