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금요일

《以詩存史:清詩總集編纂理念》

 http://www.cssn.cn/sf/bwsf_wh/201701/t20170116_3385861_1.shtml
以人存诗,以诗存人作为一个明确的以诗存史的思维理念,是清诗总集、特别是地方清诗总集编纂者的普遍共识。地方诗歌总集以人存诗,以诗存人可以被视作是史官文化逐渐扩散的体现。


  史官文化在清代接受的新变
 

  历朝历代无不重视史书的编撰,以史为鉴的观念贯穿时代的更替发展进程,史官文化也具有严密的继承与延续,但是进入明清尤其是清代,对史官文化的接受则出现有别于其他时代不同的新变。这种史官文化接受的新变,从整体上看,是清代各方面研究倾向于总结整理使然。
  一是考据学风盛行,清代学者稽考史籍,发前人之谬,如王鸣盛《十七史商榷》、赵翼《廿二史札记》、钱大昕《廿二史考异》等,以至私修史书,如钱大昕通过考证二十二史之误,对官修史书多有不满,乃自撰《元史氏族志》《元史艺文志》。并且,大批学者曾经在史馆参与编修各级史志,在史馆内外的流动中,又能够带动周围的文人活动,史官文化得以进一步交流与传播。
  二是地方私修志书的盛行,与严格官定体例的官修史志不同,地方私人修志体例多元自由。清代后期,政府直接鼓励地方自编乡土志,光绪三十一年(1905)颁布《乡土志例目》。诚然,乡土志并非完全意义上的地方史志,而是作为地方乡土教学的教材,但就二者关系看,乡土志与地方志书明显存在延续继承的关系,官方鼓励地方自修乡土志的行为实际上直接体现了史官文化向地方的扩散。
  三是清人对家族谱志颇为重视。清人重视宗谱的编修,将家谱、方志、国史三者视为统一的历史记忆载体。受传统伦理和宗法思想巩固影响,清人视宗谱为家史,以宗谱明确世系变迁。《礼村戴氏统宗谱》称家之有宗谱犹朝廷之有信史,而不少因宗谱而撰的家集也有了史志文献的意义。无论是家集还是方志,都具有鲜明的的倾向,前者有家族文学史的意味,后者则直接即为地方史志,而由国史到方志家谱,由上至下的指向也恰是史官文化在清代接受的体现。


  史官文化与清诗叙事特征的一致性 

  我们不能不注意到先秦以《诗经》为代表的以诗纪事之意义,钱谦益即认为:人知夫子之删诗,不知其为定史,人知夫子之作春秋,不知其为续诗。……史自史,诗自诗,而诗之义不能不本于史。(钱谦益《牧斋有学集·中》,上海古籍出版社1996年版)其编《列朝诗集》也秉持诗史并重的态度。章太炎认为:诗之称,纪事之谓,亦犹后世称杜工部诗曰诗史。故《大雅》、《小雅》无非纪事之诗。(章太炎《国学述闻》,北京联合出版公司2013年版)以诗纪事,以诗存史的脉络贯穿整个中国诗歌发展进程。
  时至明清,这一观点在不断实践中得到发扬,特别是清代,注重叙事成为构建清诗地位与价值的重要支撑点,特别是在目睹旱涝虫疫、兵火流离时,在面对波谲云诡的变幻局势时,中下层文人的史笔意识更为高涨,他们在包括诗歌在内的各类文学作品中秉笔直书,以切峻而悯恻的笔触记录地方史实。这一点又与清人诗歌注重叙事的特点结合起来,成为清诗的独特姿态。
  钱仲联认定:叙事性是清诗的一大特色,也是所谓超元越明,上追唐宋的关键所在。(钱仲联《清诗纪事》,凤凰出版社2004年版)当我们回望整个文学发展史,清诗以诗纪事,以诗存史,恰与先秦时代诗歌纪事性相望相接。清诗的叙事特性,很大程度上体现在中下层诗人所创作的诗歌中,其实也能够说明清诗受史官文化与史笔意识逐渐由庙堂向草野接受影响,这种接受也可以看作是一种下行的扩散。

