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5일 화요일

기독교의 역사



1부 예수 종파의 출현

➤파피아스의 말을 종합하면, 마가 생애 말년에 베드로의 동역자로서 베드로의 아람어 설교들을 헬라어로 통역했던 것 같다. 베드로 사후 마가는 예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연대기적 순으로 마가복음을 편찬한다. 그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사용된 양식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서술방식이나 내용에 만족하지 못했다. 누가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학교 출신이었으며, 마태는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선교여행을 떠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대표했다. 그들은 마가복음의 일부 사본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또 Q복음서, Q자료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누가와 마태복음에는 공통적으로 있는 기사들을 근거로 추정할 수 있다.

➤성경의 사본들과 자료의 변개에 대하여, 자료증명의 원리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어떤 교리에 대한 설명이 텍스트 속에서 모호하게  적혀져있을 경우, 필사자는 이를 더 명확하고 적절하게 윤색하거나 바로잡았다. 62

➤예수재판과 빌라도
갈릴리는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자주 일어났고, 다양한 종교들이 혼재되어 있던 곳으로 예루살렘 측에서 볼 때에는 폭력과 반란이 넘쳐나는 지역이었으며, 예루살렘 사람이 예수를 나사렛, 갈릴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은 그를 분쟁하는 자로 보았다는 것과 같다. 69
빌라도의 임기는 서기36년에 끝났다. 그는 유대 지방에 일어난 종교운동(예수 운동과는 다른)의 폭력진압 후에 불명예 퇴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70

➤예수 운동과 유대교
이론적으로 에세네파가 예수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의 보편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고, 바리새파와는 율법에 근거한 대화가 가능했을지모르나 율법을 넘어선 은혜라는 영역에 있어 바리새파와 의견을 달리 했을 것이다. 예수의 말에 귀기울 계층은 잃어버린 양을 뜻하는 '암 하이레츠' 사람들로 소외계층이었으나 그들은 예수의 강력한 지지자들인 동시에 예수를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예수운동과 유대교
사도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탐험을 말하는데, 이 단어는 아마도 이방인들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를 의미한 것을 보인다. 75
예수운동과 유대교 사이의 길항은 예수운동을 이방 선교로의 확대로 이끌었고, 동시에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독교 유대인 사이의 길항 또한 초대교회사를 보는 중요한 대목 중 하나다.

➤마르키온주의[-主義, Marcionites ]
144년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마르키온(Marcion, 85?-160?년)에 의해 세워진 비정통적인 사상이나 그 무리를 말한다. 마르키온은 기독교 최초의 개혁자(기독교 내의 유대적 요소를 배척하고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함)이자 동시에 이원론(二元論)과 그리스도 가현설(假見說)을 주장한 대표적인 이단이다. 그는 구약성경의 하나님(폭력과 보복의 신)과 신약성경의 하나님(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을 구약성경과 분리할 것을 역설했고(복음서 중에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함) 구약과 신약의 모순을 규명한 대조표(Antithesis)를 저술했다.
그는 바울서신과 누가복음의 정경성만을 인정했고, 자칭 바울의 후계자로 여겼다. 또한 그는 성만찬을 집전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떡과 물로 대체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치 않았고, 이러한 그의 그리스도론은 가현설(도케티즘)로 발전하였다. 그는 영지주의(Gnosticism)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아 영선물악(靈善物惡)을 주장했고, 육체적 부활을 부인했으며, 고행(苦行)을 강조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르키온주의 [-主義, Marcionites]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테르툴리아누스 [Quinrus Septirnius Florens Tertullianus]
서방교회의 최초의 교부, 호교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변론술과 법률학을 공부한 후에 로마로 가서 법률가로서 일했는데, 195년경 회심해서 귀국하여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단, 사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잔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마르키온, 플랙세아스(Parxeas), 몬타누스 등의 이단과의 논쟁으로(한때 몬타누스의 영적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다) 반그노시스 교부의 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이단의 아버지>라고 하고, 오로지 성서에 따라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구제사를 고려, <페르소나>, <경론> 등 그 대부분은 후에 정통신화에 채용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적시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파의 로고스 사상과 영혼관을 원용하였기 때문에, 영혼과 신체(육)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적 권위에 대신해서 직제의 건위를 두고, 구제를 윤리적 • 법률적으로 보아서 로마법의 형벌, 보수, 공적의 개념으로 표현했는데, 이들은 후에 정정을 가하면서도 서방 교회에 공통적인 것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르툴리아누스 [Quinrus Septirnius Florens Tertullianus]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이교도(異敎徒)·유대인·이단자(異端者)들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지키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았는데, 그 엄격한 성격 탓으로, 그 자신이 몬타누스파(派)의 이단으로 기울어졌다.
신학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특히 문장가로서, 교회의 신학과 법률을 위하여 뛰어난 술어(術語)들을 남겼다. 순수하게 신학적인 문제에 철학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은, 그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에 《호교서(護敎書):Apologeticum》(197) 《헤르모게네스를 논박(論駁)한다:Adversus Hermogenem》(200/6) 《영혼의 증명에 대하여:Detestimonio animae》(197/200) 《마르키온을 논박한다:Adversus Marcionem》(207/8)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테르툴리아누스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두산백과)

