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동(朴小東)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 교수
1. 머리말
이 책은 조선 후기 영ㆍ정조 시대에 활동한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잡기(雜記)를 국역한 것이다. 청성은 당대에 이미 문학으로 명성을 떨쳐 영조와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인물로, 특히 고문에 정통하여 문체의 순정함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 문학적 역량을 일본 통신사행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본 문사들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다수의 사행 관련 기록을 남겼다. 문학적 역량이 탁월했던 만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고, 예술 방면에도 재주를 보여 나걸(羅杰), 김상숙(金相肅) 같은 인물과 교유하기도 하여 인문의 극성기였던 영ㆍ정조 시대 문학의 한 국면을 점하고 있었다. 청성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18세기 문학 현상 가운데 중요한 지점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더구나 당대 풍속과 시대 풍경을 담고 있는 일화, 기층민의 삶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한문 단편류, 학문 경향에 관한 날카로운 지적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성잡기(靑城雜記)》는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자료이며, 《청성잡기》의 내용 중 4편만이 《청성집(靑城集)》에 수록되고 나머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로서 역사적인 자료로서나 내용의 교육적인 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2. 저자의 생애
저자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 1732년(영조8)에 태어나 1809년(순조9)에 78세를 일기로 고향 포천(抱川)에서 졸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1765년(영조41)에 가서야 서류(庶類) 중의 인재로 추천되어 조용(調用)되었으며, 정조 즉위 이후 학문을 인정받아 교서관 교리로서 전후 9년 동안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실시할 때에는 순정문(醇正文)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저자의 이력을 역임 관직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53년(영조29)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1756년(영조32) 25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였다. 1759년(영조35) 28세에 교서관 부정자, 정자, 박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신전강(文臣殿講)과 전경문신전시(專經文臣殿試)에서 영조의 칭찬을 받고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61년(영조37) 30세에 성균관 전적, 봉상시 주부가 되었으며, 1762년(영조38) 31세에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이 되었다. 1763년(영조39) 32세에 조엄(趙曮)을 따라 서기(書記)로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1764년(영조40) 33세에 성균관 전적, 승문원 교검, 봉상시 판관을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41) 34세 되던 해 홍봉한(洪鳳漢)이 서얼(庶孼) 중의 인재로 추천하니 영조가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여, 1766년(영조42) 35세에 울진 현령(蔚珍縣令)이 되었다. 이때 자신의 호를 ‘동호장(東湖長)’이라 하였다. 1772년(영조48) 41세에 부친의 복(服)을 마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당시 견책당한 간신(諫臣)을 구원하다가 삭직(削職)되었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1774년(영조50) 43세에 사헌부 장령이 되고, 이어 평안도 운산 군수(雲山郡守)가 되었다. 1777년(정조1) 46세에 체직되어 돌아와 1778년(정조2) 47세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되었다. 1781년(정조5) 50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당시 교서관을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를 관장하여 서적의 수교(讐校)와 편찬을 맡았고, 51세 되던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한 공로로 승서(陞敍)되었다. 다음 해에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진정(賑政)을 잘 수행한 공으로 1784년(정조8) 53세에 승서되었다. 1787년(정조11) 56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을 때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북청 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가 되어 부임할 때에 임금이 어필(御筆)과 설전첩(雪牋帖)을 하사하여 옛사람의 격언(格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당시 패관소품(稗官小品)의 문체가 유행하여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천명하고 글을 지어 올리게 하자 고금의 문로(文路)를 논한 수천 자의 글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17) 62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위원 군수(渭源郡守)가 되었다. 1795년(정조19) 64세에 체직되어 포천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에 특명으로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수교(讐校)하고, 이서구(李書九)와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였다. 이 해 겨울 임금이 《춘추(春秋)》를 간행하려 하면서 대문(大文)의 글씨를 쓰도록 하고 학식과 필법이 순정(醇正)하다고 칭찬하니 스스로 호를 ‘순재(醇齋)’라 하였다. 1797년(정조21) 66세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춘추》가 간행되자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1803년(순조3) 72세 되던 해 가을, 아들 성해응(成海應)이 음성 현감(陰城縣監)이 되자 임소(任所)로 따라가면서 화양동(華陽洞)의 문정서원(文正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배알하고 일대를 유람한 뒤 화양동기(華陽洞記)를 지었다. 1807년(순조7) 76세 되던 해 가을에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갔다. 1809년(순조9) 2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ㆍ동호장(東湖長)ㆍ순재(醇齋)이다. 5대조인 성준구(成俊耈:1574~1633)의 서손(庶孫) 후룡(後龍) 때부터 서얼의 가계로 내려왔으나, 6대조인 성이문(成以文)은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고, 청성과 그의 아들 성해응은 각각 교서관 교리를 지내는 문한(文翰)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3. 대본 및 내용
이 국역서의 대본으로 사용한 《청성잡기》는 1984년 당시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이었던 고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성 저서 필사본(筆寫本) 다수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잠시 보관하면서 만들어 둔 1부의 복사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후일 이를 번역ㆍ간행할 계획으로 행초서로 된 원문을 정서(整書)하여 두었었다.
참고로 연구자들을 위하여 당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필사본들의 서명(書名)을 살펴보면 《표1》과 같은데, 이 자료들은 간행본으로 나온 《청성집(靑城集)》 편찬에 사용된 원본들로 추정되나 현재 소장처는 자세하지 않다.
《표 1》 1984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보관하였던 서목
서명 책수 비고 서명 책수 비고
靑城雜記 3 필사본 靑城小稿 1 필사본
靑城詩稿 3 " 達句長軸 1 "
靑城詩 1 " 達句餘馥 1 "
靑城詩文 1 " 澄淸鴉集 1 "
蟾洲錄 1 " 坯窩重言 1 "
靑城漫筆 2 " 關西紀行 1 "
靑城筆跡 3 " 靑城小藁 1 "
계 14종 21책
전체 체재는, 1면이 10행 20자이며 제3책의 후반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필체의 유려한 행초서로 되어 있다. 표제인 ‘청성잡기(靑城雜記)’는 10행 이외의 난에 쓰인 것으로 보아 당초 필사할 때 쓴 것이 아니라 후일 첨가한 것으로 보이며 필체도 본문과 다르다.
이 책의 저작 시기는 학계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제1책에 1790년(정조14)에 있었던 일화가 실려 있고, 이 1책에 평어(評語)를 덧붙인 것으로 알려진 이덕무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12 아정유고(鴉亭遺稿) 4에 실린 ‘비서 성사집이 시를 보내어 화답을 요청하므로 그 운에 차하다〔成祕書士執大中寄詩要和仍次其韻〕’라는 시의 자주(自註)에 “사집이 〈췌언(揣言)〉 〈질언(質言)〉 〈성언(醒言)〉 각 한 편을 짓고 나에게 비평을 청하였다.……” 하였는데, 이 시는 1791년 여름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제1책은 1791년 여름 이전에 완성되어 이덕무에게 평을 부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2책에는 1792년(정조16)에 일어난 조운선(漕運船) 전복 사건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제3책에는 1801년(순조1)에 있었던 이가환(李家煥)의 사역(邪逆) 사건의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2책과 3책은 1책 저술 이후 1801년 직후까지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아들인 연경재(硏經齋) 성해응의 가필이 이루어지고 김이영(金履永)이 지은 황명유민열전서(皇明遺民列傳序)를 추록하였다. 황명유민열전서가 쓰인 시기가 1806년이므로 《청성잡기》가 현재 형태로 갖추어진 것은 1806년 무렵이라 할 수 있겠다. 요약하자면 1790년에서 1801년까지 10여 년 동안 청성에 의해 작성되고 그 후 5년 동안 연경재에 의해 가필되어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책별 구성 내용을 살펴보자. 제1책은 총 90장으로 췌언(揣言) 11편, 질언(質言) 142항목, 성언(醒言) 123항목이다. 제2책은 총 80장으로 성언 225항목이다. 제3책은 총 49장으로 성언 63항목이다. 다만, 제3책에는 성언 63항목 중 끝부분 12항목이 필체가 다르며, 성언 이외에도 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지은 진주문(陳奏文), 홍문관 제학 김노경(金魯敬)이 고쳐 지은 진주문의 개본(改本), 김이영이 지은 황명유민열전서, 이규상(李奎象)과 목만중(睦萬中)이 각각 지은 순재기(醇齋記), 염양일일지법(恬養一日之法), 나걸(羅杰)이 지은 필경(筆經), 화양진인(華陽眞人)이 지은 2편의 예학명(瘞鶴銘),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이 지은 국송(菊頌) 등이 있고 마지막에는 한글을 섞어서 쓴 갑민가(甲民歌)가 실려 있다. 이 중 진주문부터 순재기까지는 필체가 다르고 나머지는 잡기와 필체가 같다. 본 국역서에서는 제3책의 성언 내용까지만 국역하였으며, 권차도 저자가 분류해 놓은 제목을 기준으로 나누어 총 5권으로 편집하였다.