  
以人存诗,以诗存人与史官文化的结合 
  清诗总集常常有以人存诗,以诗存人之谓,如《姥山诗蒐》称元遗山撰《中州集》,遂创以人存诗,以诗存人之例。(倪劢《姥山诗蒐》,道光七年刻本)《新安先集》称:是集所刻者,悉遵原定,而归并其卷目。……各按选本授梓,此外或止一二残篇,各依世次刊附,乃援以诗存人之例。(朱之榛《新安先集》,同治十二年刻本)这种以人排序选诗,各人诗前列以小传或诗话,借以保存诗歌文本与文献史料的以人存诗,以诗存人之法,是地方清诗总集所具备的普遍性规律之一。
  而在文网渐密,或者编纂者有意以诗存史之时,诗歌总集便扮演了类似史志的角色。邓显鹤在《沅湘耆旧集》即认识到:若元遗山《中州集》合文献为一书,遂为一代史宬之本,盖著述家采拾搜讨,有功国史,关系之重如此。……集名耆旧,文献所系,以诗存人,亦以人存诗,用备一方掌故。(邓显鹤《沅湘耆旧集》,《续修四库全书》第1690册,上海古籍出版社2013年版)而且在计有功《唐诗纪事》问世数百年后,清人接连编纂《宋诗纪事》《金诗纪事》《元诗纪事》《明诗纪事》一系列纪事体诗歌总集,可视作史官文化逐渐由宫廷馆阁向地方乡镇的接受,以及清代文人史笔意识的逐渐自觉与增长。
  史,事者也,中。中,正也。许慎文解字》,中华书1963年版)一意味着以主要功能的史官文化,二意味着公允正直的史。史官文化代表出更的接受态势于地方集而言,方志无疑更具备记一代一地之事的意。不,在里却又常常可以于与纪事二者中求平衡,到一方面以诗纪事存史,可以一定程度上扮演地方史志的角色;另一方面能于一般史,有于官方口,又保存歌特有的旨趣,情感注其中的意。而史志于集,也就使得史官文化在以人存,以存人的价取向与编律中得到呈。不过应当明确的是,诗与史,虽渊源有相通之,但是二者气质毕竟不同,就集而言,史官文化的接受的自觉还都是建立在歌基之上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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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南小山의 《招隱士》

桂樹叢生兮山之幽,偃謇yǎn jiǎn連卷兮枝相繚liáo。
山氣隴嵷兮石嵯峨,谿谷嶄[zhǎn]巖兮水曾波。
蝯狖 yuán yòu 원숭이群嘯兮虎豹嗥,攀援桂枝兮聊淹留。
王孫遊兮不歸,春草生兮萋萋。
歲暮兮不自聊,蟪蛄鳴兮啾啾。
坱兮軋,山曲岪,心淹留兮恫荒忽。
罔兮沕,憭兮慄,
虎豹岤,叢薄深林兮人上慄。
嶔崟碕礒兮硱磈磳硊。
樹輪相糾兮林木茇骫。
青莎雜樹兮薠草靃靡。
白鹿麕麚兮或騰或倚。
狀貌崟崟兮峨峨,淒淒兮漇漇。
獮猴兮熊羆,慕類兮以悲。
攀援桂枝兮聊淹留,虎豹鬥兮熊羆咆,禽獸駭兮亡其曹。
王孫兮歸來,山中兮不可以久留。

▷蝯狖 yuán yòu :원숭이
▷蟪蛄huì gū:《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하루살이는 초하루와 그믐을 알지 못하고, 가을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라는 내용이 있다.
▷坱然:橫渠先生曰 氣坱然太虛하야 升降飛揚하야 未嘗止息하나니 此虛實動靜之機요 陰陽剛柔之始라《근사록집해》)
▷坱軋:광활하여 끝없다는 뜻으로, 가의(賈誼)가 〈복조부(鵩鳥賦)〉에서 자연의 끝없는 조화를 표현하여 “대자연이 만물을 운행함이여, 끝없이 광활하도다.〔大專槃物兮 坱軋無垠〕”라고 한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岪:산길 불
▷嶔崟qīn yín:험준한 모양
▷碕礒qí yǐ:돌이 많고 굽은 모양
▷硱磈kǔn wěi:高耸险峻
▷茇骫wěi:굽고 구불거리는 모양
▷靃靡:풀이 바람에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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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浣紗記-寄子

https://www.youtube.com/watch?v=yFIrngPXRas

오자서는 오나라의 앞날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는데, 그와 사이가 나쁜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이 일을 내세워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屬鏤)라는 명검을 내려 자결하도록 명하였다. 오자서는 한탄하며 문객(門客)에게 자신이 죽으면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눈알을 도려내서 동문(東門) 위에 걸어달라고 당부하고는 자결하였다. 부차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말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강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胥山)이라고 명명하였다. 9년 후,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패망하였으며,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오자서전(伍子胥傳)〉에서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 당(唐)나라 때에는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여러 고사성어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장쑤성 쑤저우에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려 세운 사당 우샹츠[伍相祠]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자서 [伍子胥] (두산백과)


浣紗記-寄子 대목은 오자서가 그의 아들을 제나라 대부 飽牧에게 부탁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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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班固의 兩都賦序


或曰:賦者,古詩之流也。昔成康沒而頌聲寢,王澤竭而詩不作。大漢初定,日不暇給。至於武宣之世,乃崇禮官,考文章,內設金馬、石渠之署,外興樂府、協律之事,以興廢繼絕,潤色鴻業。是以眾庶悅豫,福應尤盛,白麟、赤鴈、芝房、寶鼎之歌,薦於郊廟。神雀、五鳳、甘露、黃龍之瑞,以為年紀。故言語侍從之臣,若司馬相如、虞丘壽王、東方朔、枚皋、王褒、劉向之屬,朝夕論思,日月獻納;而公卿大臣,御史大夫倪寬、太常孔臧、太中大夫董仲舒、宗正劉德、太子太傅蕭望之等,時時間作。或以抒下情而通諷諭,或以宣上德而盡忠孝,雍容揄揚,著於後嗣,抑亦雅頌之亞也。故孝成之世,論而錄之,蓋奏御者千有餘篇,而後大漢之文章,炳焉與三代同風。(부를 아송의 계통 속에서 인식) 