➤몬타누스주의
창시자 몬타누스(Montanus, 170년경)의 이름을 좇아 부른 2세기 후반의 성령운동 혹은 묵시주의운동을 가리킨다. 초기의 지지자는 '후르기야 파' 또는 '가다후르기야 파'로 불렸다. 또한 몬타누스가 두 사람의 협력자(프리스가와 맥시밀러)와 함께 예언하였던 장소인 부르기아 지방의 페프자에 따라서 '페프자 파'라고도 불렸다.
교리적으로는, ① 보혜사 성령이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 능력으로 임재하여 강하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믿음(성령은 특히 황홀상태의 예언자에 의해 성령 자신을 그 시대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믿음)과 함께 ② 엄격한 금식과 성윤리를 강조했고, ③ 재혼을 금했으며, ④ 박해를 피해 도망하는 것조차도 배교행위로 간주할 정도로 신앙의 정절을 강조했다. 또한 ⑤ 만인사제직을 지향했고, ⑥ 영적인 내적교회와 주교가 지배하는 외적교회를 구별했으며, ⑦ 주께서 머지않은 때에 다시 오신다는 강력한 재림신앙으로 무장했다. 터툴리안(Tertullianus, 150-220년경)은 몬타누스주의의 대표적인 신봉자였다.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신약성경 정경화
마르키온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시키기를 원했고, 신약성경을 바울 서신의 색채로 환원시켰다. 이러한 마르키온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정통교회는 예수의 그의 사상의 다차원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고, 기독교의 보편주의적 정신을 보존하는데도 보다 관용적인 정경의 확립은 필수적이었다.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던 첫 번째 사람은 4세기 중엽의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다. 이후 히브리서는 동방에서 인기가 높았고,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고 확신했지만, 419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히브리서는 바울 서신의 하나로 결정된다. 117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절 서신에서 정경 목록을 제시했다. 신약은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교회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신약을 통해 교회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118

➤성직자의 탄생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여 군주적인 주교 제도와 사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구축했다. 단일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교회의 확장과 주교제도의 발전은 임박한 종말의  지연으로 인한 상실감을 벌충할 하나의 제도적 받침목이 되었고, 또 이단과의 논쟁에서 확고한 우위와 근거를 마련하게 했다. 이러한 보편주의적인 교회 제도의 확장을 위해서 편향적인 마르키온이나, 은사주의자들의 옹호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배척당하기도 했다. 121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anus ]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는 150-160여 년경에 출생하여 대략 215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으며 일찍부터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에서 판타에누스(Pantaenus)에게 성경과 철학을 배웠다. 스승이 죽자 190년 그의 뒤를 이어 교리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철학을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고스인 그리스도가 삼위(三位) 중 두 번째 위격(位格)을 가진 분으로서 인간 이성의 근원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이해시켜 주는 분이라고 했다. 또 그리스도는 최고 계시를 주기 위해 사람이 되었고 영생을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 방법론을 수용하면서도 참된 '영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하여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였다.
202년 세베루스 황제(146-211년) 박해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었고, 211년 아스클레피아데스가 안디옥 주교가 되었을 때 축하 서신을 쓴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완전한 신학 체계를 완성하지 못하였고, 그의 사상은 교리학교 후임 교장이 된 오리겐(Origen)이 이어받아 집대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 저서로 「Protrepticos」(그리스인에 대한 연설), 「Paedagogus」(가정교사), 「Stromateis」(잡록, 잡동사니)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클레멘스1 [Clemens Alexandrianus]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오리게네스와 키프리아누스