저자가 분류해 놓은 편별로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췌언(揣言)
11편의 논(論)이다. 제목을 살펴보면, 초한성패(楚漢成敗, 초한의 성패), 평발(平勃, 진평과 주발), 진한인포(秦漢仁暴, 진나라의 포악함과 한나라의 어짊), 진초보복(秦楚報復, 진나라와 초나라의 상호 보복), 동공(董公), 한신(韓信), 전횡(田橫), 상주(商周, 상나라와 주나라), 이좌거(李左車), 전연년(田延年), 소하대기미앙궁론(蕭何大起未央宮論, 소하가 미앙궁을 사치스럽게 지은 데 대한 논)이다. 특히 마지막 소하대기미앙궁론에는 제목 아래에 “정시에서 ‘고조(高祖)는 본래 진실하지 않았고 소하도 속임수가 있었다.’고 글을 지었는데 낙방하였다.〔庭試製帝固不誠而荷亦詐矣見落〕”라는 저자의 주석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11편 중에서 동공, 한신, 전횡, 전연년 4편은 《청성집》 권8 논(論)에 실려 있다.
이들은 주로 중국의 역사적인 사건의 일단이나 특정 인물의 업적을 평론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췌언’이라는 말은 “고금의 역사와 인물에 대하여 장단 득실을 헤아려 본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특히 이 1책의 내용 중 췌언은 제목 아래와 문장 중간 또는 말미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평어(評語)가 있는데, 문장 행간에 평어가 있는 경우는 해당 부분에 비점이나 관주가 표시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 비평은 당시 저자와 교류가 깊었던 청장관 이덕무의 평임이 김영진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이 평어들은 한 편 또는 일정 문장의 표현에 대해 칭탄하거나 보충하거나 의미를 요약ㆍ부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국역서에도 제 위치에 작은 글씨로 번역하여 독자가 같이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질언(質言)
142항목이다. 췌언과는 달리 제목이 없이 행(行)을 달리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내용도 1~3행 정도로 짧다.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격언들로서 삶의 철학이 담겨 있거나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말들이다. 내용을 성격별로 분류해 보면, 처세나 수양에 관한 내용이 86항목(60%)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인과응보 등 철학적인 섭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30항목(21%), 정치 세태나 인물에 관한 내용이 14항목(9.9%), 학문의 중요성을 말하는 내용이 12항목(8.5%)이다. 따라서 ‘질언’이라는 제목은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여 질정하는 말’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내용 유형별로 몇 항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처세에 관한 내용
“윗자리에 있을 적에는 아랫사람이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공격하게 하지 말고, 아랫자리에 있을 적에는 윗사람이 위엄으로 자신을 억누르게 하지 않는다면 처세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 등 철학적인 섭리에 관한 내용
“드러나게 죄를 지으면 남의 책망이 미치고, 은밀하게 죄를 지으면 귀신의 주벌이 이른다. 이 두 가지 죄를 함께 지으면 하늘의 재앙이 내린다.”
정치 세태나 인물에 관한 내용
“문벌로 등용되는 일이 많아지자 자손들의 공손한 기풍이 끊어졌고, 당파간의 다툼이 혹심해지자 겸양의 풍속이 사라졌다. 윗사람은 예의를 범하고 아랫사람은 포악해서 천재(天災)와 인화(人禍)가 함께 생겨났다.”
학문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
“학문이 실용에 맞지 않으면 그런 학문은 하지 않는 것이 낫고, 문장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으면 그런 문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질언에도 원문의 위쪽 여백, 항목의 말미, 또는 행간(行間)에 짧은 평어가 있는데 췌언보다는 많지 않다. 평어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전적으로 동감을 나타내는 유형이다.
“분수대로 운명에 맡기면 만사가 제대로 되고, 권세를 탐하여 영달을 좇으면 온갖 죄가 생겨난다.”
라는 내용 말미에,
“백 번 절할 만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릴 만한 글이다.”
라고 짧게 평하여 동감을 표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독자들에게 행간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간접 조언을 하는 유형이다.
“처신(處身)하는 것은 청탁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빈부의 중간으로 해야 하며, 벼슬살이하는 것은 진퇴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남과 사귀는 것은 깊고 얕음의 중간으로 해야 한다.”
는 내용에 대하여
“세상을 조롱하는 공손하지 않은 뜻이 담겨 있으니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알 것이다.”
라고 평하여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저자의 진의를 새겨서 이해할 것을 독자에게 당부하고 있다.
성언(醒言)
제1책에 123항목, 제2책에 225항목, 제3책에 63항목 등 총 411항목으로 이 책에서 제일 많은 양을 차지한다. 역시 제목은 없고 행을 바꾸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본 국역서에서는 내용을 요약하여 전달하고자 나름대로 편마다 제목을 붙였다. 내용은 주로 당시 여항의 설화, 자신의 체험담이나 목격담, 인물평,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화, 시(詩)에 얽인 일화, 처세담, 각종 제도ㆍ조치 등에 따른 폐해 비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내용마다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특히 인간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도 반드시 원인에 따른 응보가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많다. 따라서 ‘성언(醒言)’의 의미는 ‘깨우치는 말’이라고 이해된다.
인용하고 있는 자료를 기준으로 분류해 보면, 크게는 중국 사료와 한국 사료로 구분되는데 중국 사료를 중심으로 구성된 항목이 116항목(28%), 한국 사료로 구성된 것이 296항목(72%)으로 우리나라의 사료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다시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짧은 격언류가 115항목(28%)으로 제일 많고, 다음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얽힌 일화ㆍ비화를 소개하는 내용이 111항목(27%)이고, 다음은 기생이나 노비ㆍ걸인 등 기층민에 대한 일화 등을 소개한 내용이 58항목(14%), 인과응보 또는 관상ㆍ점ㆍ운명에 관한 내용이 57항목(14%)이며, 우리나라의 여러 제도에 관한 변천 유래를 소개한 것이 23항목(5.6%), 영조ㆍ정조에 관한 일화가 14항목, 시문ㆍ명필에 관한 일화가 13항목, 본인의 체험담 등이 11항목이고, 귀신 등에 관한 일화 등이 9항목이다.
이들을 유형별로 한 항목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격언류를 보면, 대부분 짧게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고금의 역사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아래 예에서 보듯이 청성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처세 철학인 경우가 많다.
“어리석으면서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집안을 망치고, 총명하면서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몸을 망친다.”
다음은 역사적인 사건의 비화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의 비화나 일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독자들이 역사의 새로운 일면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때의 다음 일화 같은 경우이다.
“권정길(權井吉)은 신분이 미천한 자인데 용감하기로 이름이 났다. 병자호란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춘천 방어사로 있던 권정길은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위해 달려왔다. 그는 검단산(黔丹山)에 이르러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멀리서 포위된 남한산성과 호응하였다. 성에서 그를 불러 함께 수비하자고 하자, 진군의 북을 울리며 곧바로 전진하여 적진을 옆에 두고 지나갔다. 적장(敵將)이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공격할 것을 청하자, 칸이 그를 저지하며 ‘병력이 적은데도 사기가 대단하니, 그 장수가 틀림없이 용맹할 것이다. 저들을 섬멸한다 하여도 무공(武功)이랄 것이 없고 공연히 우리의 예기(銳氣)만 손상되니, 차라리 그들을 성에 들어가도록 놔두어 군량을 축내도록 하는 편이 낫다.’ 하였다. 권정길은 결국 병력 손실 없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용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리학의 병폐를 은근히 지적하는 내용을 보면 저자의 학문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들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출신인 서얼에 관한 내용도 많이 보인다. 서얼이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던 유래나 세간의 여론 및 서얼이 처신하기 어려운 세태 등을 언급한 내용들이 그렇다. 이 글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은 서얼의 시각이 얼비쳐져 있다.
