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온파(Ebionites)
예루살렘 회의에서 주요 사도들 간에 합의된 의견이 도출된 것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며, 그 회의의 결정을 따르는 주류에 대응하는 유대파 극단주의자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에비온파(Ebionites)'로 불리는 자들이 대표적으로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전통을 기독교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할례, 안식일, 음식에 관한 율법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그들이 율법을 고수하고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 엄격한 금욕주의적 특성을 가졌다는 면에서는 에세네파와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에도 신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꺼려하였고, 결국 그들 특유의 기독론인 양자론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인간으로 보며 그가 침례(세례)를 받은 직후 성령이 임할 때 하나님의 양자로 택정되었다고 이해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에비온파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생겨난 첫 이단 그룹으로 이해된다. 첫 번째 교인들이 원래 대부분 유대교 전통 안에 있었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관계 설정이 교회가 다루어야 했던 가장 초기의 문제였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그룹은 이방인 기독교인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면서 자연히 소멸되었지만, 예수의 인성을 부각시켰다는 측면에서 기독교의 일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영지주의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주요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이들은 에비온파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타격을 줄 만큼 신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假現說)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육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적용하였다. 또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한 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예수는 그 지식을 매개하는 중재자로 생각하였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지식을 중시하는 것은 영지주의에 희랍철학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영지주의는 결코 통일된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역과 지도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띠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특징을 다분히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양태 안에는 항상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며,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마르키온파
⧭영지주의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주요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이들은 에비온파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타격을 줄 만큼 신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假現說)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육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를 적용하였다. 또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한 지식을 추구하였으며, 예수는 그 지식을 매개하는 중재자로 생각하였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지식을 중시하는 것은 영지주의에 희랍철학의 영향이 감지되는 부분이다. 영지주의는 결코 통일된 운동이 아니었으며, 지역과 지도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띠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특징을 다분히 보여주었다. 기독교 신학과 삶의 양태 안에는 항상 영지주의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며, 영과 육을 구별하는 금욕주의적 특징은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마르키온파
2세기의 마르키온파(Marcionists)와 몬타누스파도 자기들의 독립적인 교회를 설립한 좋은 예이다. 전자는 영지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마르키온이라는 본도 출신의 부유한 선박 소유주로부터 기원한다. 로마에서 그는 특유의 가르침으로 추종자들을 얻기 시작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곧 로마교회에 위협이 되었다. 여러 초대교부들이 마르키온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위험하게 보고 그를 논박하는 글들을 상당히 많이 남긴 것으로 보아 그는 당대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의 주요 사상은 대체로 터툴리안이 그를 논박하기 위하여 쓴 저작을 통하여 알려져 왔다.
구약을 배격하는 면에서 그는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맥락에 있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성경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구약의 신을 불완전한 신으로 규정하고 진정한 하나님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며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편집된 누가복음서와 목회서신을 제외한 10개의 바울서신들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기존 교회가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하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의 교회는 결국 소수파로 남게 되었지만 대략 5세기까지 존속하였다고 알려진다.
⧭몬타누스파
몬타누스주의는 급진적인 성령주의와 그리스도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2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새로운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프리지아의 몬타누스와 '성령의 입' 역할을 하였던 두 여인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중심으로 기존교회의 형식주의와 도덕적 나태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엄격한 윤리, 금욕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기존 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들의 근본적 차이는 교리적인 것에 있었다기보다는 신앙생활의 방식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의 감소로 초대교회의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의 방식이 점점 변질되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사실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ts)들을 다른 이단들과 동격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들 무리에 '서방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터툴리안이 가담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신학적 건전성은 어느 정도 인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엄격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중시하였던 그들은 나중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동조자들을 얻었으며, 4세기 이후로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도나투스 교회에 가입하였다. 몬타누스주의에서 도나투스주의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전통은 이런 과정에서 그 독특함을 드러내었다.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교회 전통에 비하여 훨씬 엄격한 기독교인의 삶을 요구하였고 종말론에 입각한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다분히 있었다. 박해를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순교는 그들 가운데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각기 다른 사상적 관점으로 이해되고 설명되면서 다양한 신학과 신앙의 개념들이 생기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초기부터 교회에는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무리들을 양산할 만한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위에서 언급된 교회 내의 이단들은 가장 초기에 일어난 교회 분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단들의 활발한 활동은 기존 교회에게 경각심을 일깨웠으며, 신앙의 정통성과 교회의 정통성을 세우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도계승주의의 개념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과 신약성경의 정경화, 그리고 사도신경의 채택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신앙의 내용을 일정한 틀 혹은 형식으로 규정하여 모든 사람의 신앙을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치된 교리를 형성하여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키고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데 기여한 일면, 정통 신앙의 개념이 가시화되어 가면서 교회는 점점 제도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몬타누스주의는 급진적인 성령주의와 그리스도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2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새로운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프리지아의 몬타누스와 '성령의 입' 역할을 하였던 두 여인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중심으로 기존교회의 형식주의와 도덕적 나태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엄격한 윤리, 금욕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기존 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들의 근본적 차이는 교리적인 것에 있었다기보다는 신앙생활의 방식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의 감소로 초대교회의 다이내믹한 신앙생활의 방식이 점점 변질되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사실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ts)들을 다른 이단들과 동격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들 무리에 '서방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터툴리안이 가담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신학적 건전성은 어느 정도 인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엄격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중시하였던 그들은 나중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많은 동조자들을 얻었으며, 4세기 이후로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도나투스 교회에 가입하였다. 