오리게네스[Origenes ]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신학자. 성경주석 학자(185?-253?년). 일명 '오리겐.' 교리학교에서 클레멘트에게 배웠다. 부친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헬라 문학을 가르치다 202년 순교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어머니가 그의 옷을 감추는 바람에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Severus, 222-235년) 박해 때 클레멘트가 추방되자 203년 18세의 나이에 교리학교에서 문법과 철학을 가르쳤고, 여학생 교육에 거리낌이 없도록 스스로 거세하며 금욕, 고행, 철야, 청빈에 힘썼다(Eusebius). 211년 카르칼라 황제(Carcalla, 211-217년)가 기독교인들을 추방시킬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로마로 갔다. 이때 그는 히폴리투스의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213년 아라비아를 거쳐 215년 가이사랴로 갔다. 이때 그는 설교와 전도를 위해 가이사랴에서 감독에게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231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Demetrius)로부터 추방당했다. 결국 그는 가이사랴로 망명하여 교리학교를 설립하고 거기서 강의하고 연구하며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Decius, 249-251년) 박해 때 가이사랴에서 갖은 악형을 당하고 풀려나 2년 뒤 두로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묘지는 십자군 원정 때까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후세 역사가들은 그보다 순수하고 고상한 자도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석학이었으며 구약 본문 비평과 주석에도 뛰어났다. 특히 명저 「헥사플라」(Hexapla, 즉, 6개어 대역성경. ①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 ② 4가지 헬라어성경 본문 즉, ·〈헬라어로 쓴 히브리어 음역〉, ·〈Aquila역〉, ·〈Symmachus역〉, ·〈Theodocion역〉, ③ LXX역 교정역)는 당대 최고의 저서로 손꼽힌다. 또 「De Principiis」(기독교원리)는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로서 모든 교리학의 바탕이 된다. 이뿐 아니라 유명한 「켈수스에 대한 반론」(Contra Celsus)은 고대 기독교 변증학을 대표할 만하다.
한편, 그의 신학은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조화·융합시킨 것인데 이를 위해 그는 성서의 비유적 해석(알레고리)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까지 당대의 최고 신학자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신학은 동방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후대에 기독론 논쟁 때 그의 글을 인용하지 않은 학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 선재설이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래에 위치한다.'고 하는 등 몇 가지 점에서 교회의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난 주장을 했다. 그로 인해 그는 4세기 후반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노이스(Epiphanois)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저서(대부분 헬라어로 된) 중 금서가 많고 기껏해야 라틴어로 된 단편 저작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리게네스 [Origenes]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키프리아누스 [Caecilius Cyprianus]
기독교 종교인. 별명은 Thascius.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ㆍ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가장 위대한 주교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에게 큰 영향을 받고 박해를 무릅쓰고 교회 통일에 힘썼다. 그는 로마 교회를 가톨릭 교회의 유일한 근원으로 보고 서간(書簡) 가운데서 처음으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제1대 주교라고 주장하는 등 교회 통일 및 교계(敎計) 제도 사상 가장 명확한 규정을 내려 교회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프리아누스 [Caecilius Cyprianus]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바울의 가르침과 기독교 진리의 능력을 통해 보장된 자유를 평신도들로부터 빼앗아버렸다. 126

➤로마교회의 탄생
예루살렘 교회의 파괴와 함께, 교회를 통섭할 교회의 교회를 로마 교회에서 찾게 된다.
로마교회는 정통주의 신앙의 본산으로, 영지주의가 극성인 동방지역, 시리아와 소아시아 이집트 등과 구별되는 어떤 곳으로 인식되었다. 로마 교회는 영지주의를 배격할 수 있었고, 정경을 확정하고, 이단들을 물리쳤다. 

2부 순교자에서 종교재판관까지(250-450년)

➤밀라노칙령(313년)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함께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우선, 그리스도교든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祭儀)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마땅히 종교의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교회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하고,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반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리키니우스(Licinius)는 313년 6월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총독들에게 공식 서한의 형태로 밀라노 칙령의 내용을 전달해, 그리스도교 박해의 중지와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이 서한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통치 말기에 다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보호에 소극적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장려에 나서 그것을 제국의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재정과 조세, 법률의 특권을 주었으며, 각 지역의 총독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포교(布敎)를 방해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지원 아래 안티오크(Antioch),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등의 지역에서 교회들이 성장하였으며,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이처럼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공인(公認)한 데 그치지 않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재위 361~363) 황제는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키려 그리스도교를 탄압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때인 392년에는 이교(異敎)의 신에 대한 숭배 의식이 전면 금지되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라노칙령의 내용과 영향 (두산백과)