“나라에서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태종(太宗) 을미년(1415,태종15)부터 시작되었는데, 실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때문이었지만 정도전의 손자인 문형(文炯)은 그래도 판중추사(判中樞事)를 지냈다. 관습이 점차 고질이 되어 인조(仁祖) 즉위 초에 처음으로 병조와 형조, 공조에 한하여 허통(許通)을 허락하였으나 역시 이를 적용받은 서얼은 얼마 없었고, 영조(英祖) 임진년에 처음으로 서얼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아 시행한 지 5년 만에 다시 막히게 되었다. 또 금상(今上)께서는 이를 절목(節目)으로 정하여 반포하셨으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에서 여전히 묻어 두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대해 허통을 주창한 것이 세 번이니, 인조의 성지(聖旨)이자 선왕인 영조의 방침이며 금상의 왕명이다. 이에 반해 이를 막는 것은 그저 세속의 의논일 뿐인데도 이를 저지하니, 장자(莊子)가 한 ‘풍속이 임금보다 무섭다.’는 말이 맞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특수한 제도의 유래나 풍습의 유래에 대한 기록도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투전놀이가 전해지게 된 유래, 명나라 태조가 대신에게 하사했던 옥대를 명나라가 망한 뒤에 우리나라 사신이 구입해 와서 왕이 황단(皇壇)에 망배(望拜)할 때 착용하게 된 유래, 우리나라 온돌 설치의 유래, 말 발에 무쇠로 굽을 하게 된 유래 등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다음은 벽돌로 쌓은 구성(龜城)의 유래에 관한 자료이다.
“구성(龜城)은 옛날에는 여진(女眞)의 땅이었는데, 고려의 서희(徐熙)가 처음 여진을 몰아내고 그곳에 성을 쌓았다.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그곳을 지키면서 요(遼)나라에 저항하였는데 참으로 천험의 요새이다. 숙종조에 부사(府使) 권순(權詢)이 성곽을 개축하였다. 읍내 북쪽에 벽평(甓坪)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여진이 벽돌을 묻어 놓은 곳이라고 전해져 왔다. 권순은 본래 재간이 뛰어났는데, 한 길 남짓한 철봉을 주조하여 그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 가지고는 그 들판에 나가 여기저기 깊숙이 쑤시고 다니다가 걸려서 들어가지 않는 곳을 파 보면 모두 벽돌이었다. 그 벽돌을 이용해 성을 쌓고 홍예문(虹霓門)과 섬돌, 도로와 담장에도 모두 그 벽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구성의 성곽 전체는 돌보다 벽돌이 많다.”
인과응보에 관한 일화나 점과 관상, 운명, 좌우명에 대한 기록도 많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청성 자신에 관계되는 내용이다.
“봉산(鳳山)의 소경 유운태(劉雲泰)가 나의 운명을 점치고는 말하였다. ‘운수가 좋습니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얼굴이요, 비단같이 고운 마음씨이니 관직 생활 할 적에 사람을 많이 살릴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늘 사람 살리기를 내 일로 삼았는지라 살인 옥사(獄事)가 내 덕에 다시 조사되어 억울한 누명이 밝혀진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희천(熙川)에서 죄수 두 명을 죽였고 경주(慶州)에서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삼성추국(三省推鞫)을 당할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자들이었다. 법으로는 용서 없이 사형시킬 죄이지만 막상 처벌할 때에는 소경 유운태가 한 말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청성 자신의 관상에 대하여 영조로부터 평가받은 일화도 재미있다. 이는 청성의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좋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군주로부터 받은 이런 평가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타고난 관상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더 무게를 두어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자 한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황송하게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한번은 임헌(臨軒)하여 연신(筵臣)들에게 말하였다. ‘성(成) 아무개의 얼굴은 하관(下觀)이 풍만한 것이 강자아(姜子牙 강 태공(姜太公) )의 모습과 닮았다.’ 당시 내 나이 아직 서른이 못 되었기에 혼자 남몰래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성주(聖主)를 만났는데 어찌 여든이 되어서야 문왕(文王)을 만난 자와 비교한단 말인가. 성왕(聖王)의 말도 때로는 틀릴 때가 있나 보다.’
지금 내 나이 예순이 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에야 비로소 금상(今上 정조 )에게 세상에 흔치 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옛날 문장에 재주 있는 신하로 한나라의 두 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ㆍ사마상여(司馬相如) ) 이래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나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대왕이 나를 강자아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오늘을 예견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감개무량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삼가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풍만하고 수척한 것은 오로지 양생에 달려 있으니 단지 골격만이 부귀로 인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치게 수척해서 사람들이 모두 요절할 것이라고 여겨 장가도 들지 못할 뻔했는데, 가정에서 교도하여 보양을 적절하게 한 덕분에 스물이 넘어서는 혈기가 충만하고 얼굴이 풍만해서 도리어 관상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살펴본 자들이 대부분 나를 두고 풍채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허연 수염에 홍안이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섭생(攝生)조차도 이러고저러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무슨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줄였을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술, 여색, 재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거의 실천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내 자신을 양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섭생은 오히려 정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자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금상이 또 나의 얼굴을 가지고 경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여 못난 나의 관상이 재차 성왕(聖王)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평생에 잊지 못할 은총이 아니겠는가. 이것 또한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여항의 일화 중에는 도둑이나 걸인, 노비, 기녀, 승려 등 특수 신분인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와 충신, 효자, 열녀들의 애절한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당시에 생활하였던 사람들로서 실명이 기록되고 있어 당시 기층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남원 열녀의 애절한 사연을 보자.
“남원에 사는 상번군(上番軍) 황곡수(黃曲壽)의 아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에 복무하러 간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 통곡하고는 시부모에게 음식을 권하는 등 그 모습이 그다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손수 대나무 발을 엮어 끌고서 남자 복장으로 상경하여 남편의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집에 빈소를 차렸다. 그런 뒤 몸을 깨끗이 씻고 밤에 빈소에서 잠을 잤는데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아 문을 열어 보니 남편 시체를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다. 남편의 배가 그녀의 배에 붙어 있었는데 언 배와 따뜻한 배가 맞닿으면 따뜻한 배 쪽으로 반드시 쑥 들어간다. 마침내 둘을 떼어낼 수가 없어서 시체를 함께 묶어 장사 지냈다. 열녀로구나!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이다.”
영조와 정조에 얽힌 일화, 비화도 여러 편 보이는데, 특히 영조가 단행한 개혁 정치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해 볼 만한 내용으로, 영조의 개혁 정치의 성격과 그것을 바라보는 청성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영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52년 동안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중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고치지 못한 고질적인 폐단을 모두 혁파한 일도 포함된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들을 기록해 본다.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은 세종이 변방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변방의 인구가 이미 충분한데도 이주는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고 변방을 어지럽혔던 오랑캐는 평정되었지만 그 폐단은 심한 고질이 되어 도망하는 자가 끊임없이 나와 도리어 변방 고을에 폐해를 끼쳤는데, 영조 갑자년(1744)에 폐지하였다.
압슬형(壓膝刑)과 낙형(烙刑)은 세조가 사육신의 옥사를 다스릴 때 시작되어 박정재(朴定齋)가 형벌을 받을 때에 이르러 그 참혹함이 극에 달했는데, 영조 갑진년(1724)에 압슬형을 폐지하고 계축년(1733)에 낙형을 폐지하였다.
양산종부율(良産從父律)은 어느 임금 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 나라의 양민들이 거의 모두 사노비가 될 지경이었다. 현종 기유년(1669)에 처음 양인 어미 소생은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했다가 숙종 을묘년(1675)에 환천(還賤)시켰고, 신유년(1681)에 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했다가 기사년(1689)에 환천시켰는데, 영조 경술년(1730)에 신해년(1731) 이후 태어난 자들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양인 어미 소생이 노비가 되는 폐단이 비로소 혁파되었다.
도둑을 다스리는 형률은 초범(初犯)은 팔뚝에 자자형(刺字刑)을 가하고 재범(再犯)은 얼굴에 자자형을 가하고 삼범(三犯)인 경우에는 처형했는데, 영조가 모두 폐지하였다. 난장률(亂杖律)은 김자점(金自點)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영조 경인년(1770)에 폐지하였고,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역시 폐지하였다. 죄인에게 차꼬나 수갑을 채울 때는 두 손을 모두 채웠는데, 영조가 죄인의 왼손을 풀어 주도록 명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 하였다.”
