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절강대학의 동평(董平)교수가 9회 분량으로 강의한 왕양명심학을 보고 간단히 적는다. 영상출처 http://open.163.com/movie/2011/10/6/U/M7GF17HPS_M7J1IBS6U.html
子曰蓋有不知而作之者는 我無是也로라
子曰蓋有不知而作之者는 我無是也로라
一念发动处,便即是行了
의식의 흐름 속에 이미 행동, 의식 속에 행동이 있다.
양지의 자각과 양지의 표출
圣人之道吾性具足
知之真切笃实处即是行 行之明觉精察处即是知
➤知行合一문제
앎의 최고실현은 이론이 아닌 생활 속에서의 실천의 문제다.
양명의 주장에 따르면, 지와 행의 본체는 본래 합일적 관계로 그의 真知即是行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그와 달리 주희는 真知必能行이라는 말로 앎과 실천의 문제를 이해했는데, 진정한 앎은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 속에는 지와 행의 선후문제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양명에게는 그러한 전제적 조건으로서의 앎은 사라지고, 지와 행이 본래 같은 위상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할 뿐이다.
➤格物致知문제
격물치지는 송명이학의 발전과정 속에서 도출됐는데, 이학은 우선 선진유학으로의 회귀라는 타이틀을 걸고 소대례기에서 중용과 대학을 따로 뽑아 논어 맹자와 함께 4서의 체계를 확립한다. 격물치지는 그 중 대학에 있는 개념인데, 개별적 존재에서부터 시작하여 평천하의 천하적 존재를 잇는 한 연결고리다. 문제는 격물이라는 것이 결국 대학이라는 체계에 있어 시작이라는데 있다. 즉 우리가 평천하라는 거시적 문제를 해결할 바탕이 격물, 즉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것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이정이나 주자가 바라본 격물은 결국 물 자체에 내재한 이의 문제에 천착하고 연구함을 역설했다. 그런데, 양명은 물자체 속의 이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궁리의 근거가 사물 자체에 달려있다면, 이후의 성의와 정심의 문제는 이런 개별 사물의 궁리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격은 至가 아니라, 正이라 해석하면서, 주자적 해석체계를 탈피하며 致知또한 양명에 의해致良知로 재해석된다.
➤良知문제
양명은 朱宸濠之謀反事件을 평정한 이후에 양지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기본 골자는 龍場悟道시기에 이미 확립됐다고 볼 수 있다. 양지에 대한 설은 이미 맹자에게서 보인다. 孟子的良知:배우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 양지. 또 북송의 張載가 德性之知(天德良知)와 聞見之知(經驗性的)에 대해 언급한 것도 참조할 만 한다. (마치 서양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대립처럼) 對陽明來說,良知就是本心,心之本體,是我們理性之根據, 양지 자체는 시비지심이다. 동시에 도덕행위의 주체다. 시비선악을 분별하는 근거이자 도덕행위를 하는 주체. 나아가 양지는 인간 존재의 근거를 밝히는 열쇠다. 양지는 완전한 인간 존재의 표징이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확증할 척도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도덕행위의 본질로서의 양지, 이런 양지는 도덕행위의 실천을 통해, 더 정확히는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 영위(營爲)를 통해 증명해야 한다.
➤致良知문제
치양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우선 현실문제로부터 촉발된다. 양지는 감관으로 인식하는 외물세계 속에서 쉽게 상실된다. 마치 불교에서 육근에 근거한 육식의 작용처럼, 인간의 인식이란 것은 늘 외부로부터의 촉발과 내외적 감관의 식별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감각으로 주어진 감각소여로 생활세계라는 경험적 소여로서의 유의미한 세계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칸트 철학에서 보자면 우리는 현상에 늘 매여있다.
현상에 매여있는 우리가 어떻게 참 앎에 도달할까? 양명의 치양지를 간단히 말하자면, 양지를 다시 찾는 것이다. 양지의 회복이란 각도에서 보자면 일찌기 맹자가 "求其放心而已矣"라고 논했으며, 董平교수도 反思, 즉 반성하는 자아를 양지를 회복하는 일종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양명은 결국 말로만 나불대는 인간상을 넘어서 행동하는 인간상을 목표로 했다. 그의 말처럼 "致吾心之良知于事事物物” 내 마음 속의 양지를 사물에까지 이르게 하는 삶을 추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지의 실현과 확장은 결국 대학이 말하는 명명덕의 또 다른 방편이겠다.
요약하자면, 치양지의 두 가지 기능으로는 첫째, 자기 자아의 명징화(開明,自明,自知), 주체성의 계발이자 자기 건설에 해당하고, 둘째는 주체성의 외재적 발현, 사물에까지 미치는 양지의 세계이해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양지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양명은 양지자체의 완전성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우리 모두 그런 보편적 양지를 담지하고 있는지는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고 명백한 도덕문제에서 양지는 제대로 작동하겠지만, 혹은 양지의 회복에 대해 강하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가치판단의 문제가 선과 악에 걸쳐있거나 그 가치의 기준이 모호한 경우에 양지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心과 物 문제
양명은 마음 밖에 따로 사물이 없다無心外之物라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학단에서는 더욱이 50년대 이후 맑시즘의 기치 하에 양명의 주관유심주의는 잘못된 사상으로 오인되어왔거나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중국에는 서양의 유심-유물에 대비될만한 전형적 유물주의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은 불교사상에서 두드러진 특징일 뿐, 전통적 유가의 가치체계와 학술계통에서는 객관적 사물을 분리시킨 유심주의의 발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양명이 제자들과 회계산에 갔을 때, 떨어지는 꽃을 보며 꽃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상관없을 때는 同歸於寂라고 했는데, 寂에서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꽃을 보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 느낌이 발생할 때, 寂에 있던 꽃은 구체적 사물로 드러나게顯 된다. 일종의 인식론적 전환이라고 할까. 體用一源,顯微無間。
仁人은 자기 속의 사단을 확충하는 사람이고, 사물과 자기 마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자다. 關心과 不關心의 문제는 결국 사람과 우주 사이에 올바른 관계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사물의 미묘한 관계성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관심 없는 사람은 사물의 문제, 나 밖의 문제에 대해 해결할 기미를 놓치게 된다.