➤콘스탄티누스 황제
그가 태어날 때(272년)의 로마는 약 3백 년 전 로마 제국이 세워질 때의 로마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제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5현제시대’를 지나 약 50년 간 18명의 황제가 쿠데타와 암살을 반복하며 잇달아 나타나고 사라져가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가 왔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스러웠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경제력과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외적으로는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 내우외환에 빠져들었다.
3세기에 들어서며 아우렐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라는 걸출한 황제가 잇달아 나타나며 이런 혼란은 일단 진정된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방대한 제국을 넷으로 나눔으로써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갈리아, 에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서(西)로마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을 동(東)로마로 나누어 각각의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게 하고, 동서 로마는 다시 한 사람씩의 부제(副帝,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독립 영역을 가짐으로써 네 사람의 황제와 네 개의 제국이 분립된 것이다.
그것은 로마가 겪고 있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회심의 조치였다. 일단 제국의 국경은 너무나 길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은 너무도 많았으므로, 한 사람의 황제가 중앙에서 동시에 대응하기는 무리라고 여겨져 네 사람의 황제가 각기 맡은 쪽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했다. 또한 본래는 중앙에서 파견된 ‘점령군’이었던 로마 군단이 세월이 지나며 파견된 지역에 뿌리를 내려 토착화되고, 머나먼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졌으므로 더 이상 로마에 앉아서 여러 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점도 고려되었다. 5현제 시대까지 팽창과 집중화를 계속했던 로마는 이제 분산과 분열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치제(四分治制)는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사분치제는 한 가지 뚜렷한 모순을 안고 있었다. 네 사람의 황제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느 한 황제가 다른 황제의 지배영역을 탐낸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사분치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부제(서로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사분치제의 모순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서로마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된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이 개혁적인 황제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는데, 다만 그가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만은 공감하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받은 영향도 있었고(아들이 황제가 된 후,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가서 이른바 ‘예수가 못박혔던 진짜 십자가’를 발견한다), 당시는 이미 제국의 하층민뿐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미 힘을 잃은 옛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한 유세비우스의 말인 만큼 덜어서 들어야 할지 모르지만, 이미 청년기에 그의 명성은 로마에 자자했던 것 같다. 특히 훤칠하게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는데, 누구도 그를 감히 ‘패배자’로 낮춰볼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승리자로 살았다.
이 ‘타고난 승리자’로서의 운명이 태동되던 때는 305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이 이룩한 사분치제가 권력투쟁으로 엉망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옥좌를 내놓고 물러난 것이다. 그러자 그가 동로마 정제로 추대한 막시미아누스도 할 수 없이 물러났으며, 두 부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정제로 올라섰다. 그런데 이 때 갈레리우스의 니코메디아 궁전에 머물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음모에 휘말릴까 두려워 야반도주하여 불로뉴에 있던 아버지에게 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부자는 픽트 족을 정벌하고자 브리타니아로 건너가는데,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가 병사한다(306). 그러자 그곳의 군대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정제가 되었다고 선언하는데, 동로마 정제인 갈레리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세베루스를 정제로 인정했으며,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서로마 부제의 지위만 인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바로 반발하지 않고 부제 시절 아버지의 영역이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며 외침과 반란에 훌륭히 대응하여 명성을 쌓아갔다. 그 사이에 갈레리우스는 위기를 맞이했는데, 앞서 퇴위했던 동로마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퇴위를 번복하고는 아들 막센티우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와 혼인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고 갈레리우스에게 맞섰다. 하지만 동방의 힘은 만만치 않았고, 힘겨루기가 계속되다가 308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재로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아누스가 모두 은퇴하고 세베루스의 죽음으로 비어 있던 서로마 정제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친구인 리키니우스를 임명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막센티우스는 이 합의를 거부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계속 지배했으며,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의탁해 살다가 310년에 엉뚱하게 반란을 일으키고는 자살해 버린다. 리키니우스 역시 죽은 갈레리우스 대신 동방을 맡으며 동로마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대결하면서 사분치제는 완전히 걸레쪽이 되고, 제국은 대혼란에 빠져든다. 이 때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센티우스를 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한다(312).
콘스탄티누스는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니발과 달리 그는 로마 시를 목표로 삼았고,현지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점령한 도시에서 일체 약탈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민심을 얻으며 진군했다. 마침내 그와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이 312년 10월 28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때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세비우스의 창작 내지 뜬소문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이로써 그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다음은 동방이었다. 한때 콘스탄티누스와 손을 잡았던 리키니우스가 얼마 후 그를 적대시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기다렸다는 듯 314년에 그를 공격하여 트라키아를 제외한 모든 동로마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323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켜 리키니우스를 격파했다. 리키니우스는 항복한 뒤 일단 사면 받았으나 몇 달 뒤 결국 처형되었다. 이로써 로마 전역을 평정한(324)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정복자이며 최고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로마 제국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우선 막센티우스를 꺾은 직후인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수백 년 동안 탄압받아온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그 문구를 보면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
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지 기독교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칙령의 수혜자는 기독교인이었다. 또 콘스탄티누스는 그동안 국가가 몰수했던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으며, 사비를 털어서 교회를 신축하는 데 보탰다. 또한 그는 멜키아데스 교황에게 자기 소유의 라테란 궁전을 기증했으며 그것은 이후 천 년 동안 ‘교황청’의 기능을 맡았다. 나중에 여기서 착안하여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 전체를 교황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의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라는 문서가 위조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위조임이 폭로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조언에 따라 노예의 사적 처벌 금지법(319), 죄수 학대 금지법(320)을 제정했으며, 321년에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휴일로 삼았다(이는 사실 기독교와 전통적인 태양신 숭배의 절충이었다).
그리고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를 개최하여 당시 기독교 세계의 최대 논쟁이었던 ‘아리우스파논쟁’, 즉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신성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처럼 그가 기독교를 부흥시킨 까닭은 자신의 끊임없는 행운이 신의 가호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도, 로마를 통합시키는 데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통 종교보다 기독교가 적합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교황을 비롯한 기독교 사제들에게 “신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황제권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후 기독교 군주들이 왕권의 근거로 들게 되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는 콘스탄티누스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친기독교적 정책은 아직도 전통 종교의 뿌리가 깊은 로마 시에서는 많은 반발을 가져왔다. 여기에 계속해서 쇠퇴하던 서방에 비해 동방의 풍요로움을 집중적으로 개발할 필요성이 더하여, 콘스탄티누스는 330년에 본래 리키니우스의 본거지였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곳은 ‘새로운 로마’로 불리다가, 곧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점점 아시아의 전제군주를 닮아갔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이 “신이 보낸 사람”이라기보다 “신 그 자신”이라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죽음이 닥쳐오자 그는 황제복을 벗고 성직자의 흰 옷을 입었으며, 미뤄 오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37년 5월 22일, 황금 관에 넣어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관 주위에는 예수의 12사도의 관(성유물로 채워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열세 번째 사도”의 위치에 놓은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영광은 찬란했으나, 그 영광에는 그림자도 따랐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넘어서까지 영광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잦은 정략 결혼으로 복잡한 가족관계를 형성했다.자신이 죽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파우스타 황후와 간통했다는혐의로 다른 황비에게서 얻은 아들 크리스푸스를 죽였으며, 얼마 후에는 파우스타 역시 죽였는데 역사가들은 대체로 간통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또 방대한 제국을 혼자 힘으로 다스리기란 역시 힘겨웠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으므로,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부제의 지위를 주어 통치를 분담시켰다. 이는 그의 사후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속에 제국이 사분오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기독교를 다시 박해하는 등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제국에 가져온 두 가지 변화, 기독교 공인과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는 오랫동안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중심을 동방에 빼앗긴 서로마는 급속하게 기울어 갔으며, 결국 150년 정도 뒤에 멸망해 버린다. 하지만 유럽 전체에 주어진 기독교의 세례는 로마를 정복한 ‘야만인’들에게도 이어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천 몇 백 년을 두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 ‘새로운 로마’를 세운 황제 (인물세계사)