일본에 관계된 내용도 흥미롭다. 자신이 일본 사신 일행으로 동행하였을 때의 내용이나, 일본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사당에 우리나라 임금의 어필이 걸리게 된 일화도 흥미롭다.
“역대 임금의 글씨 중에 ‘영산법계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이란 여덟 글자의 큰 글씨가 있는데 효종대왕의 글씨이다. 일본의 원가강(源家康 덕천가강 )이 평씨(平氏 풍신수길(豐臣秀吉)의 일족 )를 몰살하고 관백(關白)이 되니, 우리나라 임진년의 원수가 그로 인해 갚아진 셈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여 다시 화친하게 되었다. 원가강은 일광산(日光山)에 안장되어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에는 제사까지 아울러 지내기 위해 소를 싣고 갔는데 백정이 동행하였다. 그 후 제사는 중단되었지만 백정이 동행하는 것은 폐지되지 않으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죄인을 참수할 때를 대비한 것이라고 여겼다. 일광산에 원가강의 원당(願堂)을 창건하여 ‘동조원(東照院)’이라 이름하고는 우리 임금의 친필을 편액으로 걸어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요청하자, 효종이 위의 여덟 글자를 지어서 사관(寫官)에게 여러 차례 쓰게 하였는데 끝내 마음에 들지 않자 친히 써서 보냈다. 그중에 한 부는 청평도위(靑平都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평민 김기서(金箕書)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김기서는 바로 심익현의 외손이다.”
이는 효종 6년(1655)에 효종이 어필을 하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이보다 앞서 인조 때의 문신 학자 이명한(李明漢:1595~1645)의 《백주집(白洲集)》 권16 ‘어서일광산첩발(御書日光山帖跋)’에 의하면 인조 때에 어필을 하사해 주기를 간청하여 ‘일광정계창효도량(日光淨界彰孝道場)’이라고 흰 비단에 써서 하사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름을 달리하여 효종에게 다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성언에서도 약간의 두주 형식의 평과 문장 중간 중간에 비점이나 관주를 치고 기입한 평어가 있다. 다만 췌언이나 질언보다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제2책부터는 없다. 아마 평자가 제1책까지만 본 것이라 추정된다.
평어는 역시 앞 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편의 의미를 요약하거나 저자의 의도와 필력의 뛰어남을 칭탄하거나 또는 저자가 숨겨 놓은 의미를 드러내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강계 지방의 은광 주변에서 은을 훔쳐다 팔아서 먹고사는 무뢰배의 비열한 행태와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사통시켜 먹고사는 타락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손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어 한번 웃을 거리로 삼으려고 기록하였다.”고 한 내용의 말미에,
“추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였고, 필력(筆力)도 웅장하다. 아, 내가 살펴보건대 대체로 의복과 두건을 잘 차리고 점잖은 걸음걸이에 말을 유창하게 하는 양반들이 어쩌면 광산 입구를 기웃거리는 무뢰배들의 변신인지 모르겠다.”
라고 하여 당시의 타락한 양반들을 풍자함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더 보완ㆍ부각하고 있다. 반면에 많지는 않지만, 저자가 착오로 잘못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평이 아닌 주석 형식의 글을 붙이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나라 계찰(季札)에 대하여 “부자(夫子공자)도 일찍이 그가 예(禮)에 익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장례에 가서 보고 직접 비문을 썼다.”는 내용 아래에 “부자는 오나라에 간 적이 없다.”라고 기록한 경우이다.
4. 맺음말
‘잡기(雜記)’라는 말은 내용의 유를 구분하지 않고 이런저런 내용을 함께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청성이 기록한 내용임에도 《청성집》에는 4편만이 실리고 나머지는 필사본 자체로 유전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한 순서대로 저자의 의도를 다시 살펴보자면, 먼저 역사의 일단이나 인물의 장단ㆍ득실을 헤아려 보는 ‘췌언(揣言)’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저자가 체험하고 얻은 여러 경우의 진리를 헤아려 질정해 보는 ‘질언(質言)’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으로 이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하고자 하는 글들로 ‘성언(醒言)’을 저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이 《청성잡기》가 국역되어 간행됨으로써 예민한 시대 감수성을 지닌 문인의 붓을 통해 변화해 가는 18세기 학문과 문학 경향의 단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진한인포(秦漢仁暴)라는 짧은 논을 통해 청성은 기존 학자들이 신랄하게 비판해 마지않았던 진시황의 과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뒤집어 읽기에 대한 시도는 식자의 현학 취미가 아니라 조선 후기 학자들의 변화해 가는 역사 인식의 징후로 읽어야 한다. 이것이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날카로운 직관과 처세에 대한 격언, 실용주의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도 우리는 당대를 고민하고 대응하는 엄정한 인문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청성이 순정한 문체로 이름이 높았음은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거니와, 《청성잡기》 가운데는 이 외에도 청언소품체에 해당하는 문장들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와 함께 일상에서 만나는 관습과 풍속, 그리고 사소한 역사 유물 등 자질구레한 문제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느끼며 그 유래를 하나하나 밝혀 들어 놓았는데, 이런 기록들은 자료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일상의 주변에 자리하는 모든 것에 애정의 시선으로 다가간 청성의 눈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부여해 볼 수 있다. 이런 특징 역시 당대 문인들의 한 경향으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청성잡기》에 비평을 했던 청성의 절친한 벗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나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 등을 비롯해 당대 몇몇 작가의 저작들에서 이런 경향의 기록들이 나타난다. 인식의 변화에 따라 글쓰기의 소재와 관심 대상이 얼마간 변모한 것이다.
사실적 묘사와 뛰어난 인물 형상화도 《청성잡기》가 이룬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강계(江界) 지방의 은광(銀鑛) 주변에 기생하는 무뢰배들을 묘사한 글 아래에 있는 이덕무의 비평을 상기해 보자. 그렇다면 청성의 묘사와 인물 형상화가 얼마나 탁월한 솜씨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외에도 충신과 열녀, 영조의 정치 개혁, 일본에 대한 청성의 시각이 잡기 속에 가감 없이 소개되어 있다. 청성의 면모를 진솔하게 대할 수 있는 《청성잡기》를 국역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와 흥미로운 작품을 소개하는 동시에, 청성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본 국역서가 18세기 문인들의 문학 활동과 사고 경향에 대한 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며 이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후속 성과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秦漢仁暴
1. 머리말
이 책은 조선 후기 영ㆍ정조 시대에 활동한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쓴 잡기(雜記)를 국역한 것이다. 청성은 당대에 이미 문학으로 명성을 떨쳐 영조와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인물로, 특히 고문에 정통하여 문체의 순정함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 문학적 역량을 일본 통신사행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본 문사들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다수의 사행 관련 기록을 남겼다. 문학적 역량이 탁월했던 만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고, 예술 방면에도 재주를 보여 나걸(羅杰), 김상숙(金相肅) 같은 인물과 교유하기도 하여 인문의 극성기였던 영ㆍ정조 시대 문학의 한 국면을 점하고 있었다. 청성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18세기 문학 현상 가운데 중요한 지점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더구나 당대 풍속과 시대 풍경을 담고 있는 일화, 기층민의 삶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한문 단편류, 학문 경향에 관한 날카로운 지적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청성잡기(靑城雜記)》는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자료이며, 《청성잡기》의 내용 중 4편만이 《청성집(靑城集)》에 수록되고 나머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로서 역사적인 자료로서나 내용의 교육적인 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2. 저자의 생애