➤四句教와 天泉證道
사구의 가르침이란 아래와 같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심의 본체이고(無善無惡之心體)
치양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우선 현실문제로부터 촉발된다. 양지는 감관으로 인식하는 외물세계 속에서 쉽게 상실된다. 마치 불교에서 육근에 근거한 육식의 작용처럼, 인간의 인식이란 것은 늘 외부로부터의 촉발과 내외적 감관의 식별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감각으로 주어진 감각소여로 생활세계라는 경험적 소여로서의 유의미한 세계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칸트 철학에서 보자면 우리는 현상에 늘 매여있다.
현상에 매여있는 우리가 어떻게 참 앎에 도달할까? 양명의 치양지를 간단히 말하자면, 양지를 다시 찾는 것이다. 양지의 회복이란 각도에서 보자면 일찌기 맹자가 "求其放心而已矣"라고 논했으며, 董平교수도 反思, 즉 반성하는 자아를 양지를 회복하는 일종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양명은 결국 말로만 나불대는 인간상을 넘어서 행동하는 인간상을 목표로 했다. 그의 말처럼 "致吾心之良知于事事物物” 내 마음 속의 양지를 사물에까지 이르게 하는 삶을 추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지의 실현과 확장은 결국 대학이 말하는 명명덕의 또 다른 방편이겠다.
요약하자면, 치양지의 두 가지 기능으로는 첫째, 자기 자아의 명징화(開明,自明,自知), 주체성의 계발이자 자기 건설에 해당하고, 둘째는 주체성의 외재적 발현, 사물에까지 미치는 양지의 세계이해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양지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양명은 양지자체의 완전성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우리 모두 그런 보편적 양지를 담지하고 있는지는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고 명백한 도덕문제에서 양지는 제대로 작동하겠지만, 혹은 양지의 회복에 대해 강하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가치판단의 문제가 선과 악에 걸쳐있거나 그 가치의 기준이 모호한 경우에 양지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心과 物 문제
양명은 마음 밖에 따로 사물이 없다無心外之物라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학단에서는 더욱이 50년대 이후 맑시즘의 기치 하에 양명의 주관유심주의는 잘못된 사상으로 오인되어왔거나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중국에는 서양의 유심-유물에 대비될만한 전형적 유물주의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은 불교사상에서 두드러진 특징일 뿐, 전통적 유가의 가치체계와 학술계통에서는 객관적 사물을 분리시킨 유심주의의 발전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양명이 제자들과 회계산에 갔을 때, 떨어지는 꽃을 보며 꽃과 사람의 마음이 서로 상관없을 때는 同歸於寂라고 했는데, 寂에서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꽃을 보고 그것에 대해 구체적 느낌이 발생할 때, 寂에 있던 꽃은 구체적 사물로 드러나게顯 된다. 일종의 인식론적 전환이라고 할까. 體用一源,顯微無間。
仁人은 자기 속의 사단을 확충하는 사람이고, 사물과 자기 마음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자다. 關心과 不關心의 문제는 결국 사람과 우주 사이에 올바른 관계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사물의 미묘한 관계성에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관심 없는 사람은 사물의 문제, 나 밖의 문제에 대해 해결할 기미를 놓치게 된다.
➤四句教와 天泉證道
사구의 가르침이란 아래와 같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심의 본체이고(無善無惡之心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의 움직임이고(有善有惡意之動)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이며(知善知惡是良知)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것은 격물이다(爲善去惡是格物)
이 사구교는 <전습록>과 왕기[王畿] 의 <천천증도기>등에서 보이지만, 정작 양명의 문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왕기는 심체가 무선무악하다 가르침을 일종의 권의지설로 받아들였을 뿐, 확정된 정설로 여기지는 않았다. 전덕홍은 그와 반대로 사구의 가르침을 확정된 교설로 여기고 왕기와 의견을 달리했다. 이후 왕기는 사구교를 사무설로 발전시켰다. 명말 黃宗羲는 전덕홍이 사구교에 얽매여 독자적인 이해가 없는 것을 보고 把攬放舟(배는 보내버리고 밧줄만 붙잡고 있다)고 평했고, 왕기의 사상은 양명의 사상을 고취 발전시켰지만, 점점 그 본래적 의미는 잃었다고 평했다.
無善無惡라는 사상적 이해는 중국의 유가 전통에서는 드물다. 그러나 양명이 주장한 무선무악은 선의 부재나 가치판단의 중지라는 의미보다는 지선의 한 상태, 정확히는 본심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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