➤기독교와 로마제국

제3부 주교의 관을 쓴 군주들과 왕관을 쓴 성상들


➤연대기는 애초에 수도원이나 대성당에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중요한 사건들이 첨가되면서 하나의 역사 기록물로 발전했다. 261

➤샤를마뉴 대제

영토 팽창과 기독교 포교

샤를마뉴의 원 명칭은 ‘샤를(Charles) 1세’다. ‘샤를마뉴’란 명칭은 샤를이라는 그의 이름에 라틴어로 ‘대왕(theGreat)’을 뜻하는 ‘마그누스(Magnus)’의 프랑스어식 변형 ‘마뉴(magne)’가 합쳐진 것이다. 샤를은 고프랑크어로는 ‘카를(Carle)’로, 라틴어로는 ‘카롤루스(Carolus)’로 표기하기 때문에 사실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과 같다.

768년 왕국을 분할·계승할 당시 카를로만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를, 샤를마뉴는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를 통치했으나 771년 카를로만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샤를마뉴는 왕국을 모두 장악하고 유일한 왕으로 등극했다. 그의 치세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비범한 카리스마를 지닌 샤를마뉴와 그를 중심으로 모인 충성스러운 전사 집단들은 서유럽 전역을 누비면서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전례 없이 확장했다. 190cm에 가까운 커다란 몸집과 흰 수염은 전사 왕으로서의 명성과 기품을 더해주었고 정복 전쟁에 기독교 포교를 내재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는 왕의 전형이 되어 중세 내내 전설적인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치세 내내 전개된 정력적인 영토 확장으로 프랑크 왕국의 면적은 두 배로 넓어졌다. 샤를마뉴는 768년 독립적인 성향을 지닌 아키텐을 복속시킨 데 이어 771년 모든 왕국을 장악하자 본격적인 주변 정복에 나섰다. 772년 롬바르디아의 왕 데지데리오가 로마총대주교(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를 공격하자 샤를마뉴는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공격해 데지데리오를 제거하고 스스로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했다.

가장 치열한 원정은 동북부의 작센족에 대해 이루어졌다. 특히 작센족의 신앙은 곰 토템과 애니미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원정은 기독교 대 이교도라는 종교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또한 작센족은 복종한 듯하다가도 반란을 반복적으로 일으켜 샤를마뉴는 20여 차례가 넘는 원정을 조직해야 했고 승리한 이후에는 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특히 곰을 숭배하는 작센족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곰 사냥을 통해 기독교 신이 더 위대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개종을 강제해 나갔다. 이후 샤를마뉴는 프리즈인들과 바바리아인들의 영토도 완전히 복속시켜 프랑크 왕국에 포함시켰고 정복지에는 각종 성채와 교회들을 건축했다.

샤를마뉴가 이들 정복지와 관련해 무엇보다 걱정했던 것은 새로 정복된 지역의 종족들이 전혀 다른 강력한 침입자들과 연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부 지역에서는 게르만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도래한 유목민족의 일파인 아바르족과 연합하거나 서남부 아키텐인들이 피레네 너머 이슬람세력 또는 서북부의 브르타뉴인들과 연합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막기 위해 브르타뉴, 피레네 산맥 주변 그리고 동부 게르마니아 경계 지역들에 변경주들을 설정하고 특히 군사 방어를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778년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제후국인 코르도바를 공격하기 위한 원정이 피레네 산맥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의 습격으로 무위로 돌아가면서 샤를마뉴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다. 실제로 코르도바 군대와는 싸워보지도 못한 원정이었지만 3세기 후 프랑스어로 기록된 최초의 무훈시인 ‘롤랑의 노래’에서는 마치 내부의 배신으로 샤를마뉴의 군대가 이슬람의 공격을 받고 후위대를 담당한 샤를마뉴의 조카 롤랑이 장렬하게 전사한 양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피레네에서의 패배는 동북부 작센족에게 새로운 봉기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샤를마뉴는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782년 봉기를 진압한 샤를마뉴는 베르됭에서 작센군 4,500여 명을 참수하는 대살육을 벌이기도 했다. 794년까지 샤를마뉴는 동유럽의 바바리아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아바르족의 침입을 격퇴시키는 한편 왕국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각종 반란들을 제압했다.