저자 성대중은 서얼 출신으로 1732년(영조8)에 태어나 1809년(순조9)에 78세를 일기로 고향 포천(抱川)에서 졸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1765년(영조41)에 가서야 서류(庶類) 중의 인재로 추천되어 조용(調用)되었으며, 정조 즉위 이후 학문을 인정받아 교서관 교리로서 전후 9년 동안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실시할 때에는 순정문(醇正文)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저자의 이력을 역임 관직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53년(영조29)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1756년(영조32) 25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였다. 1759년(영조35) 28세에 교서관 부정자, 정자, 박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신전강(文臣殿講)과 전경문신전시(專經文臣殿試)에서 영조의 칭찬을 받고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61년(영조37) 30세에 성균관 전적, 봉상시 주부가 되었으며, 1762년(영조38) 31세에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이 되었다. 1763년(영조39) 32세에 조엄(趙曮)을 따라 서기(書記)로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1764년(영조40) 33세에 성균관 전적, 승문원 교검, 봉상시 판관을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41) 34세 되던 해 홍봉한(洪鳳漢)이 서얼(庶孼) 중의 인재로 추천하니 영조가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여, 1766년(영조42) 35세에 울진 현령(蔚珍縣令)이 되었다. 이때 자신의 호를 ‘동호장(東湖長)’이라 하였다. 1772년(영조48) 41세에 부친의 복(服)을 마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당시 견책당한 간신(諫臣)을 구원하다가 삭직(削職)되었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1774년(영조50) 43세에 사헌부 장령이 되고, 이어 평안도 운산 군수(雲山郡守)가 되었다. 1777년(정조1) 46세에 체직되어 돌아와 1778년(정조2) 47세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되었다. 1781년(정조5) 50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당시 교서관을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를 관장하여 서적의 수교(讐校)와 편찬을 맡았고, 51세 되던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한 공로로 승서(陞敍)되었다. 다음 해에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진정(賑政)을 잘 수행한 공으로 1784년(정조8) 53세에 승서되었다. 1787년(정조11) 56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을 때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북청 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가 되어 부임할 때에 임금이 어필(御筆)과 설전첩(雪牋帖)을 하사하여 옛사람의 격언(格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당시 패관소품(稗官小品)의 문체가 유행하여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천명하고 글을 지어 올리게 하자 고금의 문로(文路)를 논한 수천 자의 글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17) 62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위원 군수(渭源郡守)가 되었다. 1795년(정조19) 64세에 체직되어 포천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에 특명으로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수교(讐校)하고, 이서구(李書九)와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였다. 이 해 겨울 임금이 《춘추(春秋)》를 간행하려 하면서 대문(大文)의 글씨를 쓰도록 하고 학식과 필법이 순정(醇正)하다고 칭찬하니 스스로 호를 ‘순재(醇齋)’라 하였다. 1797년(정조21) 66세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춘추》가 간행되자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1803년(순조3) 72세 되던 해 가을, 아들 성해응(成海應)이 음성 현감(陰城縣監)이 되자 임소(任所)로 따라가면서 화양동(華陽洞)의 문정서원(文正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배알하고 일대를 유람한 뒤 화양동기(華陽洞記)를 지었다. 1807년(순조7) 76세 되던 해 가을에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갔다. 1809년(순조9) 2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ㆍ동호장(東湖長)ㆍ순재(醇齋)이다. 5대조인 성준구(成俊耈:1574~1633)의 서손(庶孫) 후룡(後龍) 때부터 서얼의 가계로 내려왔으나, 6대조인 성이문(成以文)은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고, 청성과 그의 아들 성해응은 각각 교서관 교리를 지내는 문한(文翰)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3. 대본 및 내용
이 국역서의 대본으로 사용한 《청성잡기》는 1984년 당시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이었던 고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성 저서 필사본(筆寫本) 다수를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잠시 보관하면서 만들어 둔 1부의 복사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후일 이를 번역ㆍ간행할 계획으로 행초서로 된 원문을 정서(整書)하여 두었었다.
참고로 연구자들을 위하여 당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필사본들의 서명(書名)을 살펴보면 《표1》과 같은데, 이 자료들은 간행본으로 나온 《청성집(靑城集)》 편찬에 사용된 원본들로 추정되나 현재 소장처는 자세하지 않다.
《표 1》 1984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보관하였던 서목
서명 책수 비고 서명 책수 비고
靑城雜記 3 필사본 靑城小稿 1 필사본
靑城詩稿 3 " 達句長軸 1 "
靑城詩 1 " 達句餘馥 1 "
靑城詩文 1 " 澄淸鴉集 1 "
蟾洲錄 1 " 坯窩重言 1 "
靑城漫筆 2 " 關西紀行 1 "
靑城筆跡 3 " 靑城小藁 1 "
계 14종 21책
전체 체재는, 1면이 10행 20자이며 제3책의 후반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필체의 유려한 행초서로 되어 있다. 표제인 ‘청성잡기(靑城雜記)’는 10행 이외의 난에 쓰인 것으로 보아 당초 필사할 때 쓴 것이 아니라 후일 첨가한 것으로 보이며 필체도 본문과 다르다.
이 책의 저작 시기는 학계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제1책에 1790년(정조14)에 있었던 일화가 실려 있고, 이 1책에 평어(評語)를 덧붙인 것으로 알려진 이덕무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12 아정유고(鴉亭遺稿) 4에 실린 ‘비서 성사집이 시를 보내어 화답을 요청하므로 그 운에 차하다〔成祕書士執大中寄詩要和仍次其韻〕’라는 시의 자주(自註)에 “사집이 〈췌언(揣言)〉 〈질언(質言)〉 〈성언(醒言)〉 각 한 편을 짓고 나에게 비평을 청하였다.……” 하였는데, 이 시는 1791년 여름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제1책은 1791년 여름 이전에 완성되어 이덕무에게 평을 부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2책에는 1792년(정조16)에 일어난 조운선(漕運船) 전복 사건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제3책에는 1801년(순조1)에 있었던 이가환(李家煥)의 사역(邪逆) 사건의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2책과 3책은 1책 저술 이후 1801년 직후까지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아들인 연경재(硏經齋) 성해응의 가필이 이루어지고 김이영(金履永)이 지은 황명유민열전서(皇明遺民列傳序)를 추록하였다. 황명유민열전서가 쓰인 시기가 1806년이므로 《청성잡기》가 현재 형태로 갖추어진 것은 1806년 무렵이라 할 수 있겠다. 요약하자면 1790년에서 1801년까지 10여 년 동안 청성에 의해 작성되고 그 후 5년 동안 연경재에 의해 가필되어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책별 구성 내용을 살펴보자. 제1책은 총 90장으로 췌언(揣言) 11편, 질언(質言) 142항목, 성언(醒言) 123항목이다. 제2책은 총 80장으로 성언 225항목이다. 제3책은 총 49장으로 성언 63항목이다. 다만, 제3책에는 성언 63항목 중 끝부분 12항목이 필체가 다르며, 성언 이외에도 대제학 심상규(沈象奎)가 지은 진주문(陳奏文), 홍문관 제학 김노경(金魯敬)이 고쳐 지은 진주문의 개본(改本), 김이영이 지은 황명유민열전서, 이규상(李奎象)과 목만중(睦萬中)이 각각 지은 순재기(醇齋記), 염양일일지법(恬養一日之法), 나걸(羅杰)이 지은 필경(筆經), 화양진인(華陽眞人)이 지은 2편의 예학명(瘞鶴銘),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이 지은 국송(菊頌) 등이 있고 마지막에는 한글을 섞어서 쓴 갑민가(甲民歌)가 실려 있다. 이 중 진주문부터 순재기까지는 필체가 다르고 나머지는 잡기와 필체가 같다. 본 국역서에서는 제3책의 성언 내용까지만 국역하였으며, 권차도 저자가 분류해 놓은 제목을 기준으로 나누어 총 5권으로 편집하였다.
저자가 분류해 놓은 편별로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췌언(揣言)
11편의 논(論)이다. 제목을 살펴보면, 초한성패(楚漢成敗, 초한의 성패), 평발(平勃, 진평과 주발), 진한인포(秦漢仁暴, 진나라의 포악함과 한나라의 어짊), 진초보복(秦楚報復, 진나라와 초나라의 상호 보복), 동공(董公), 한신(韓信), 전횡(田橫), 상주(商周, 상나라와 주나라), 이좌거(李左車), 전연년(田延年), 소하대기미앙궁론(蕭何大起未央宮論, 소하가 미앙궁을 사치스럽게 지은 데 대한 논)이다. 특히 마지막 소하대기미앙궁론에는 제목 아래에 “정시에서 ‘고조(高祖)는 본래 진실하지 않았고 소하도 속임수가 있었다.’고 글을 지었는데 낙방하였다.〔庭試製帝固不誠而荷亦詐矣見落〕”라는 저자의 주석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11편 중에서 동공, 한신, 전횡, 전연년 4편은 《청성집》 권8 논(論)에 실려 있다.