且夫道有夷隆,學有麤密,因時而建德者,不以遠近易則。故皋陶歌虞,奚斯頌魯,同見采於孔氏,列于詩書,其義一也。稽之上古則如彼,考之漢室又如此。斯事雖細,然先臣之舊式,國家之遺美,不可闕也。臣竊見海內清平,朝廷無事,京師脩宮室,浚城隍,起苑囿,以備制度。西土耆老,咸懷怨思,冀上之睠顧,而盛稱長安舊制,有陋雒邑之議。故臣作兩都賦,以極眾人之所眩曜,折以今之法度。其詞曰:

△悅豫:기뻐하다 
△오구수왕(吾丘壽王) : 한 무제 때 보정(寶鼎)이 발견되자 뭇 신하들이 주대(周代)의 보정을 얻게 되었다면서 축하를 하였는데, 오구수왕이 유독 이의를 제기하면서 “하늘이 주(周) 나라의 덕에 응하여 내주었기 때문에 주정(周鼎)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니, …… 일단 지금 나온 이상에는 한(漢)의 보정이라고 해야지 주(周)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제로부터 상을 받은 고사가 있다. 《漢書 吾丘壽王傳》 
△夷隆:쇠미와 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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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誼의 吊屈原賦


誼為長沙王太傅,既以謫去,意不自得;及渡湘水,為賦以弔屈原。屈原,楚賢臣也。被讒放逐,作《離騷》賦。其終篇曰:「已矣哉國!無人兮,莫我知也。」遂自投汨羅mìluó而死。誼追傷之,因自喻。其辭曰: 
恭承嘉惠兮,俟罪長沙;側聞屈原兮,自沈汨羅。造託湘流兮,敬弔先生;遭世罔極兮,乃隕厥身。嗚呼哀哉!逢時不祥。鸞鳯伏竄兮,鴟梟翺翔。闒茸尊顯兮,讒諛得志;聖賢逆曵兮,方正倒植。世謂夷(변수와 백이)為溷兮,謂跖、蹻(도척과 장교)為廉;莫邪為鈍兮,鉛刀為銛。吁嗟黙黙,生之無故兮;斡棄周鼎,寳康瓠兮。騰駕罢牛,驂蹇驢兮;驥垂兩耳,服鹽車兮。章甫薦履,漸不可久兮;嗟苦先生,獨離此咎兮。 
訊曰:已矣!國其莫我知兮,獨壹鬱其誰語?鳯漂漂其高逝兮,固自引而遠去。襲九淵之神龍兮,沕深潛以自珍;偭蟂獺以隱處兮,夫豈從蝦與蛭螾?所貴聖人之神德兮,遠濁世而自藏;使騏驥可得係而羈兮,豈云異夫犬羊?般紛紛其離此尤兮,亦夫子之故也。歷九州而相其君兮,何必懷此都也?鳯皇翔於千仞兮,覽德輝而下;之見細德之險徵兮,遙曾擊而去之。彼尋常之汙瀆兮,豈能容夫吞舟之巨魚?橫江湖之鱣鯨兮,固將制於螻蟻。

△罔極 :混亂無常 
△伏竄:도망가 숨다 
△鴟梟chī xiāo:맹금 
△闒茸(탑용):용렬하고 둔하며 어리석음. 
△逆曵nì yè:질질 끌다, 비정상적으로 걷다 
△변수(卞隨) : 하(夏) 나라 때의 고사(高士).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속(離俗)에 “탕(湯)이 마침내 이윤(伊尹)과 함께 걸(桀)을 쳐서 이기고 천하를 변수(卞隨)에게 사양하니, 변수는 굳이 마다하고 스스로 영수(潁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하였다.
△도척(盜跖)ㆍ장교(莊蹻) : 악한(惡漢)들. 도척은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 또는 황제(黃帝) 시대의 사람이니, 진대(秦代)의 사람이니 하는 설도 있다. 포악하여 날마다 죄도 없는 사람 죽이기를 일삼고,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천하를 횡행했다. 《史記 卷61》 장교는 전국 시대 초 장왕(楚莊王)의 후예. 《사기색은(史記索隱)》 주(註)에 초 장왕의 아우로 도둑이 된 자라고 했다. 
△銛[xiān]:날카로울 섬 
△罢 :고달플 피, 마칠 파 
△章甫: 장보(章甫)는 은(殷) 나라 때의 관(冠) 이름인데, 공자가 항상 이 관을 썼으므로, 전하여 유자(儒者)의 뜻으로 쓰인다. 
△沕 :잠길 밀 
△偭miǎn:향할 면, 등지다.
△騏驥 :①몹시 빨리 달리는 말  ②현인(賢人)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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