특히 792년에는 그의 첫 아들인 ‘꼽추’ 페팽(Pépin le Bossu, 770년 ~ 811년)이 지방귀족들과 반란을 모의하다 들통이나 프륌 수도원에 유폐되는 사건까지 발생했었다. 사실 페팽은 첫 번째 왕비이지만 공식적인 왕비의 지위를 갖지 못한 이밀트뤼드(히밀트루다)의 아들인 데다가 척추가 휘는 꼽추병까지 걸려 점차 샤를마뉴의 관심에서 멀어진 비운의 왕자였다. 페팽의 반란음모 사건은 샤를마뉴에 압도당한 지방귀족들의 불안감과 왕위계승에서 멀어진 왕자의 불만이 만나 빚어진 비극적인 에피소드였다.
황제 대관식과 성속이원론의 시작

7세기 말 샤를마뉴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사실상 황제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대관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상황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로마에서 795년 즉위한 로마총대주교(교황) 레오 3세가 지방귀족들 사이의 정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상파괴 여부에 관한 신학적 문제가 정치 투쟁으로 확대된 동로마제국에서의 정변이었다. 797년 이레네 황후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키고 황위를 차지했는데, 이 정변에서 이레네가 친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장님으로 만든 행위는 동로마제국 내에서 벌어진 과열된 정치 투쟁의 처참한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799년 지방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이들을 제압할 원군을 요청했고 800년 가을 샤를마뉴는 교황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제안, 12월 25일 샤를마뉴는 로마에서 황제의 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생애를 기록한 아인하르트(에긴하르트)에 따르면 샤를마뉴는 대관식 후 분노하며 매우 큰 불만을 표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추측들 중에 현재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샤를마뉴에 대한 대관식이 기습적으로 교회의 우위권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샤를마뉴의 입장에서 황제 대관식이란 바로 동로마제국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로마식 황제 대관식이었다. 여기에서는 총대주교들을 비롯한 성직자와 귀족들이 황제보다 낮은 직위로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에 대한 집단적 복종을 표현해야만 했다. 하지만 추정하건데 레오 3세는 자신만을 신의 대리인으로, 나아가 교회황제(교황)로 자처하며 샤를마뉴를 무릎 꿇게 하고 자신이 황제의 관을 씌워 주는 의전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우 샤를마뉴 입장에서는 충분히 굴욕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오 3세는 왜 갑자기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을 기획했을까? 사실 그는 샤를마뉴에 대한 대관식을 통해 로마총대주교권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동시에 구 서로마 세계에 대해 최고의 영적 권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레오 3세는 여성의 황위계승 가능성을 부정하며 동로마제국 황제의 공위를 선언했고 이를 빌미로 샤를마뉴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이 새로운 황제가 예전의 동로마 황제처럼 자신 위에 군림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레오 3세는 페팽 3세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영혼의 지도자인 자신이 세속권력자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레오 3세는 로마시대처럼 황제 아래에 위치한 로마총대주교가 아니라 스스로가 영적인 로마 황제가 되어 세속적인 로마 황제인 샤를마뉴를 수족처럼 부리고자 했다. 그가 원한 것은 바로 ‘교회제국’이었다. 그가 볼 때 제국은 교회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해야 했다.

하지만 샤를마뉴가 추구한 것은 ‘제국교회’였다. 그가 볼 때 교회는 어디까지나 제국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황제의 관을 받은 이후 샤를마뉴가 보인 행보는 부왕 페팽 3세와 전혀 달랐다. 페팽 3세가 왕위 찬탈 후 부족한 정당성을 종교적 권위에 의지하여 보충하려 했다면 왕위계승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샤를마뉴는 제국 내 교회와 성직자를 모두 자기 권위 아래 두려고 했다. 그는 로마총대주교를 대신하여 제국의 수도인 아헨에서 직접 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회의 전례 의식들의 통일을 시도했다.

성직자들을 궁정에 끌어들여 문자문화를 보급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현재 알파벳 소문자의 기원인 카롤링 서체를 고안하여 수많은 서적들의 필사를 장려했다. 제국 내 가톨릭 기독교의 전파와 확립, 기독교문화의 확산과 발전, 알퀸과 같은 잉글랜드 지식인의 초빙 등 실제로 가톨릭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샤를마뉴가 시행한 모든 정책들은 스스로 교황이라 자처하는 로마총대주교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어쨌든 이러한 ‘교황과 황제의 대결’은 14세기까지 중세 내내 지속되던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제국의 통치 및 말년

