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5일 화요일

韓滉의 五牛圖

元代의 화가 조맹부는 “五牛神气磊落,稀世名筆也。”라며 《五牛圖》를 극찬했다.

남북조 이후의 화단은 주로 귀족생활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치중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인물, 대각, 산수 등의 주제가 주를 이루는 따위다. 동물을 그린다면 주로 귀족 생활의 한 정경인 말(馬)이 대부분인데, 韓滉이 농촌을 배경으로하는 소를 그렸다는 점은 독특하다.

한황 [韓滉](公元723—787年)은 당나라 장안(長安) 사람. 자는 태충(太沖)이다. 여러 관직을 지내고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져서 세칭 한진공(安晉公)이라 한다. 관직에 있을 때 농민들의 생활과 풍속에 관심을 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회화 작품을 그렸다. 대표작 「오우도(五午圖)」는 다섯 마리 소의 동작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그 밖의 작품에 「전가풍속도(田家風俗圖)」와 「요민격양도(堯民擊壤圖)」, 「촌두도(村杜圖)」, 「전가이거도(田家移居圖)」, 「취학사도(醉學士圖)」 등이 있다.



《五牛圖》가 유전된 역사를 살펴보면 宋徽宗-宋高宗-원대의 趙孟頫-명대의 項元汴-清의 乾隆皇帝-홍콩의 기업가 吳恆蓀-신중국의 순을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

역대로 오우도의 진위판별을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먼저 오우도에 그려져 있는 관목이 당대의 화풍이 아니라 송대의 화풍이라는 점을 들어 고궁박물원에 있는 것은 송대의 모본이라는 견해가 있었고, 1975년 일본의 《水墨美術大系》가 大原版 오우도를 싣으면서 일본의 오우도가 당대 한황의 오우도의 실물에 가장 가까운 모본이며, 중국북경고궁박물원의 것은 모본 중에서도 조악한 것에 속한다고 주장하여 중국미술계, 학계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한황이 왜 오우도를 그렸는지, 그 안에 어떤 우의가 있는지 또한 의견이 분분하다. 건륭이 후에 오우도를 입수한 후에 쓴 제시 속에서 오우도의 함의를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다.

一牛絡首四牛閒,소 하나는 고삐에 매였고, 나머지 네 마리는 한가로운데,
弘景高情想像間。도홍경의 높은 뜻은 상상 속에나 있겠지.
舐齕詎惟誇曲肖,혀로 핥고 풀 씹는 모양이 어찌 다만 똑같이 묘사하기 위해서만 일까,  
要因問喘識民艱。그 헐떡이는 것을 물음은 백성의 고초를 알려하기 때문이지.

시 속에 도홍경의 고사와 한나라 병길의 고사가 있다. 
양(梁)나라의 은자 도홍경(陶弘景)이 모산(茅山)에서 살며 여러 차례 무제(武帝)의 초빙을 받았어도 응하지 않은 채 단지 소 두 마리를 그려서 벽에 걸었는데, 하나는 수초(水草) 사이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하나는 머리에 금롱(金籠)을 덮어 쓴 채 채찍을 맞고 있는「一牛散放水草間,一牛著金籠頭,有人執繩,以杖驅之」(《南史》卷七十六) 그림이었으므로, 무제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이 사람이 장자(莊子)처럼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북이가 되고 싶어 하니 어떻게 불러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南史 卷76 陶弘景傳》
병길문우천(丙吉問牛喘) 은 전한 선제(前漢宣帝) 때의 명재상 병길(丙吉)의 고사로 어느 봄날 병길이 길을 지나다 소가 기침을 하며 헐떡거리는 것을 보고 계절의 기후가 조화를 잃은 것은 음양의 조화를 맡은 삼공, 즉 자신의 책임이라 통감하고 더욱 천하의 정치에 힘썼다는 일화이다.
아마 건륭은 오우도 속에 병길이 헐떡거리는 소의 사정을 묻는 그 맘이 그림을 그린 한황에게도 있었음을 짐작했을 것이고, 동시에 그림을 감상하는 건륭 자신도 그림을 보고 치민지심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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