이들은 주로 중국의 역사적인 사건의 일단이나 특정 인물의 업적을 평론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췌언’이라는 말은 “고금의 역사와 인물에 대하여 장단 득실을 헤아려 본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특히 이 1책의 내용 중 췌언은 제목 아래와 문장 중간 또는 말미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평어(評語)가 있는데, 문장 행간에 평어가 있는 경우는 해당 부분에 비점이나 관주가 표시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 비평은 당시 저자와 교류가 깊었던 청장관 이덕무의 평임이 김영진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이 평어들은 한 편 또는 일정 문장의 표현에 대해 칭탄하거나 보충하거나 의미를 요약ㆍ부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국역서에도 제 위치에 작은 글씨로 번역하여 독자가 같이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질언(質言)
142항목이다. 췌언과는 달리 제목이 없이 행(行)을 달리하여 구분하고 있으며 내용도 1~3행 정도로 짧다.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격언들로서 삶의 철학이 담겨 있거나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말들이다. 내용을 성격별로 분류해 보면, 처세나 수양에 관한 내용이 86항목(60%)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인과응보 등 철학적인 섭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30항목(21%), 정치 세태나 인물에 관한 내용이 14항목(9.9%), 학문의 중요성을 말하는 내용이 12항목(8.5%)이다. 따라서 ‘질언’이라는 제목은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여 질정하는 말’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내용 유형별로 몇 항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처세에 관한 내용
“윗자리에 있을 적에는 아랫사람이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공격하게 하지 말고, 아랫자리에 있을 적에는 윗사람이 위엄으로 자신을 억누르게 하지 않는다면 처세를 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 등 철학적인 섭리에 관한 내용
“드러나게 죄를 지으면 남의 책망이 미치고, 은밀하게 죄를 지으면 귀신의 주벌이 이른다. 이 두 가지 죄를 함께 지으면 하늘의 재앙이 내린다.”
정치 세태나 인물에 관한 내용
“문벌로 등용되는 일이 많아지자 자손들의 공손한 기풍이 끊어졌고, 당파간의 다툼이 혹심해지자 겸양의 풍속이 사라졌다. 윗사람은 예의를 범하고 아랫사람은 포악해서 천재(天災)와 인화(人禍)가 함께 생겨났다.”
학문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
“학문이 실용에 맞지 않으면 그런 학문은 하지 않는 것이 낫고, 문장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없으면 그런 문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질언에도 원문의 위쪽 여백, 항목의 말미, 또는 행간(行間)에 짧은 평어가 있는데 췌언보다는 많지 않다. 평어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전적으로 동감을 나타내는 유형이다.
“분수대로 운명에 맡기면 만사가 제대로 되고, 권세를 탐하여 영달을 좇으면 온갖 죄가 생겨난다.”
라는 내용 말미에,
“백 번 절할 만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릴 만한 글이다.”
라고 짧게 평하여 동감을 표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독자들에게 행간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간접 조언을 하는 유형이다.
“처신(處身)하는 것은 청탁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빈부의 중간으로 해야 하며, 벼슬살이하는 것은 진퇴의 중간에 있어야 하고, 남과 사귀는 것은 깊고 얕음의 중간으로 해야 한다.”
는 내용에 대하여
“세상을 조롱하는 공손하지 않은 뜻이 담겨 있으니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알 것이다.”
라고 평하여 당시 세태를 풍자하는 저자의 진의를 새겨서 이해할 것을 독자에게 당부하고 있다.
성언(醒言)
제1책에 123항목, 제2책에 225항목, 제3책에 63항목 등 총 411항목으로 이 책에서 제일 많은 양을 차지한다. 역시 제목은 없고 행을 바꾸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본 국역서에서는 내용을 요약하여 전달하고자 나름대로 편마다 제목을 붙였다. 내용은 주로 당시 여항의 설화, 자신의 체험담이나 목격담, 인물평,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화, 시(詩)에 얽인 일화, 처세담, 각종 제도ㆍ조치 등에 따른 폐해 비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내용마다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특히 인간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도 반드시 원인에 따른 응보가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많다. 따라서 ‘성언(醒言)’의 의미는 ‘깨우치는 말’이라고 이해된다.
인용하고 있는 자료를 기준으로 분류해 보면, 크게는 중국 사료와 한국 사료로 구분되는데 중국 사료를 중심으로 구성된 항목이 116항목(28%), 한국 사료로 구성된 것이 296항목(72%)으로 우리나라의 사료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다시 내용별로 분류해 보면, 짧은 격언류가 115항목(28%)으로 제일 많고, 다음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얽힌 일화ㆍ비화를 소개하는 내용이 111항목(27%)이고, 다음은 기생이나 노비ㆍ걸인 등 기층민에 대한 일화 등을 소개한 내용이 58항목(14%), 인과응보 또는 관상ㆍ점ㆍ운명에 관한 내용이 57항목(14%)이며, 우리나라의 여러 제도에 관한 변천 유래를 소개한 것이 23항목(5.6%), 영조ㆍ정조에 관한 일화가 14항목, 시문ㆍ명필에 관한 일화가 13항목, 본인의 체험담 등이 11항목이고, 귀신 등에 관한 일화 등이 9항목이다.
이들을 유형별로 한 항목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격언류를 보면, 대부분 짧게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고금의 역사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아래 예에서 보듯이 청성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처세 철학인 경우가 많다.
“어리석으면서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집안을 망치고, 총명하면서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몸을 망친다.”
다음은 역사적인 사건의 비화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나 우리나라 역사의 비화나 일화로 구성되어 있어서 독자들이 역사의 새로운 일면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때의 다음 일화 같은 경우이다.
“권정길(權井吉)은 신분이 미천한 자인데 용감하기로 이름이 났다. 병자호란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춘천 방어사로 있던 권정길은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위해 달려왔다. 그는 검단산(黔丹山)에 이르러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멀리서 포위된 남한산성과 호응하였다. 성에서 그를 불러 함께 수비하자고 하자, 진군의 북을 울리며 곧바로 전진하여 적진을 옆에 두고 지나갔다. 적장(敵將)이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공격할 것을 청하자, 칸이 그를 저지하며 ‘병력이 적은데도 사기가 대단하니, 그 장수가 틀림없이 용맹할 것이다. 저들을 섬멸한다 하여도 무공(武功)이랄 것이 없고 공연히 우리의 예기(銳氣)만 손상되니, 차라리 그들을 성에 들어가도록 놔두어 군량을 축내도록 하는 편이 낫다.’ 하였다. 권정길은 결국 병력 손실 없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용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리학의 병폐를 은근히 지적하는 내용을 보면 저자의 학문에 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들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출신인 서얼에 관한 내용도 많이 보인다. 서얼이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던 유래나 세간의 여론 및 서얼이 처신하기 어려운 세태 등을 언급한 내용들이 그렇다. 이 글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은 서얼의 시각이 얼비쳐져 있다.
“나라에서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태종(太宗) 을미년(1415,태종15)부터 시작되었는데, 실은 미천한 서얼 출신인 정도전(鄭道傳) 때문이었지만 정도전의 손자인 문형(文炯)은 그래도 판중추사(判中樞事)를 지냈다. 관습이 점차 고질이 되어 인조(仁祖) 즉위 초에 처음으로 병조와 형조, 공조에 한하여 허통(許通)을 허락하였으나 역시 이를 적용받은 서얼은 얼마 없었고, 영조(英祖) 임진년에 처음으로 서얼도 청직(淸職)에 진출할 수 있게 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아 시행한 지 5년 만에 다시 막히게 되었다. 또 금상(今上)께서는 이를 절목(節目)으로 정하여 반포하셨으나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에서 여전히 묻어 두고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대해 허통을 주창한 것이 세 번이니, 인조의 성지(聖旨)이자 선왕인 영조의 방침이며 금상의 왕명이다. 이에 반해 이를 막는 것은 그저 세속의 의논일 뿐인데도 이를 저지하니, 장자(莊子)가 한 ‘풍속이 임금보다 무섭다.’는 말이 맞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특수한 제도의 유래나 풍습의 유래에 대한 기록도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투전놀이가 전해지게 된 유래, 명나라 태조가 대신에게 하사했던 옥대를 명나라가 망한 뒤에 우리나라 사신이 구입해 와서 왕이 황단(皇壇)에 망배(望拜)할 때 착용하게 된 유래, 우리나라 온돌 설치의 유래, 말 발에 무쇠로 굽을 하게 된 유래 등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다음은 벽돌로 쌓은 구성(龜城)의 유래에 관한 자료이다.