방대한 영토 확장에 비해 샤를마뉴의 통치제도는 매우 조야했다. 체계적인 관직이나 임무의 배분과 규정도 없었으며 있다하더라도 그 공적 성격이 매우 미약했다. 예를 들어 황제의 침실 담당관이라는 명칭이 재무관을 의미했고 마구간 담당관이라는 명칭이 군대의 총사령관을 의미했다. 즉 대부분 샤를마뉴의 군사적 동지애에 입각한 인적관계망에 의해 중앙통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야함을 보충하는 것은 바로 조직적인 교구망과 행정적 문서 작성 능력을 갖춘 성직자들이었다. 샤를마뉴가 성직자를 왕궁 가까이 둔 것은 단순한 신앙심만의 문제가 아니라 칙령작성 및 반포 등 그들이 제국 통치 업무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각 지방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마뉴는 제국 전체를 200개의 백(伯, comes)이 다스리는 백령지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 백들과 황제의 관계 또한 충성과 토지를 매개로 한 인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찰관을 파견하여 지방 수준에서의 독립적 경향을 제어하려고 했을지라도 강력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쟁이나 회합이 없다면 이 지방관들의 토착화와 독립화를 막을 궁극적인 방책은 없었다.

이렇게 샤를마뉴의 통치 체계는 비록 몇 가지 부분에서는 이전에 비해 체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인간관계에 기댄 매우 취약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메로벵거 왕조에서 보여주었던 왕국의 분할계승이라는 프랑크적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제국의 통일성을 암묵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샤를마뉴의 말년에는 그의 제위를 둘러싼 동로마제국과의 분쟁과 덴마크인들의 침략 등이 주요 사건이 되었다. 먼저 동로마제국의 이레네 및 그 뒤를 이은 니코포로스 1세는 800년에 이루어진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제국은 베네치아 부근을 둘러싸고 부딪치기 시작하여 군사적 충돌을 이어나갔다. 이 충돌은 812년부터 동로마제국의 황제 미카엘 란가베(812년 ~ 813년)가 샤를마뉴의 황제직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잦아들었다. 다른 한편 800년대 초는 또한 프랑크제국의 확대와 더불어 북부의 노르만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호전적인 데인족은 프랑크제국을 침입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811년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813년 급격히 쇠약해진 샤를마뉴는 아키텐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태자 루이를 아헨으로 불러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 대관식은 황제 샤를마뉴가 루이에게 관을 씌워주는 의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여기에 로마총대주교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샤를마뉴는 814년 1월 21일에 그 정력적인 삶의 불꽃을 마감했다. 제위는 안정적으로 경건왕 루이 1세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루이 1세는 부왕과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과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후에 미친 영향력

샤를마뉴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중세 이후 유럽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먼저 그는 중세 내내 기독교적 이상에 충실한 기사도와 세속군주의 원형을 이루면서 기독교제국에 대한 이상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의 모습은 교황에게 고분고분한 황제가 아니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나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가 추종하는 바대로 교황으로부터 독립적인, 또는 그보다 우월한 황제권의 확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영토 확장과 전쟁 승리의 뛰어난 업적으로 그는 여러 전설 속에서도 등장, 다른 지역의 영웅적 군주들과 경쟁하기도 했다. 웨일즈와 브르타뉴를 잇는 켈트족 전통의 아더 왕과 잉글랜드의 앨프리드 대왕 등이 바로 그 경쟁자들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유럽인들에게 최고로 꼽히는 이는 바로 샤를마뉴이다. 실제로 샤를마뉴가 정복한 지역은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 거의 전 지역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민족주의가 한창 기세를 타던 시기에 샤를마뉴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과연 그는 프랑스인인가, 독일인인가? 그리고 그가 수도를 삼은 제국의 중심지, 즉 로타링기아(알자스-로렌)는 프랑스인가, 독일인가? 나아가 프랑크제국은 프랑스사인가, 독일사인가? 1870년의 보불전쟁부터 1945년에 끝난 제2차 세계대전까지 샤를마뉴는 양 국가 민족주의 논쟁에 뜨거운 주제로 등장했다.

하지만 유럽 통합을 향해 가는 현재 유럽의 역사가들은 더 이상 프랑크제국의 정체성을 현재의 국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국민 정체성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역사나 독일의 역사 모두 카롤링거 왕조 다음인 카페 왕조와 오토 왕조부터 서술하고 있다. 이렇듯 서유럽인들 공통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샤를마뉴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으며 유럽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샤를마뉴 [Charlemagne] - 서유럽의 지배자 (프랑스 왕가, 인문과교양)


➤아일랜드 켈트족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머리 스타일이 로마교회나 동방교회와는 달랐다. 
당시 아일랜드와 로마 사이의 부활절 날짜는 같지 않았다. 이는 로마와 갈리아 지역사이의 접촉이 단절되면서 생긴 문제들 중 하나다. 유럽 대륙에 켈트 수도원이 들어선다는 것은 정통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수도사들은 중세 전반기 유럽에 고대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전달했던 문화전달자들이었다. 이시도루스의 <어원학>. 
4절판, 양피지에 필사작업을 했던 수도사들. 수도사들의 역할은 단지 결론을 전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결극 증세 문명은 지적인 자기비하로부터 시작되었닥 볼 수 있다. 

