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4일 목요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강성화,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18호에서 췌록한 글들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http://philinst.snu.ac.kr/html/menu6/extra_number.php

막스 베버, 马克斯·韦伯, Maximilian Carl Emil Weber
칼뱅주의 加尔文主义

부르주아 사회학과 프롤레타리아적 마르크스주의가 있으며, 이 두 연구 방향을 각각 대표하는 사상가인 베버와 마르크스의 공통된 연구영역은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이다.

베버는 부르주아 계급이 지니게 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어떻게 합리적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기능하는지를 밝힘으로써 ‘자본주의의 정신’의 윤리적 기반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근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생을,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의 교리 하에서 금욕과 근로에 힘쓰는 종교적생활태도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시민계급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개혁을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전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향락, 방탕,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얻은 자산의 양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재산의 획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는다. 이와 같이 신이 내리신 직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여야 한다는 청교도적 세계관은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을더욱 강화하는 것이 되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을강조하였다.

첫째, 칼뱅주의의 예정설은 인간은 신의 뜻에 따라 구원의 운명이 이미결정되어 있다.

둘째, 신자들이 자신도 선택된 자들 가운데 들어 있는가의 확인의 문제이다.

셋째, 이에 대한 일반 신도들의 해답은 기독교적 소명(召命)에 따른 직업 활동으로 경쟁에서 이기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자가 되는 현세적 징후라고 생각하였다.

넷째, 칼뱅주의 윤리관에는 근면, 검소, 성실 등 ‘세속적 금욕주의’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윤을 저축하고 생산 활동에 재투자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이것이 서구인의 직업의식과 자본주의 정신의 합리화 원인이 되었다.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베버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베버의 생각과는 달리 동아시아 나라에서 유교윤리가 후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杜維明이 대표적 논자다.

‘신유교 윤리’(the New Confucian Ethic)라는 말로써 금세기 후반 동아시아 5개국(한국, 일본, 대만, 홍콩 및 싱가포르)이 고도 성장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이를 서구 선진국의 자본주의 정신의 청교도 윤리에 버금가는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베버의 문제의식을 동양사회에 접목시키는 시도로서 베버사회과학의 새로운 연구주제라고 할 수 있다.

베버에 반대하는 학자로, 마이클 노박(M.Novak)

서부 유럽이 매우 독특했던 점은 모험가적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합리적’ 자본주의의 출현에 있다. 합리적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 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루터에게는 어떤 환경에서도 세속적인 의무의 수행이야 말로 신에게 축복받는 유일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반드시 평등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비합리적 자본주의
베버는 서양과 중국 및 근동 아시아에 있어서 조세청부를 위한 자본주의적 기업과 전쟁비용 융통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기업을 이러한 예로 들고 있다.또한 자본주의적 정신에서 배격했던 투기적 자본주의나 고리대금에 의하여 타인을 궁핍화하는 고리대 자본주의도 같은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고대의 자본주의
고대와 중세 후기의 자본주의는 도시의 자유를 종식

합리적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 된다. 근대화란 합리화이며, 이 합리화는 서구 문화의 특수하고 독특한 현상이고, 서구의 근대적 자본주의 또한 이 합리화에 의해서 여타의 자본주의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아마도’ 이러한 비합리적충동의 절제 혹은 적어도 그러한 충동의 합리적 완화와 동일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이는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이윤획득을 위한 자신의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개별적인 자본주의기업은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영리를 지속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근대의 자본주의적 영리획득의 특징이다.이러한 영리획득의 방법은 단순한영리욕, 탐욕의 추구가 아니라 도리어 불합리한 욕망의 억제 또는 욕구의합리적인 조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베버는 이를 단적으로 ‘합리화’ 또는 ‘합리성’이라 일컫는다.그에게 근대화는 단적으로 합리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서양을 제외하고는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근대 서양을 제외하고는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가존재하지 않았듯이 혹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합리적 사회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근대 서양의 바깥에는 부르주아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도 존재할 수 없었
다. 왜냐하면 규칙적인 훈련 아래 있는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합리화와 관련해서 베버가 강조하는것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부기(簿記) 방식의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기업 경영에서는 투하된 비용과 수익을 장부에 기재하여 일정한 기업 활동 기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이윤 또는 손실을 확정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베버는 법과 행정의 합리적 구조(rationale Struktur)가 근대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성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기업이 노동의 합리적 조직, 과학적 지식의 기술적 이용, 합리적 부기, 합리적 법과 행정 등을 통해 합리적, 지속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합리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근대적 자본주의라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낳은 것, 그리하여 이상의 모든 조건 또는 합리성의 측면들을 가능케 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일상생활에 대해 가톨릭보다 훨씬 강하게 통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왜 프로테스탄티즘을 선택했는가? 이것이 바로 베버의 의문이다.