몬타누스주의에서 도나투스주의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교회의 전통은 이런 과정에서 그 독특함을 드러내었다.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교회 전통에 비하여 훨씬 엄격한 기독교인의 삶을 요구하였고 종말론에 입각한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다분히 있었다. 박해를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순교는 그들 가운데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각기 다른 사상적 관점으로 이해되고 설명되면서 다양한 신학과 신앙의 개념들이 생기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초기부터 교회에는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무리들을 양산할 만한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위에서 언급된 교회 내의 이단들은 가장 초기에 일어난 교회 분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단들의 활발한 활동은 기존 교회에게 경각심을 일깨웠으며, 신앙의 정통성과 교회의 정통성을 세우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도계승주의의 개념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과 신약성경의 정경화, 그리고 사도신경의 채택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신앙의 내용을 일정한 틀 혹은 형식으로 규정하여 모든 사람의 신앙을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치된 교리를 형성하여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키고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데 기여한 일면, 정통 신앙의 개념이 가시화되어 가면서 교회는 점점 제도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노바티안파와 도나투스파
기독교 교회의 가장 초기에 나타난 이단들이 신학적·신앙적 차이로 야기된 분열이었다면, 이후에는 박해의 결과로 교회의 분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박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바티안교회와 도나투스교회가 분열해 나간 일이다. 전자의 사건은 데키우스 황제 때에 박해로 인하여 배교한 자들 가운데 박해 후에 교회로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이들을 교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다. 갈등은 이 문제를 두고 온건론과 강경론의 대립에서 연유되었다. 온건론자들은 배교행위에 대한 단순한 회개로 족하였지만, 강경론자들은 그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였다. 카르타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 종교회의를 열어야 했다.
유사한 일이 로마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은 강경론자의 입장에서 새로 로마의 감독으로 임명된 코넬리우스가 배교자들에 대하여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코넬리우스의 감독으로서의 정통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고, 독자적으로 노바티안을 로마 감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노바티안교회는 기존 교회에 의해 축출되었고, 그들도 기존 교회를 타락한 교회로 규정하고 자기들만의 독립된 교회를 형성했다. 이들 교회는 5세기 이후까지 존속했다. 배교자의 교회 복귀를 둘러싼 논쟁은 서방교회의 교권 다툼과 교회 분열의 전형적인 이유가 되었다.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는 또 하나의 교회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박해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 문서를 압수하여 폐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박해 후의 논쟁의 요지는 박해 시에 기독교 문서를 폐기하도록 내어준 성직자들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었다. 노바티안 논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하여 강경론을 취한 자들과 온건론을 취한 자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으며, 이 논쟁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마요리누스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최근에 사망한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후임자로 선출된 카실리안의 정통성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카실리안에게 감독 서품식을 거행해 준 세 명의 지역 감독들 중 박해 때 기독교 문서를 내어준 자가 있었고, 그런 자에 의해 수행된 성직수임은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대안으로 마요리누스를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마요리누스는 그 일 직후 사망했고 도나투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곧 그들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도나투스주의 혹은 도나투스 교회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결국 기존교회의 총체적 타락을 주장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분리를 택했고, 그들의 교회로 입교할 자들에게 재침례(세례)를 요구하였다.
기존교회는 이들을 교회분리주의자로 정죄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은 공권력으로 그들을 누르기 시작하였다. 도나투스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형성하였고 7세기까지 존속하였다. 도나투스 논쟁은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5세기 초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유명하며, 이때의 논쟁 과정에서 정립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례전론과 교회론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독교의 교파, 2006. 11. 30., ㈜살림출판사)
유사한 일이 로마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은 강경론자의 입장에서 새로 로마의 감독으로 임명된 코넬리우스가 배교자들에 대하여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코넬리우스의 감독으로서의 정통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고, 독자적으로 노바티안을 로마 감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노바티안교회는 기존 교회에 의해 축출되었고, 그들도 기존 교회를 타락한 교회로 규정하고 자기들만의 독립된 교회를 형성했다. 이들 교회는 5세기 이후까지 존속했다. 배교자의 교회 복귀를 둘러싼 논쟁은 서방교회의 교권 다툼과 교회 분열의 전형적인 이유가 되었다.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는 또 하나의 교회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박해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 문서를 압수하여 폐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박해 후의 논쟁의 요지는 박해 시에 기독교 문서를 폐기하도록 내어준 성직자들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었다. 노바티안 논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하여 강경론을 취한 자들과 온건론을 취한 자들 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으며, 이 논쟁은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마요리누스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최근에 사망한 카르타고 교회의 감독 후임자로 선출된 카실리안의 정통성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카실리안에게 감독 서품식을 거행해 준 세 명의 지역 감독들 중 박해 때 기독교 문서를 내어준 자가 있었고, 그런 자에 의해 수행된 성직수임은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대안으로 마요리누스를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마요리누스는 그 일 직후 사망했고 도나투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곧 그들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도나투스주의 혹은 도나투스 교회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결국 기존교회의 총체적 타락을 주장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분리를 택했고, 그들의 교회로 입교할 자들에게 재침례(세례)를 요구하였다.
기존교회는 이들을 교회분리주의자로 정죄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은 공권력으로 그들을 누르기 시작하였다. 도나투스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형성하였고 7세기까지 존속하였다. 도나투스 논쟁은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5세기 초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유명하며, 이때의 논쟁 과정에서 정립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례전론과 교회론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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