 켈트족 십자가celtic cross, 돌 십자가로 켈트족 고유의 예술 언어로 제작 표현. 
4세기의 성물 숭배와 타락

➤726년 서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은 재정적으로 결별. 
서로마는 프랑크왕국과 제휴
교황을 위수로 하는 베드로성당과 이와 반대로 황제 권력 위주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유도 이러한 종교, 교황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아니었는가. 

성상파괴운동


로마교회와 비잔틴교회는 '성상(聖像) 사용'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그것은 8세기에 비잔틴제국의 일부 황제들이 십자고상 등 예배에서 사용해온 '성상'을 금지한 반면, 교황청은 성상의 사용을 주장하면서 생긴 문제였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황제가 교회의 수장인 황제교황주의체제–유스티니니아누스대제 때 이루어진 제도다–로 발전한 비잔틴제국에서는 황제와 교회가 대립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황제는 성직자를 견제하고 교회에 대한 간섭의 기회로 삼기 위해 성상사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성상파괴(Iconoclast)운동을 일으켰다.
심각한 저항에도 비잔틴의 레오 3세(717~741)는 725년에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린다. 그에게는 교회나 수도원이 성상사용금지에 반발할 경우, 그것을 구실로 그들 소유의 땅을 몰수해서 국가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서유럽의 경우에도 교회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것에 더해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국가재정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카놋사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는 군주에게 도전했지만, 비잔틴제국에서도 교회나 수도원은 면세 특권을 누리면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레오 3세의 성상숭배금지에는 교회와 성직자를 견제하고 황제숭배를 강화하려는 의도 외에도 이슬람제국과 벌이는 사상전에서 우위에 서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비잔틴제국을 군사적으로 괴롭혀온 이슬람제국은 성상사용을 들어 기독교를 우상숭배종교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718년에 비잔티움을 겨냥하고 침공해온 이슬람 해군을 격퇴시킨 전투에서 레오 3세를 도운 소(小)아시아 지역의 농민도 성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겨 반대했다. 물론 교황청은 비잔티움교회의 성직자들과 함께 성상사용금지에 강경하게 맞섰다. 로마교회에서는 성상사용이 오래된 관행이었을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성상에는 숭배를, 신에게는 예배를' 해야 하는 것으로 해왔다.
레오 3세의 조처에 저항한 교황청 인사들은 그리스도를 형상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강림했다는 것을 의문시하는 불경스런 생각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성상파괴를 지상의 모든 물질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는 동방적 사고방식–성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옳지 않은 사상으로 규정했다–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상사용금지는 곧 교리에 큰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사실 성상은 교회의 재정적 수입에는 물론 전도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야만적 이교도인 게르만족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킬 때에 형상물인 성상은 큰 도움을 주었다. 보통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일차적 신뢰감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787년에 해제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내린 성상 파괴령은 로마와 비잔티움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황은 잦은 교리 분쟁에도 황제를 군주로 인정하고 예의로 대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운동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적대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715~731)는 우상파괴령에 불복하면서 도전적이고 거친 어투로 레오 3세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교황은 서방 세계 전체는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으며, 황제가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상(像)을 없애려 할 경우 서방 야만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위협했다.
교황의 도전적인 서한에 격분한 레오 3세는 제국의 라벤나 총독에게 로마로 쳐들어가 그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총독의 군대는 롬바르디아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했으며, 로마에 있던 황제의 군대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성했다. 그러자 황제는 제국령에 속했던 남이탈리아의 거대한 교황령을 몰수하고,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교구 등에 대한 종교재판권을 교황에게서 빼앗아 비잔티움 총대주교에 넘겼다. 그로 인해 교황청은 넓은 영지와 다수의 교회를 잃어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그레고리우스 2세 이후에도 교황청의 성상파괴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를 이은 시리아 출신의 그레고리우스 3세 역시 성상숭배 금지 조치에 저항하면서 성상파괴자를 파문에 처했다. 레오 3세는 계속되는 교회와 수도원의 저항을 무시하고 성상사용금령을 내리는 한편 이미 가톨릭교로 개종했으나, 교황청과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롬바르디아족을 부추겨 교황을 압박하려 했다.
당시 롬바르디아족은 북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웠고, 그 일부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두 개의 공국을 세웠다. 그들은 아리우스파 기독교에서 점차 정통 가톨릭교로 개종했으며 교황청과도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 3세가 성상파괴를 강행할 즈음인 8세기 초에 이르러 롬바르디아의 호전적인 왕 리우트프란드(712~744)는 세력권을 넓히면서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두 공국을 병합한 다음 이탈리아반도에 있던 비잔틴제국 영토를 빼앗기 위해 공격했다.
나아가 그는 성베드로의 교구(로마)를 파괴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왕국의 중심 교구로 삼으려 했다. 물론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롬바르디아왕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존재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교황청은 로마를 보호해 줄 군사력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레고리우스 3세는 비잔틴제국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하고 739년에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것은 '로마–비잔티움' 관계 대신 '로마–파리'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마르텔은 732년의 뚜르전투에서 롬바르디아의 후원을 받은 사정도 있어서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 피핀과 손자 카롤루스대제는 교황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원정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로마와 비잔티움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상파괴운동 (초기 기독교 이야기, 2007. 3. 30.,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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