베버는 독일의 직업통계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의자본 소유자, 경영자가 가톨릭 계통의 사람들보다도 프로테스탄트 계통의 사람들이 현저하게 많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인문계 학교에 입학시키는 부모들은 가톨릭교도가, 그리고 실업계 학교에 입학시키 는 부모들은 프로테스탄트교도가 월등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어떤 내적인 친화성이 있는 것인가

자본주의적 에토스, 윤리, 더 정확히는 직업윤리, 나아가서는 경제윤리라고 할 수 있을 이 에토스는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이윤추구의 행위를 옹호하며 그것을 에토스의 차원, 즉 하나의 직업윤리 또는 경제윤리의 차원에서 윤리화한다

직업의무의 행사로서의 부(富)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영국의 경우에 노동자들은 도덕적으로 성실할수록 임금인상에 호응하여 끊임없이 전력을 다하여 일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할수록 다음날에 쉬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운동을 고취시키면 더욱더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에 의한 경제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며 모험적 자본주의의 영리활동을 비난한다. 전통주의의 맹점은 바로 경제윤리적 보편주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전에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대내적 도덕’과 ‘대외적 도덕’이 분리되어 있어서, 같은 혈연, 지연 집단 안에서는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따뜻한 온정과 동포애가 발휘되었으나,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사기,도둑질을 자행하였으므로 윤리적인 보편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대내, 대외적으로 즉 신분, 혈연, 지연에 관계없이 지켜져야 할 경제생활의 보편적인 원칙으로서의 경제윤리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독특한 성격을 표현하는 것은금욕주의적 직업윤리이다. 베버에 의하
면 이러한 금욕적 직업윤리는 루터와 칼뱅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 이후로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칼뱅주의에서는 사회적 활동은 단적으로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봄으로써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에 기초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 낭비적 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 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직업’(Beruf)이라는 말의 현재적 의미가 성서의 번역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보는 베버는 덧붙여 그것이 원문의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어중에서 히브리어에만 독일어의 직업 (Beruf)이라는 말과 유사한 어감의 말이 있을 뿐이다. 베버는 이 단어가 <시락서>에 대한 루터의 번역 중 한 구절(21장 20, 21절)에서 현재의 의미로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베버는 모든 직업을 동가치한 것으로 보는 개념이 사회의 신분제도가 신의 뜻이라 보는 점에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 개혁의 성취를 가장 열렬히 칭송하는 어떠한 교파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 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그런 까닭에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상징적 인물로 언급하고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삶의 방식을 루터 자신부터가 격렬하게 거부할 것으로 본다.

루터는 ‘전통주의’적 성격을 지녔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활실천과 종교적 출발점의 관련은 세속적 직업에 대한 루터와 그의 교회가 갖는 태도에서 직접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정설의 교리는 무한한 신의 영역에 대한 숙명론적 포기(김은영, .막스베버의 종교윤리와 경제 행동의 관련 해석에 대한 연구., 1997, p.21)를 낳게 되는데, 예정설에서 신은 모든 인간적 이해가 미치지 않는 초월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교회나 성례에 의한 구원의 완전한 폐기야말로 가톨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이는 루터주의에서는 결코 철저 하지 못한 것이었다.

베버는 예정설의 세대가 맞이한 이러한 전대미문의 개인적 고립감을 서구 근대인의 개인주의적 경향과도 결부시키고 있다. 세속적 직업노동(die weltlicheBerufsarbeit)이 종교적 불안감의 진정에 적합한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구원에 대한 증거에 집착하는 평신도들에게 내려진 최종적인 답변은, 세속적 노동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칼뱅주의는 금욕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적극적인 것을 추가했다. 즉 세속적 직업생활에서 신앙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세속적 노동에 대한 거부는 열렬한 찬양으로 바뀌었고, 세속적 노동을 통한 금욕주의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루터에게는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여겨졌다. 칼뱅주의는 세속적 직업 노동 안에서 신앙을 증명한다는 적극적인 것을 여기에 추가하였다.

칼뱅주의적 미덕 혹은 직업윤리는 부르주아적 엄격성과 정직, 적극성을 강조하였다면, 독일 경건주의의 미덕 혹은 직업윤리는 겸손과 연약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건주의에 길러진 덕성들은 충실한 관리, 종업원,노동자, 가내공업자들의 것이었고, 아울러 경건한 겸손을 가진 가부장적 고용주들의 것이었다.

노동은 단지 금욕의 수단이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신이 지정한 삶의 자기 목적”이라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을 위한 경우라면 모든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신에 의해 “명령된 것”이다. 돈은 증식되어야 한다.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병들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선이자 신의 영광을 해치는 것으로 비난되어야 한다.”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 낭비적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 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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