“구성(龜城)은 옛날에는 여진(女眞)의 땅이었는데, 고려의 서희(徐熙)가 처음 여진을 몰아내고 그곳에 성을 쌓았다.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그곳을 지키면서 요(遼)나라에 저항하였는데 참으로 천험의 요새이다. 숙종조에 부사(府使) 권순(權詢)이 성곽을 개축하였다. 읍내 북쪽에 벽평(甓坪)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여진이 벽돌을 묻어 놓은 곳이라고 전해져 왔다. 권순은 본래 재간이 뛰어났는데, 한 길 남짓한 철봉을 주조하여 그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 가지고는 그 들판에 나가 여기저기 깊숙이 쑤시고 다니다가 걸려서 들어가지 않는 곳을 파 보면 모두 벽돌이었다. 그 벽돌을 이용해 성을 쌓고 홍예문(虹霓門)과 섬돌, 도로와 담장에도 모두 그 벽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구성의 성곽 전체는 돌보다 벽돌이 많다.”
인과응보에 관한 일화나 점과 관상, 운명, 좌우명에 대한 기록도 많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청성 자신에 관계되는 내용이다.
“봉산(鳳山)의 소경 유운태(劉雲泰)가 나의 운명을 점치고는 말하였다. ‘운수가 좋습니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얼굴이요, 비단같이 고운 마음씨이니 관직 생활 할 적에 사람을 많이 살릴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늘 사람 살리기를 내 일로 삼았는지라 살인 옥사(獄事)가 내 덕에 다시 조사되어 억울한 누명이 밝혀진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희천(熙川)에서 죄수 두 명을 죽였고 경주(慶州)에서도 그러하였으니, 모두 삼성추국(三省推鞫)을 당할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자들이었다. 법으로는 용서 없이 사형시킬 죄이지만 막상 처벌할 때에는 소경 유운태가 한 말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청성 자신의 관상에 대하여 영조로부터 평가받은 일화도 재미있다. 이는 청성의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좋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군주로부터 받은 이런 평가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타고난 관상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더 무게를 두어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자 한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황송하게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한번은 임헌(臨軒)하여 연신(筵臣)들에게 말하였다. ‘성(成) 아무개의 얼굴은 하관(下觀)이 풍만한 것이 강자아(姜子牙 강 태공(姜太公) )의 모습과 닮았다.’ 당시 내 나이 아직 서른이 못 되었기에 혼자 남몰래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성주(聖主)를 만났는데 어찌 여든이 되어서야 문왕(文王)을 만난 자와 비교한단 말인가. 성왕(聖王)의 말도 때로는 틀릴 때가 있나 보다.’
지금 내 나이 예순이 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에야 비로소 금상(今上 정조 )에게 세상에 흔치 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옛날 문장에 재주 있는 신하로 한나라의 두 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ㆍ사마상여(司馬相如) ) 이래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나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대왕이 나를 강자아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오늘을 예견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감개무량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삼가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풍만하고 수척한 것은 오로지 양생에 달려 있으니 단지 골격만이 부귀로 인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치게 수척해서 사람들이 모두 요절할 것이라고 여겨 장가도 들지 못할 뻔했는데, 가정에서 교도하여 보양을 적절하게 한 덕분에 스물이 넘어서는 혈기가 충만하고 얼굴이 풍만해서 도리어 관상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살펴본 자들이 대부분 나를 두고 풍채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허연 수염에 홍안이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섭생(攝生)조차도 이러고저러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무슨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줄였을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술, 여색, 재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거의 실천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내 자신을 양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섭생은 오히려 정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자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금상이 또 나의 얼굴을 가지고 경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여 못난 나의 관상이 재차 성왕(聖王)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평생에 잊지 못할 은총이 아니겠는가. 이것 또한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여항의 일화 중에는 도둑이나 걸인, 노비, 기녀, 승려 등 특수 신분인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와 충신, 효자, 열녀들의 애절한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당시에 생활하였던 사람들로서 실명이 기록되고 있어 당시 기층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남원 열녀의 애절한 사연을 보자.
“남원에 사는 상번군(上番軍) 황곡수(黃曲壽)의 아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에 복무하러 간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 통곡하고는 시부모에게 음식을 권하는 등 그 모습이 그다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손수 대나무 발을 엮어 끌고서 남자 복장으로 상경하여 남편의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집에 빈소를 차렸다. 그런 뒤 몸을 깨끗이 씻고 밤에 빈소에서 잠을 잤는데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아 문을 열어 보니 남편 시체를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다. 남편의 배가 그녀의 배에 붙어 있었는데 언 배와 따뜻한 배가 맞닿으면 따뜻한 배 쪽으로 반드시 쑥 들어간다. 마침내 둘을 떼어낼 수가 없어서 시체를 함께 묶어 장사 지냈다. 열녀로구나!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이다.”
영조와 정조에 얽힌 일화, 비화도 여러 편 보이는데, 특히 영조가 단행한 개혁 정치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해 볼 만한 내용으로, 영조의 개혁 정치의 성격과 그것을 바라보는 청성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영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52년 동안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중에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고치지 못한 고질적인 폐단을 모두 혁파한 일도 포함된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들을 기록해 본다.
전가사변율(全家徙邊律)은 세종이 변방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변방의 인구가 이미 충분한데도 이주는 여전히 중단되지 않았고 변방을 어지럽혔던 오랑캐는 평정되었지만 그 폐단은 심한 고질이 되어 도망하는 자가 끊임없이 나와 도리어 변방 고을에 폐해를 끼쳤는데, 영조 갑자년(1744)에 폐지하였다.
압슬형(壓膝刑)과 낙형(烙刑)은 세조가 사육신의 옥사를 다스릴 때 시작되어 박정재(朴定齋)가 형벌을 받을 때에 이르러 그 참혹함이 극에 달했는데, 영조 갑진년(1724)에 압슬형을 폐지하고 계축년(1733)에 낙형을 폐지하였다.
양산종부율(良産從父律)은 어느 임금 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 나라의 양민들이 거의 모두 사노비가 될 지경이었다. 현종 기유년(1669)에 처음 양인 어미 소생은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했다가 숙종 을묘년(1675)에 환천(還賤)시켰고, 신유년(1681)에 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했다가 기사년(1689)에 환천시켰는데, 영조 경술년(1730)에 신해년(1731) 이후 태어난 자들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양인 어미 소생이 노비가 되는 폐단이 비로소 혁파되었다.
도둑을 다스리는 형률은 초범(初犯)은 팔뚝에 자자형(刺字刑)을 가하고 재범(再犯)은 얼굴에 자자형을 가하고 삼범(三犯)인 경우에는 처형했는데, 영조가 모두 폐지하였다. 난장률(亂杖律)은 김자점(金自點)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영조 경인년(1770)에 폐지하였고,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역시 폐지하였다. 죄인에게 차꼬나 수갑을 채울 때는 두 손을 모두 채웠는데, 영조가 죄인의 왼손을 풀어 주도록 명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 하였다.”
일본에 관계된 내용도 흥미롭다. 자신이 일본 사신 일행으로 동행하였을 때의 내용이나, 일본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사당에 우리나라 임금의 어필이 걸리게 된 일화도 흥미롭다.
“역대 임금의 글씨 중에 ‘영산법계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이란 여덟 글자의 큰 글씨가 있는데 효종대왕의 글씨이다. 일본의 원가강(源家康 덕천가강 )이 평씨(平氏 풍신수길(豐臣秀吉)의 일족 )를 몰살하고 관백(關白)이 되니, 우리나라 임진년의 원수가 그로 인해 갚아진 셈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여 다시 화친하게 되었다. 원가강은 일광산(日光山)에 안장되어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에는 제사까지 아울러 지내기 위해 소를 싣고 갔는데 백정이 동행하였다. 그 후 제사는 중단되었지만 백정이 동행하는 것은 폐지되지 않으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죄인을 참수할 때를 대비한 것이라고 여겼다. 일광산에 원가강의 원당(願堂)을 창건하여 ‘동조원(東照院)’이라 이름하고는 우리 임금의 친필을 편액으로 걸어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요청하자, 효종이 위의 여덟 글자를 지어서 사관(寫官)에게 여러 차례 쓰게 하였는데 끝내 마음에 들지 않자 친히 써서 보냈다. 그중에 한 부는 청평도위(靑平都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평민 김기서(金箕書)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김기서는 바로 심익현의 외손이다.”
이는 효종 6년(1655)에 효종이 어필을 하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이보다 앞서 인조 때의 문신 학자 이명한(李明漢:1595~1645)의 《백주집(白洲集)》 권16 ‘어서일광산첩발(御書日光山帖跋)’에 의하면 인조 때에 어필을 하사해 주기를 간청하여 ‘일광정계창효도량(日光淨界彰孝道場)’이라고 흰 비단에 써서 하사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름을 달리하여 효종에게 다시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성언에서도 약간의 두주 형식의 평과 문장 중간 중간에 비점이나 관주를 치고 기입한 평어가 있다. 다만 췌언이나 질언보다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제2책부터는 없다. 아마 평자가 제1책까지만 본 것이라 추정된다.
평어는 역시 앞 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편의 의미를 요약하거나 저자의 의도와 필력의 뛰어남을 칭탄하거나 또는 저자가 숨겨 놓은 의미를 드러내어 당시 세태를 풍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강계 지방의 은광 주변에서 은을 훔쳐다 팔아서 먹고사는 무뢰배의 비열한 행태와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사통시켜 먹고사는 타락한 사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손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어 한번 웃을 거리로 삼으려고 기록하였다.”고 한 내용의 말미에,
“추태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였고, 필력(筆力)도 웅장하다. 아, 내가 살펴보건대 대체로 의복과 두건을 잘 차리고 점잖은 걸음걸이에 말을 유창하게 하는 양반들이 어쩌면 광산 입구를 기웃거리는 무뢰배들의 변신인지 모르겠다.”
라고 하여 당시의 타락한 양반들을 풍자함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더 보완ㆍ부각하고 있다. 반면에 많지는 않지만, 저자가 착오로 잘못 기록한 내용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평이 아닌 주석 형식의 글을 붙이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나라 계찰(季札)에 대하여 “부자(夫子공자)도 일찍이 그가 예(禮)에 익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장례에 가서 보고 직접 비문을 썼다.”는 내용 아래에 “부자는 오나라에 간 적이 없다.”라고 기록한 경우이다.
4. 맺음말
‘잡기(雜記)’라는 말은 내용의 유를 구분하지 않고 이런저런 내용을 함께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청성이 기록한 내용임에도 《청성집》에는 4편만이 실리고 나머지는 필사본 자체로 유전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한 순서대로 저자의 의도를 다시 살펴보자면, 먼저 역사의 일단이나 인물의 장단ㆍ득실을 헤아려 보는 ‘췌언(揣言)’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저자가 체험하고 얻은 여러 경우의 진리를 헤아려 질정해 보는 ‘질언(質言)’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으로 이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하고자 하는 글들로 ‘성언(醒言)’을 저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이 《청성잡기》가 국역되어 간행됨으로써 예민한 시대 감수성을 지닌 문인의 붓을 통해 변화해 가는 18세기 학문과 문학 경향의 단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진한인포(秦漢仁暴)라는 짧은 논을 통해 청성은 기존 학자들이 신랄하게 비판해 마지않았던 진시황의 과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뒤집어 읽기에 대한 시도는 식자의 현학 취미가 아니라 조선 후기 학자들의 변화해 가는 역사 인식의 징후로 읽어야 한다. 이것이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날카로운 직관과 처세에 대한 격언, 실용주의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도 우리는 당대를 고민하고 대응하는 엄정한 인문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청성이 순정한 문체로 이름이 높았음은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한 바 있거니와, 《청성잡기》 가운데는 이 외에도 청언소품체에 해당하는 문장들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와 함께 일상에서 만나는 관습과 풍속, 그리고 사소한 역사 유물 등 자질구레한 문제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느끼며 그 유래를 하나하나 밝혀 들어 놓았는데, 이런 기록들은 자료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일상의 주변에 자리하는 모든 것에 애정의 시선으로 다가간 청성의 눈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부여해 볼 수 있다. 이런 특징 역시 당대 문인들의 한 경향으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청성잡기》에 비평을 했던 청성의 절친한 벗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나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 등을 비롯해 당대 몇몇 작가의 저작들에서 이런 경향의 기록들이 나타난다. 인식의 변화에 따라 글쓰기의 소재와 관심 대상이 얼마간 변모한 것이다.
사실적 묘사와 뛰어난 인물 형상화도 《청성잡기》가 이룬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강계(江界) 지방의 은광(銀鑛) 주변에 기생하는 무뢰배들을 묘사한 글 아래에 있는 이덕무의 비평을 상기해 보자. 그렇다면 청성의 묘사와 인물 형상화가 얼마나 탁월한 솜씨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외에도 충신과 열녀, 영조의 정치 개혁, 일본에 대한 청성의 시각이 잡기 속에 가감 없이 소개되어 있다. 청성의 면모를 진솔하게 대할 수 있는 《청성잡기》를 국역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와 흥미로운 작품을 소개하는 동시에, 청성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본 국역서가 18세기 문인들의 문학 활동과 사고 경향에 대한 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며 이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후속 성과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秦漢仁暴
論秦漢之善敗者,皆曰政暴而邦仁,三章之法,固仁於秦矣。然不知高祖之暴甚於政也,何者。夫政之以暴名者,以滅六國而坑諸儒也。然六國之滅,天實滅之也。六國不滅,生民之塗炭,無時息也。不然,秦雖强,安得比而滅之哉。坑儒,政固虐也。然戰國之士,游談以招權,權重於人主,禍已伺其後矣。天下一矣,而猶其習之不戢,掉舌於猛虎之側,能無及乎。
政惟結怨於儒,故操筆者,加之以呂氏之誣,而不能免焉,可畏也哉。夫十月而生,人之常也,賢聖皆然,政獨何人哉。書之以大期,而曰實呂氏,非誣乎哉。吾故曰,儒之報秦,毒於政也。焚書築城,功罪互見。載道之書如日月,豈秦火之能焚哉。若百家衆技惑世誣民之言,燼之可也。使五車無稽之書,盡傳於世,世道之禍,豈容言哉。幸而秦火之也。隋文帝盡燬讖緯[chènwěi]之書,讖學遂絶,秦之功,亦猶是也。長城則一時之怨,萬世之利也。秦實上策,而反爲罪首。然則燕之長城,曷不爲燕罪乎。是以君子惡居下流也。其法之嚴,鞅之餘也,非始皇之所獨創也。且其待功臣則寬,王翦蒙武,並恩及後孫,世執兵權,李信輕敵覆師,而不之誅,孰謂秦任法哉。高祖則銘鼎彝,裂茅土,丹書鐵券,申之以山河之誓,盟血未乾,而韓信擒,盧綰逃,黥布叛,其祟不過疑爾,信誓之意安在。彭越之誅,帝知其無罪矣。然必梟夷之,葅醢之,禽獸不忍也,仁人固若是乎。樊噲從帝起布衣,親則友婿,功則社稷臣也。鴻門之難,賴噲以免,而天下旣定,擁戚姬,高枕而臥,遽信讒而誅之,幸噲在外,平勃免之耳。始皇雖暴,不爲此也。且開國用人之法,至高祖而大壞。古之取士,非學問則閥閱也,至秦亦然。高祖實巿肆之雄也,所與游者,刀筆販屠無賴之群,而遂以之擧事,財利則勇,爵賞則奮,輕身趨利,惟敵是求,高祖之興,實此輩之功也。旣以是得之,不得不用之。故西京大臣,皆材官蹶張之屬,而經術廉節之士,恥爲之下。故四皓逃避,二生不至,文帝獨一賈生耳,終亦疏之,由高帝立國之卑也。項籍之臣,皆楚之世族名士也而敗,椎鹵者,安得不張氣哉。
袁曹之成敗亦然,從操者,多群盜桀暴之士,從紹者,多廉介自重之士,圖天下者,肯法其敗者耶。於是,尙力崇能之風盛,而學術者匿,貪賞輕進之習售,而廉謹者退。五伯之先詐力,嬴氏之上首功,猶爲近古之政,而天下幾何不爲盜賊之有也。故始皇之虐,止於其時,漢高之弊,及於後世。秦固失之暴也,漢之爲仁,吾未之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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